선교사 열전 200인
판디타 라마바이 (Pandita Ramabai)
인도의 브라만 계급 출신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후, 여성 교육과 인권 향상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회 개혁가입니다.

인도의 등불, 판디타 라마바이: 힌두 과부들의 해방자, 교회의 어머니
서론: 브라만 학자, 여성 해방의 선구자가 되다
19세기 말 인도, 여성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굴레의 연속이었다. 특히 남편을 잃은 힌두교 과부의 삶은 살아있는 지옥과도 같았다. 머리가 깎이고,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불길한 존재로 낙인찍혀 평생을 멸시와 학대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이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잔인한 억압의 사슬을 끊기 위해, 바로 그 사회의 가장 정점에 있던 한 여성이 일어섰다. 그녀는 힌두교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남성 학자들로부터 '판디타(Pandita, 여학자)'라는 칭호를 얻은 브라만 천재 소녀였고, 훗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모든 굴레를 끊어낸 '인도의 등불' 판디타 라마바이였다.
그녀의 삶은 인도의 여성 해방 운동사 그 자체이며, 동시에 개인적인 비극과 사회적 편견, 그리고 신앙적 고뇌를 넘어선 한 위대한 영혼의 투쟁기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힌두교 개혁가로서 여성 교육 운동을 이끌었지만, 영국에서 기독교를 만난 후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의 길임을 깨닫고,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버려진 여성들을 위한 거대한 '구원의 도시'를 건설했다.
그녀는 서양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는 수동적인 개종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비전과 신념에 따라 독립적으로 사역을 이끌어간 주체적인 지도자였으며, 인도 사회의 가장 깊은 병폐를 가장 인도적인 방식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선구자였다. 본 글은 '인도의 위대한 딸'이라 불리는 판디타 라마바이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브라만 학자였던 그녀가 어떻게 여성 문제에 눈을 뜨고 사회 개혁가로 나서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녀의 극적인 기독교 개종과,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거센 비난 속에서 과부들을 위한 '샤라다 사단'과 '묵티 선교회'를 세운 과정을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헌신이 인도 사회와 교회에 어떤 불멸의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브라만 천재 소녀, 여성의 비참을 목격하다
판디타 라마바이의 비범함은 그녀의 파격적인 가정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판디타'와 '사라스바티'
1858년,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난 라마바이는 당시의 관습을 완전히 거스르는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아난트 샤스트리는 산스크리트어 학자로서, 여성을 교육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대에 아내와 딸에게 직접 산스크리트어와 힌두 경전을 가르쳤다. 라마바이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발휘하여, 12살 때 이미 18,000개에 달하는 경전 구절을 암송할 정도였다.
대기근으로 부모님과 언니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인도 전역을 순례하며 학문적 명성을 쌓아갔다. 1878년, 20세의 나이로 콜카타(캘커타)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산스크리트어 실력과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도시의 모든 남성 브라만 학자들을 경악시켰다. 콜카타 대학의 학자들은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에게 '여성 석학'이라는 의미의 **'판디타(Pandita)'**와, 학문과 지혜의 여신의 이름을 딴 **'사라스바티(Sarasvati)'**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수여했다.
개인적 비극과 사회 개혁가로의 각성
라마바이는 카스트 제도의 굴레를 깨고 자신이 선택한 낮은 계급의 변호사와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 19개월 만에 남편이 콜레라로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딸과 함께 과부가 되었다. 바로 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그녀는 인도 사회에서 과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사회 개혁가로 나섰다. 1882년, 그녀는 여성 교육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하는 '아리야 마힐라 사마즈(Arya Mahila Samaj, 아리아 여성회)'를 창설하고, 조혼(早婚)의 폐지와 과부들의 재혼 권리, 그리고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도 전역에 역설했다. 그녀는 이미 기독교인이 되기 전부터, 인도 최초의 위대한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본론 2: 십자가의 빛, 과부들의 피난처를 세우다
여성 교육을 위한 더 깊이 있는 학문을 배우기 위해 1883년 영국으로 건너간 라마바이의 삶은, 기독교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지적인 회심
영국에서 그녀는 앵글리칸(성공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공동체에 머물며 기독교 신앙을 깊이 접하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기독교 교리에 대해 수많은 지적인 질문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특히 약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신분과 관계없이 서로를 섬기는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카스트 제도와 운명론에 갇힌 힌두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희망을 발견했다. 오랜 고뇌 끝에, 그녀는 1883년 영국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샤라다 사단'과 민족주의자들의 공격
미국을 거쳐 1889년 인도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 새로운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과부들을 위한 집을 세우는 일에 착수했다. 그녀는 뭄바이(봄베이)에 **'샤라다 사단(Sharada Sadan, 지혜의 집)'**이라는 이름의 학교 겸 쉼터를 열었다. 이곳은 남편을 잃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어린 과부들에게 안전한 거처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인도 최초의 시설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많은 힌두교 개혁가들도 그녀의 활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샤라다 사단'에 머물던 몇몇 과부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는 일이 생기자, 상황은 급변했다. 발 강가다르 틸락(Bal Gangadhar Tilak)과 같은 힌두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라마바이가 "사회 사업을 미끼로 순진한 힌두 여성들을 개종시킨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후원이 끊기고, 학생들은 강제로 끌려 나갔으며, 그녀는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본론 3: 묵티(Mukti), 구원의 도시를 건설하다
거센 비난과 반대 속에서, 라마바이는 자신의 사역이 더 이상 힌두 개혁가들의 도움 아래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는 독립적인 기독교 기관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기근의 현장에서 수천 명을 구하다
그녀의 사역이 폭발적으로 확장된 것은 1896년 인도 중부를 강타한 대기근 때문이었다. 그녀는 직접 황폐해진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거나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던 수천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구조했다. 그녀는 소, 말, 마차를 동원하여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실어 날랐다.
'묵티 선교회'의 탄생
그녀가 구해온 수많은 여성들을 수용하기 위해, 뭄바이의 작은 '샤라다 사단'은 푸네(Pune) 근교의 케드가온(Kedgaon)에 있는 100에이커의 넓은 땅으로 이전했다. 그녀는 이곳에 '구원' 또는 '해방'을 의미하는 **'묵티 선교회(Mukti Mission)'**를 설립했다.
'묵티'는 단순한 고아원이나 과부의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2,000명이 넘는 여성과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거대한 자급자족 공동체, 즉 '구원의 도시'였다. 이곳에는 학교, 병원, 직업 훈련소(농업, 인쇄, 방직 등), 그리고 수천 명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거대한 교회가 세워졌다. 버림받았던 여성들은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기술을 익혔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00년대 초, 묵티 공동체에는 강력한 성령의 부흥이 임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깊은 회심과 영적 체험을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결론: 인도의 위대한 딸, 시대를 초월한 영감
1922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판디타 라마바이는 인도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녀는 브라만으로서의 특권, 학자로서의 명성, 그리고 개인의 안락한 삶을 모두 버리고, 기꺼이 '과부들의 어머니', '고아들의 친구'가 되었다.
그녀의 유산은 실로 거대하다.
그녀는 인도 여성 해방 운동의 가장 위대한 선구자였다. 그녀의 투쟁은 조혼과 과부 학대와 같은 힌두 사회의 악습에 균열을 내고,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사회 전체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실천하는 신앙'의 위대한 모델을 제시했다. 그녀는 기독교의 사랑이 단지 내세의 구원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구체적인 억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해방의 능력임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녀는 자립적인 인도 기독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과 리더십으로 거대한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고 이끌었던 최초의 인도 여성이었다.
판디타 라마바이의 삶은, 한 사람이 신앙과 용기로 무장할 때, 얼마나 거대한 사회적 편견과 구조적 악에 맞서 싸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불멸의 증거이다. 그녀는 인도 교회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인도 민족 전체가 자랑하는 '인도의 위대한 딸'로서, 시대를 초월하여 정의와 해방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