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 200인
존 윌리엄스 (John Williams)
'남태평양의 사도'로 불리며, 선교선을 타고 수많은 섬에 복음을 전했으나 바누아투에서 식인 풍습으로 인해 순교했습니다.

남태평양의 사도, 존 윌리엄스: 복음의 배를 타고 폴리네시아를 누빈 탐험가
서론: '복음의 메신저'호, 미지의 바다를 향하다
19세기 초, 광활한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은 서구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그곳에는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폴리네시아인들이 살고 있었고, 부족 간의 전쟁과 식인 풍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바로 이 망망대해 위로, 자신이 직접 만든 배에 '복음의 메신저(The Messenger of Peace)'라는 이름을 붙이고, 섬에서 섬으로 항해하며 복음을 전파했던 한 영국인 선교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윌리엄스, 런던 선교회(LMS)가 낳은 가장 위대한 탐험가형 선교사 중 한 명이자, '남태평양의 사도'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전통적인 선교사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선교지는 광활한 태평양 그 자체였다. 그는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 기술, 그리고 불굴의 용기로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닷길을 개척하며, 소시에테 제도부터 쿡 제도, 사모아, 통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섬에 최초로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그의 사역은 단순한 설교를 넘어, 원주민들에게 문자를 만들어주고, 성경을 번역하며, 서구의 기술을 전수하는 문명화 사역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항해는 비극적인 순교로 막을 내린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지의 섬에 첫발을 내디뎠다가, 원주민들의 오해와 증오 속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 세계 교회에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과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본 글은 이처럼 바다 위를 자신의 교구로 삼았던 존 윌리엄스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남태평양의 선교사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그가 '복음의 메신저'호를 타고 펼쳤던 혁신적인 선교 활동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순교가 남긴 의미와 그의 유산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런던의 기술자, 폴리네시아를 향한 부르심
존 윌리엄스는 1796년 런던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부터 철공소의 도제로 일하며 기술을 익혔다. 바로 이 실용적인 기술 훈련이 훗날 그의 선교 사역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18세 때, 그는 한 교회 집회에서 깊은 회심을 체험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해외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게 되었고, 런던 선교회(LMS)에 지원하여 1816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 메리(Mary)와 함께 남태평양으로 파송되었다.
그의 첫 사역지는 타히티(Tahiti) 근처의 라이아테아(Raiatea) 섬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10년 넘게 사역하며, 현지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하고, 원주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는 단순한 설교자를 넘어, 대장장이, 조선공, 건축가, 그리고 농부였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집 짓는 법, 배 만드는 법,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법전을 만드는 것을 도와 사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실용적인 헌신은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켰고, 섬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부흥을 이끌어냈다.
본론 2: '복음의 메신저'호 - 섬들을 잇는 복음의 다리
라이아테아 섬에서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던 윌리엄스의 마음은,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수많은 다른 섬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사역지는 한 섬이 아니라, 태평양 전체"라고 선언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선교선
이 거대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그에게는 섬과 섬 사이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 배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선교 본부의 지원을 기다릴 수 없었던 그는, 놀랍게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배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선 경험이 전무했지만, 책을 보며 독학하고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70톤급의 쌍돛대 범선(schooner)을 건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배에 **'복음의 메신저(The Messenger of Peac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배는 그의 선교 사역의 상징이자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그는 '복음의 메신저'호를 타고, 1823년부터 1830년대까지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방문했다. 그는 라로통가(Rarotonga)섬을 비롯한 쿡 제도를 '발견'하여 복음을 전했고, 사모아, 통가 등 당시까지 서구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폴리네시아의 주요 섬들에 최초로 기독교를 소개했다.
그의 선교 방식은 매우 지혜로웠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가르치려 하기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라이아테아나 타히티의 원주민 신자들을 훈련시켜, 그들을 새로운 섬의 선교사로 파송했다. 폴리네시아인이 폴리네시아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원주민 선교' 전략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복음은 남태평양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본론 3: 에로망고 섬의 순교와 꺼지지 않는 불꽃
1838년, 영국을 방문하여 자신의 선교 경험을 담은 책 『남태평양 선교 사업 이야기(A Narrative of Missionary Enterprises in the South Sea Islands)』를 출판하고, 새로운 선교선 '캠든(Camden)'호를 헌납받은 윌리엄스는 다시 남태평양으로 돌아왔다. 그의 목표는 폴리네시아를 넘어, 더욱 험난하고 위험한 땅으로 알려진 멜라네시아(Melanesia)로 선교의 지경을 넓히는 것이었다.
비극의 해변
1839년 11월, 그는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에로망고(Erromango) 섬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평화의 손짓을 하며 해변에 상륙했다. 그러나 에로망고 섬의 원주민들은 얼마 전 그곳을 다녀간 백인 상인들(백단향 무역상)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착취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윌리엄스의 일행 역시 자신들을 해치러 온 악의적인 이방인이라고 오해했다.
그들이 해변에 발을 딛는 순간, 숲속에 숨어 있던 원주민 전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윌리엄스와 그의 동료 선교사 제임스 해리스(James Harris)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들의 곤봉과 창에 맞아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남태평양의 사도'는 그렇게 43세의 나이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섬사람들의 손에 순교의 피를 흘렸다.
순교의 피, 교회의 씨앗이 되다
존 윌리엄스의 순교 소식은 전 세계 기독교계에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의 희생은 오히려 남태평양 선교에 대한 전 세계 교회의 관심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윌리엄스가 쓰러진 저 땅으로 우리가 가겠다"며 런던 선교회에 지원했다. 그의 순교 이후, 더 많은 선교사들이 뉴헤브리디스 제도로 파송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바로 그 에로망고 섬의 원주민들은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과오를 참회하며 순교 기념 교회를 세웠다. 존 윌리엄스와 제임스 해리스를 살해했던 바로 그 부족의 후손들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된 것이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결론: 바다에 새겨진 위대한 항해
존 윌리엄스는 기술자의 손과 탐험가의 심장, 그리고 사도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안락한 사역지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복음의 메신저'호를 타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갔다. 그의 항해는 남태평양의 지도를 바꾸었고, 수많은 섬들의 운명을 바꾸었으며, 세계 선교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는 원주민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의 지도력을 세우고자 했던 시대를 앞서간 선교 전략가였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배를 만들고, 자신의 발로 미지의 섬을 밟으며, 마침내 자신의 피로 그 땅을 거룩하게 했다.
존 윌리엄스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안전한 항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거친 풍랑이 몰아치는 미지의 바다로 우리를 부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비록 그의 항해는 에로망고의 비극적인 해변에서 멈추는 듯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 위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오늘날까지도 그 파도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