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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 텐 붐 (Corrie ten Boom)
2차 대전 중 유대인을 숨겨주다 나치 수용소에 갇혔고, 풀려난 후 전 세계를 다니며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 '그리스도의 방랑자'입니다.

'숨는 장소'를 만든 여인, 코리 텐 붐: 증오의 감옥에서 용서의 사도가 되다
서론: "용서란 죄수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 그리고 그 죄수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
1947년 독일 뮌헨의 한 교회, 나치의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 네덜란드 여인이 '용서'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다. 설교가 끝난 후,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를 즉시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수용소에서 자신과 수많은 여인들을 학대하고 모욕했던 잔인한 간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며 용서를 구했다. 그 순간, 코리 텐 붐의 마음속에서는 증오와 복수심이 불같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했고, 마침내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그의 손을 잡고 "형제여, 당신을 온전히 용서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극적인 순간은 코리 텐 붐의 삶 전체를 요약한다. 그녀는 나치에 저항하여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한 의인이었고, 수용소의 끔찍한 고통을 이겨낸 생존자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가장 큰 원수마저 용서함으로써 십자가 사랑의 가장 깊은 의미를 증거한 '용서의 사도'였다. 그녀의 자서전 **『숨는 장소(The Hiding Place)』**는 20세기 기독교 문학의 가장 위대한 고전 중 하나로,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을 증거하고 있다.
본 글은 이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였던 코리 텐 붐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평범한 시계 수리공이었던 그녀의 가족이 어떻게 유대인들을 위한 '숨는 장소'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강제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시련과 언니 벳시의 죽음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평생에 걸쳐 전 세계에 전한 '용서'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시계방의 '숨는 장소'
코리 텐 붐은 1892년 네덜란드 하를럼(Haarlem)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100년 넘게 시계방을 운영하며, 이웃을 섬기고 경건한 삶을 살아온 존경받는 시민이었다.
나치의 어둠, 사랑의 등불을 켜다
1940년,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끔찍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코리 텐 붐과 그녀의 가족은 "하나님의 눈에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신앙 양심에 따라, 위험에 처한 유대인 이웃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작은 시계방 집은 네덜란드 저항 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그들은 코리의 침실 벽 뒤에 비밀 공간, 즉 **'숨는 장소(The Hiding Place)'**를 만들었다. 이 작은 공간은 게슈타포의 갑작스러운 수색이 있을 때 유대인들이 피신할 수 있는 생명의 방주였다. 텐 붐 가족은 이 숨는 장소를 통해 약 800명에 달하는 유대인들과 저항군 대원들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체포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
1944년 2월, 한 네덜란드인 밀고자의 배신으로 텐 붐 가족의 비밀 활동은 발각되었다. 코리와 그녀의 언니 벳시(Betsie), 아버지 캐스퍼(Casper),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모두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84세의 고령이었던 아버지는 체포된 지 열흘 만에 감옥에서 "만약 내가 오늘 나의 유대인 형제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큰 영광"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코리와 벳시는 여러 감옥을 거쳐, 독일의 악명 높은 여성 전용 강제 수용소인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의 삶은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굶주림과 강제 노동, 질병, 그리고 간수들의 잔인한 학대 속에서 수많은 여인들이 죽어나갔다.
본론 2: 어둠 속에서 발견한 진리 - 벼룩과 용서
지옥과도 같은 수용소 안에서, 코리와 벳시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몰래 숨겨 들어온 성경 한 권을 의지하여, 밤마다 동료 수감자들을 모아 비밀 예배를 드렸다.
벳시의 비전: "더 깊은 지옥은 없다"
특히 언니 벳시의 흔들림 없는 신앙은 코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벼룩이 들끓는 더럽고 끔찍한 막사에서 코리가 불평했을 때, 벳시는 "우리가 이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성경을 읽고 예배드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저 벼룩들 때문이야. 간수들조차 이곳에는 들어오기 싫어하잖아. 벼룩들마저도 감사하자"고 말했다.
벳시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전쟁이 끝나면 자신들을 학대했던 바로 그 간수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세워야 한다는 놀라운 비전을 보았다. 그녀는 코리에게 "코리, 우리는 저들에게 진리를 말해주어야 해... 저들의 마음보다 더 깊은 지옥은 없어"라고 말했다. 그녀는 원수들을 향한 용서와 사랑을 꿈꾸었다. 1944년 12월, 벳시는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기적적인 석방과 용서의 시험
벳시가 죽은 지 며칠 후, 코리는 행정 착오로 인해 기적적으로 석방되었다. 그녀가 석방된 지 불과 일주일 후, 수용소에 남아있던 그녀 또래의 모든 여성들은 가스실에서 처형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는 언니 벳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한 치유의 집'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깊은 구덩이는 없다"는 메시지를 들고 전 세계를 다니는 '그리스도의 방랑자(a tramp for the Lord)'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7년, 그녀는 독일의 한 교회에서 자신을 학대했던 바로 그 간수를 만나, 자신의 신앙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 즉 '용서'의 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결론: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한 숨는 장소
1983년 91세의 생일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코리 텐 붐은 60여 개국을 여행하며 자신의 간증을 나누었다. 그녀의 이야기 『숨는 장소』는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수천만 명에게 깊은 감동과 영적 도전을 주었다.
그녀의 유산은 명확하다.
그녀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속에서 '의인'의 삶을 살았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그리고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용서'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녀는 용서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의지의 결단임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녀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했다. 그녀는 가장 깊은 어둠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코리 텐 붐의 삶은, 평범한 한 가족이 비범한 용기를 낼 때, 어떻게 역사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숨는 장소'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상처 입은 전 세계의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따뜻하고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