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 200인
존 메이슨 펙 (John Mason Peck)
'서부의 사도'라 불리며,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지에서 교회를 세우고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미국 서부의 사도, 존 메이슨 펙: 미시시피 광야에 문명의 씨앗을 심다
서론: 또 하나의 미개척지, 미국 서부
19세기 초, 기독교 선교의 황금기가 열리면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미지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 미국 내부에도 그에 못지않은 광활하고 영적으로 황량한 '미개척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끝없이 펼쳐진 서부의 광야, 미시시피강 유역이었다. 이곳은 법과 질서가 미치지 않는 무법천지였고, 동부의 안정된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거칠고 혼란스러운 변경(frontier)이었다.
이 영적인 진공 상태와도 같았던 땅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지으며 기독교 문명의 초석을 놓고자 했던 한 명의 개척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메이슨 펙, '서부의 사도(Apostle of the West)'라 불리는 미국 침례교 최초의 서부 파송 선교사였다. 그는 말을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누비는 순회 목사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개척하고, 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며, 성경 보급 협회와 역사 협회를 조직한 위대한 '기관 설립자(institution builder)'였다.
그의 사역은 단순히 개인을 전도하는 것을 넘어, 새롭게 형성되는 서부 사회의 '영혼'을 빚고, 그곳에 경건하고 교육받은 기독교 문명을 건설하려는 거대한 비전의 일부였다. 본 글은 이처럼 미국 중서부의 종교적, 문화적 지형을 형성한 존 메이슨 펙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안정된 동부를 떠나 서부의 광야로 향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말 안장 위에서 펼친 그의 다각적인 개척 사역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서부 개척 시대에 남긴 유산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동부의 목사, 서부의 광야를 향하다
존 메이슨 펙은 1789년 코네티컷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학문을 익혔고, 깊은 회심을 체험한 후 뉴욕에서 침례교 목사로 안수받았다.
미시시피 계곡을 향한 비전
당시 미국은 서쪽을 향한 팽창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펙의 눈에, 서부로 몰려가는 수많은 이주민들의 물결은 영적인 인도자 없이 방황하는 양 떼와 같았다. 미시시피강 유역의 광활한 영토는 영적으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고, 그는 이곳이 미국의 미래를 결정할 영적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당시 아도니람 저드슨의 해외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막 창설되었던 미국 침례교 총회(Triennial Convention)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해외 선교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서부 개척지 역시 시급한 선교지라는 것이었다. 그의 열정에 감동한 총회는 마침내 1817년, 존 메이슨 펙과 그의 동역자 제임스 웰치를 미주리 준주(Missouri Territory)에 파송하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본론 2: 말 안장 위의 개척자, 기관을 세우다
세인트루이스에 거점을 마련한 펙의 삶은 그야말로 '말 안장 위의 삶'이었다. 그는 미주리와 일리노이의 광활한 지역을 끊임없이 순회하며, 개척민들의 오두막, 선술집, 강가, 그리고 숲속 공터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순회 설교를 넘어선 총체적 전략
그러나 그는 곧 설교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신앙 공동체를 세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거칠고 유동적인 개척지 사회를 안정시키고, 다음 세대의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는 뿌리가 깊은 '기관(institution)'이 필요했다. 그는 설교자에서 조직가로, 그리고 문명 건설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교회 개척: 그는 작은 개척민 공동체 곳곳에 26개의 교회를 설립하고, 여러 지역 연합회를 조직하여 침례교가 서부에 뿌리내리는 기틀을 마련했다.
교육 기관 설립: 그는 "문명과 종교는 학교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주일학교를 열었고, 일리노이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이자 신학교인 '셔틀레프 칼리지(Shurtleff College)'를 설립했다. 그의 목표는 서부의 교회를 이끌어갈 현지인 목회자들을 서부 땅에서 직접 길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공립학교 제도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사회 조직 건설: 그는 미국 성서 공회, 주일학교 연합회, 전도지 보급 협회 등 다양한 기독교 단체의 지부를 서부에 조직했다. 그는 이러한 자발적인 시민 사회 조직들이야말로 민주주의와 기독교 문명의 근간이라고 믿었다. 그는 심지어 일리노이주의 역사 협회를 창설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본론 3: 서부 쟁탈전 - 개신교 문명의 보루를 세우다
존 메이슨 펙의 사역 이면에는, 서부의 미래를 둘러싼 거대한 문화적, 종교적 투쟁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었다.
'서부를 위한 호소'
그는 서부를 단순히 전도의 대상지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서부를, 미국의 미래 정체성을 결정할 '사상과 문화의 전쟁터'로 보았다. 특히 그는 당시 미시시피강 유역을 따라 교세를 확장하던 로마 가톨릭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미국 개신교도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편견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신학적, 정치적 신념의 문제였다. 그는 교황 중심의 위계적인 가톨릭이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미국의 공화주의적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동부의 교회들을 향해 "서부를 구해야 한다(A Plea for the West)"고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는 만약 개신교회가 서부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서부가 '무지하고 미신적인' 가톨릭 문화권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서부의 문화적 지형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신문과 잡지를 창간하고, 서부 정착민들을 위한 안내서를 저술하며, 개신교적 가치에 기반한 서부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결론: 서부 개척 시대의 영적 건축가
존 메이슨 펙은 40년이 넘는 세월을 서부 개척지에서 헌신한 후, 1858년 일리노이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해외 선교사들처럼 이문화권에서 사역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열정과 전략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적, 문화적 지도를 바꾼 위대한 선교사였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 미국 중서부의 교회와 학교, 그리고 시민 사회의 기틀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는 단순히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세우고 문명을 건설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실천했다.
서부 개척 시대의 영웅이 총잡이나 카우보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존 메이슨 펙과 같은 인물들이야말로 그 거칠고 혼란스러운 땅에 질서와 신앙, 그리고 교육의 기초를 놓은 진정한 건축가들이었다. 그는 광활한 미시시피의 광야를 바라보며, 그곳에 새로운 기독교 문명의 심장이 뛰는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는 말 안장 위에서 평생을 바쳐, 그 꿈의 주춧돌을 하나하나 놓아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