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 200인
이언 키스-팔코너 (Ion Keith-Falconer)
스코틀랜드의 귀족이자 학자였으나, 아라비아 예멘에서 선교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케임브리지의 학자, 사이클 챔피언, 아라비아의 순교자: 이언 키스-팔코너의 짧고 빛나는 헌신
서론: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의 선택
만약 한 사람에게 세상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스코틀랜드 백작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임명될 만큼 뛰어난 지성, 그리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건강한 육체와 불굴의 의지. 19세기 후반, 이언 키스-팔코너는 바로 이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르네상스 맨' 그 자체였으며, 그의 앞에는 명예와 안락, 그리고 학문적 성취로 가득한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세상에서 가장 덥고, 가장 척박하며, 가장 위험한 땅 중 하나인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 아덴(Aden)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31세의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쓰러져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의 삶은 C. T. 스터드와 마찬가지로,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그를 위해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는 고백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의 이야기는 오랜 기간의 풍성한 사역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짧지만 눈부시게 타올랐다가 사라진 한 영혼의 헌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삶은 결과가 아닌 동기로, 성취가 아닌 희생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다. 본 글은 이처럼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이언 키스-팔코너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가졌던 비범한 재능과 배경을 살펴보고, 무엇이 그를 아라비아로 이끌었는지 그 소명의 과정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어떻게 실패가 아닌, 한 세대의 영혼을 깨우는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는지 그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
이언 키스-팔코너의 희생이 그토록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가 버린 것들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도 크고 찬란했기 때문이다.
귀족, 운동선수, 그리고 학자
1856년, 스코틀랜드 킨토어 백작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태생부터 상류층의 모든 특권을 누렸다. 19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는 뛰어난 운동선수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당시 새롭게 유행하던 스포츠였던 사이클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1878년에는 비공식 세계 사이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지성에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신학과 셈족 언어(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등)를 공부했다. 그의 언어적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당대 최고의 동양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구약성경 주석을 번역하고, 여러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의 학문적 성취는 마침내 29세의 젊은 나이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흠정 아랍어 교수(Lord Almoner's Professor of Arabic)'로 임명되는 영예로 이어졌다. 그는 귀족의 명예, 운동선수의 인기, 그리고 최고 학자로서의 권위를 모두 손에 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경건한 신앙
이 모든 세속적 성공의 바탕에는 그의 깊고 진실한 복음주의 신앙이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7인'과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 대학가를 휩쓸었던 경건주의 부흥 운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중에도, 런던의 빈민가에서 D. L. 무디와 함께 전도 활동에 참여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교관(Mission Hall)을 운영하는 등 실천적인 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뛰어난 지성과 뜨거운 신앙이 결코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모델이었다.
본론 2: 아라비아를 향한 부르심과 헌신
세상의 정점에 서 있던 키스-팔코너의 마음은 그러나, 케임브리지의 안락한 서재가 아닌, 복음이 닿지 않은 머나먼 땅을 향하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땅을 향한 선택
그의 아랍어에 대한 깊은 지식은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을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슬람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헨리 마틴, 사무엘 즈웨머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선교의 가장 큰 도전 과제인 이슬람권 복음화에 대한 뜨거운 부담감을 느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아라비아 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아덴(Aden, 현재 예멘)이었다. 당시 아덴은 영국의 식민지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들이 석탄을 공급받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살인적인 더위와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으로 악명 높은 위험한 곳이었다. 키스-팔코너는 이곳을 아라비아 내륙으로 들어가는 선교의 관문으로 삼고자 했다.
모든 것을 바친 헌신
1885년, 그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에 자신의 계획을 알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파송되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재정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막대한 사재를 털어 선교 자금을 마련하고, 선교 기지를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아내 기텔(Gwendolen)과 함께 의학 공부를 하며 선교를 준비했고, 마침내 케임브리지 교수라는 최고의 명예직을 내려놓고 아덴으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그의 결정은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행동으로 비쳤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는 당연한 순종이었다.
본론 3: 아덴에서의 짧은 사역과 영원한 유산
1886년 12월, 이언 키스-팔코너는 아내와 함께 아덴에 도착하여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는 아덴 근처의 셰이크 오스만(Sheikh Othman)이라는 지역에 선교 기지를 마련하고, 학교와 작은 진료소를 열어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아랍어 실력을 바탕으로 현지인들과 교류하며 복음의 씨앗을 심고자 했다.
그러나 아덴의 가혹한 기후는 그의 건강을 빠르게 앗아갔다. 그는 '아덴 열병'이라 불리던 말라리아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887년 5월 11일, 아덴에 도착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그는 31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손에는 어떤 가시적인 열매도 들려 있지 않았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의 선교는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끝난 완전한 실패였다.
실패가 아닌 영감의 원천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더 큰 시작이었다. 귀족, 운동선수, 석학이라는 세상 최고의 타이틀을 가졌던 한 젊은이가, 복음을 위해 이름 없는 땅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조용히 죽어갔다는 소식은 영국과 미국 전역의 기독교 공동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당시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학생자원운동(SVM)의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의 삶은 "가장 뛰어난 자들을 가장 어두운 곳으로(The best for the darkest)"라는 선교적 도전을 온몸으로 보여준 상징이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그의 유지를 잇기로 공식적으로 결의하고, 그가 시작한 선교를 '키스-팔코너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이어받아 수많은 선교사들을 아라비아로 파송했다. 그가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결론: 가장 위대한 헌신의 가치
이언 키스-팔코너의 삶은 헨리 마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삶과 함께, 선교적 성공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그의 유산은 그가 세운 교회의 크기나 개종자의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의 유산은 그가 보여준 '희생의 깊이'와 그 희생이 다음 세대의 마음에 일으킨 '영감의 파장'으로 측정된다.
그는 세상이 제공하는 최고의 것을 누릴 수 있었지만, 기꺼이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그는 자신의 전공이었던 아랍어를 단순히 학문 연구의 도구로 삼지 않고, 아랍 민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복음의 다리로 삼고자 했다.
이언 키스-팔코너의 31년의 짧은 생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배경, 그리고 재물이 우리의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바쳐질 때 가장 위대한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눈부신 증거이다. 비록 아덴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의 육신은 빠르게 스러졌지만, 그가 보여준 헌신의 빛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하며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