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 200인
조나단 고포스 (Jonathan Goforth)
캐나다 출신으로 중국과 만주 지역에서 강력한 부흥 운동을 이끈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중국과 만주를 깨운 불의 설교자, 조나단 고포스: 성령의 부흥을 갈망한 캐나다의 사도
서론: 회개의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다
1908년 만주(Manchuria)의 한 교회. 예배당은 숨 막히는 침묵과 억눌린 흐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캐나다에서 온 한 선교사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설교가 끝난 후,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장로 한 명이 갑자기 일어나 자신의 숨겨왔던 죄를 눈물로 통회하기 시작했고, 그의 고백이 끝나자 다른 신자들이 차례로 일어나 절도, 간음, 위선 등 마음속 깊이 감추어두었던 죄들을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회개의 물결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고, 교회는 거대한 영적 정화의 용광로가 되었다.
이 놀라운 부흥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중국의 찰스 피니' 혹은 '중국의 세례 요한'이라 불렸던 조나단 고포스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나 행정가는 아니었다. 그는 오직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십자가의 복음을 불같이 선포했던 단순하고도 강력한 부흥사였다. 그의 삶은 20세기 초 웨일스와 한국 평양에서 타올랐던 부흥의 불길이 어떻게 중국 땅으로 옮겨붙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그의 사역은 의화단 운동의 끔찍한 박해와 살해 위협을 통과하며 더욱 단단해졌고, 마침내 만주 대부흥이라는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 본 글은 이처럼 성령의 바람을 일으켰던 조나단 고포스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중국 내륙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으며, 의화단 운동의 시련을 겪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의 사역의 정점이었던 만주 대부흥의 특징과 그 동력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이 중국 교회와 세계 선교에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개척자의 길 - 허난성과 의화단 운동
1859년 캐나다 온타리오의 농가에서 태어난 조나단 고포스는 토론토 대학교와 녹스 칼리지에서 공부하며 목회자로 준비되었다. 그는 재학 시절부터 해외 선교에 대한 강렬한 부르심을 느꼈고, 특히 "가장 어렵고, 가장 필요가 큰 곳"으로 가고자 했다.
허난성 최초의 선교사
1888년, 그는 아내 로잘린드(Rosalind)와 함께 캐나다 장로교회 파송을 받아 중국으로 향했다. 그가 선택한 선교지는 당시까지 단 한 명의 개신교 선교사도 상주한 적이 없었던, 보수적이고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강했던 허난성(河南省) 북부였다.
그의 선교 방식은 매우 대담하고 적극적이었다. 그는 안전한 선교부 건물 안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시장과 거리로 나아가 수많은 군중을 상대로 설교하는 '광장 전도(widemouthed evangelism)'를 펼쳤다. 이러한 그의 개척 사역을 통해, 허난성의 황무지에도 조금씩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의화단 운동의 칼날 아래서
1900년, 중국 전역을 휩쓴 반외세 운동, 즉 의화단 운동(Boxer Rebellion)이 일어나면서 그의 사역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돕고 서양 오랑캐를 멸망시키자)"을 외치는 의화단원들은 서양인과 기독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고포스 가족 역시 수천 명의 성난 군중에게 포위되어 1,000km가 넘는 필사의 탈출 길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의화단원이 휘두른 칼에 맞아 머리와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끔찍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게 하는 깊은 영적 전환점이 되었다.
본론 2: 부흥을 향한 갈망과 만주 대부흥
의화단 운동의 광풍이 지나간 후, 고포스는 다시 허난성으로 돌아와 사역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이전과는 다른 깊은 영적 갈증이 있었다. 교회는 다시 세워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안에 살아있는 성령의 능력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웨일스와 평양의 불길
바로 그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소식이 들려왔다. 1904년 웨일스에서 일어난 대부흥과, 1907년 한국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 운동의 소식이었다. 특히 평양에서 일어난,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인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통회 자복하며 시작된 강력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왜 중국에는 이러한 부흥이 없는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그때부터 중국 땅에도 평양과 같은 성령의 부흥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만주를 뒤흔든 성령의 역사
기회는 1908년에 찾아왔다. 그는 만주 지역의 교회들로부터 부흥 집회를 인도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부흥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하며,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단순했다. 그는 어려운 신학 이론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성경을 펴고,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능력에 대해, 그리고 회개할 때 임하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직접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회중에게 조용히 기도할 시간을 주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곧이어 예배당 곳곳에서 억눌린 흐느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 장로가 흐느끼며 강단으로 올라와 교회의 공금을 횡령했던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그의 고백이 끝나자, 마치 댐이 무너지듯 사람들이 연이어 일어나 자신의 숨겨왔던 죄들—시기, 미움, 간음, 위선—을 눈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떤 집회에서는 이러한 공개적인 회개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만주 대부흥은 감정적인 흥분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훔쳤던 물건을 돌려주었으며,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었다. 부흥의 불길은 만주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수많은 교회들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고포스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성령께서 직접 행하신 일임을 분명히 했다.
본론 3: 불꽃같은 사역과 꺼지지 않는 유산
만주 대부흥 이후, 조나단 고포스는 '부흥사'로서 중국 전역과 한국, 그리고 고국 캐나다까지 순회하며 집회를 인도했다.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동일했다. "교회가 사는 길은 오직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뿐이다."
아내 로잘린드의 헌신
그의 곁에는 평생의 동역자였던 아내 로잘린드 고포스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의화단 운동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11명의 자녀 중 5명을 선교지에서 잃는 끔찍한 슬픔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남편의 사역을 뒷받침했다. 그녀는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여, 남편의 사역과 삶을 기록한 『중국의 고포스(Goforth of China)』와 같은 책들을 통해 그의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지막 불꽃
고포스는 말년에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어두워졌을 때, 그의 영의 눈은 더욱 밝아졌다. 그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평생에 걸쳐 암송했던 성경 말씀에 의지하여 마지막까지 설교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36년, 7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결론: 성령의 바람을 일으킨 사람
조나단 고포스는 20세기 초 중국 교회의 영적 지형을 바꾼 위대한 부흥사였다. 그의 삶은 한 사람이 성령의 능력에 대한 순수한 갈망을 품을 때,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나 전략가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문제를 정직하게 직면하게 했고, 그 유일한 해결책이신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했다. 그는 형식주의와 나태에 빠져 있던 교회에 회개의 불을 질렀고, 성령의 바람이 다시 불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
의화단의 칼날 아래서도 살아남아, 만주의 차가운 땅에 뜨거운 부흥의 불을 지폈던 그의 삶은, 고난이 깊을수록 성령의 역사는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증거한다. 조나단 고포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개인과 교회의 영적 부흥을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부흥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성령의 능력 앞에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