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 200인
윌리엄 캐리 (William Carey)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인도로 건너가 성경 번역, 교육, 사회 개혁에 헌신했습니다.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근대 선교의 아버지, 인도에 뿌려진 위대한 씨앗
서론: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이 짧고 강력한 문장은 한 사람의 인생을 요약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운동의 정신을 담고 있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18세기 영국의 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자, 훗날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윌리엄 캐리이다.
그가 활동하기 전까지, 개신교회(특히 칼뱅주의 전통)의 상당수는 해외 선교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했다. 예수님의 '지상 대위임 명령'은 사도 시대에 이미 끝난 것으로 여겨졌고, 이교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 없이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운명론적 신학이 팽배했다. 캐리는 바로 이 견고한 신학적, 심리적 장벽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성경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를 부여한다고 주장했으며, 말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던져 그 의무를 실천했다.
그는 학자나 성직자가 아닌 평범한 장인이었지만, 스스로 언어를 익히고 세계를 연구했으며, 마침내 인도의 흙을 밟고 40년이 넘는 세월을 그곳에 헌신했다. 그의 사역은 단순히 설교와 개종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성경 번역가, 교육가, 사회 개혁가, 식물학자로서 인도 사회의 근대화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본 글은 이처럼 비범한 삶을 살았던 윌리엄 캐리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영국의 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 어떻게 세계를 향한 비전을 품게 되었는지 그의 각성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인도 세람포르에서 그가 펼쳤던 다각적이고 총체적인 선교 사역의 내용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인내와 그가 남긴 유산이 어떻게 전 세계적인 선교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구두 수선공의 꿈 - 선교적 각성
윌리엄 캐리의 위대한 여정은 화려한 강단이 아닌, 가죽 냄새와 망치 소리가 가득한 작은 구두 수선 작업장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비전은 그의 비천한 배경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지도와 함께 세계를 품다
1761년, 캐리는 잉글랜드의 가난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고, 어린 나이에 구두 수선공의 도제가 되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 어떤 환경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구두를 만들면서도 틈틈이 책을 구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를 독학으로 깨우쳤다.
그의 작업장 벽에는 그가 직접 가죽을 이어 붙여 만든 커다란 세계 지도가 걸려 있었다. 그는 쿡 선장의 탐험기와 같은 책들을 읽으며, 각 나라의 인구와 종교, 지리 정보를 이 지도 위에 꼼꼼히 기록해 나갔다. 지도를 바라보며 구두를 깁는 동안, 그의 마음은 잉글랜드의 작은 마을을 넘어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지구 반대편의 수많은 영혼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지리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의 벽을 향한 도전
회심 이후 침례교 목사가 된 캐리는 동료 목회자 모임에서 해외 선교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차가운 냉대와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영국 칼뱅주의 침례교단에는 '하이퍼-칼뱅주의(Hyper-Calvinism)'의 영향이 강했다.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노력을 통한 선교 활동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교만한 행위라고 여겼던 것이다.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1787년 한 목회자 모임에서 캐리가 이교도 전도의 의무에 대해 토론할 것을 제안하자, 좌장이었던 한 노(老)목사가 그를 향해 "젊은이, 자리에 앉게!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기로 기뻐하신다면, 자네나 나의 도움 없이도 그 일을 하실 걸세"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학적 장벽 앞에서 캐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5년여에 걸쳐 성경적, 역사적, 통계적 자료를 모아 자신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792년에 출판된, 근대 선교의 역사를 바꾼 작은 책자,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수단을 사용해야 할 의무에 대한 탐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였다. 이 책에서 캐리는 첫째,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 대위임 명령(마 28:19-20)은 사도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효한 명령임을 논증했다. 둘째, 그는 당시 알려진 모든 나라의 인구와 종교 현황을 제시하며 복음이 필요한 지역이 얼마나 광대한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자발적인 '선교 협회(Missionary Society)'의 설립을 제안했다.
이 책자는 잠자고 있던 개신교회의 양심을 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캐리는 이사야서 54장 2-3절을 본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역사적인 설교를 통해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침내 1792년 10월 2일, 캐리를 포함한 12명의 가난한 침례교 목사들이 모여 '특정 침례교 선교회(Particular Baptist Missionary Society)', 즉 최초의 근대 개신교 선교회를 창립했다.
본론 2: 세람포르에서의 헌신 - 말씀, 교육, 그리고 개혁
1793년, 윌리엄 캐리는 마침내 자신이 평생을 꿈꾸던 땅,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수많은 시련과 반대였다.
세람포르 트리오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상업적 이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엄격히 금지했다. 캐리는 영국 선박을 탈 수 없어 외국 배를 타야 했고, 캘커타에 도착해서도 동인도 회사의 감시와 방해에 시달려야 했다. 수년간의 극심한 생활고와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그의 아내 도로시는 정신 질환을 앓게 되는 비극을 겪었다.
결국 캐리는 영국령을 벗어나 캘커타 북쪽의 작은 덴마크 식민지였던 세람포르(Serampore)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평생 동역자들이 될 윌리엄 워드(William Ward)와 조슈아 마쉬맨(Joshua Marshman)을 만났다. 인쇄 기술자였던 워드와 교사였던 마쉬맨, 그리고 성경 번역가이자 언어학자였던 캐리, 이 세 사람은 '세람포르 트리오(Serampore Trio)'라 불리며 놀라운 협력 사역을 펼쳤다. 그들은 모든 수입과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며, 하나의 비전 아래 각자의 은사를 극대화하는 공동체적 선교의 위대한 모델을 보여주었다.
말씀, 교육, 그리고 사회 개혁
세람포르에서의 캐리의 사역은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첫째, 그의 사역의 심장은 단연 성경 번역이었다. 그는 "모든 민족이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져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직접 벵골어 신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했으며, 이는 산스크리트어, 마라티어, 오리야어, 힌두어, 아삼어 등 수많은 다른 언어 번역으로 이어졌다. 그는 세람포르에 인쇄소를 세워 번역된 성경과 문헌들을 대량으로 인쇄하고 보급했다. 그가 직접 번역하거나 번역을 감독한 성경과 그 일부는 40여 개 언어에 달했다.
둘째, 그는 사회 개혁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복음이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의 악까지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투쟁은 '사티(Sati)'라는 끔찍한 인도의 악습에 대한 것이었다. 사티는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를 장작더미 위에서 함께 불태워 죽이는 순장의 풍습이었다. 캐리는 이 야만적인 관행의 실태를 수년간 꼼꼼히 조사하고 기록했으며, 이를 폐지하기 위해 영국 정부와 인도 사회를 상대로 끈질긴 캠페인을 벌였다. 그의 25년간의 노력은 마침내 1829년, 윌리엄 벤팅크 총독에 의한 사티 금지법 제정이라는 결실을 보았다. 그는 또한 영아 살해, 나병 환자 유기 등의 비인간적인 관습에도 반대하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외쳤다.
셋째, 그는 교육과 과학의 개척자였다. 그는 문맹 퇴치와 계몽이 복음 수용의 중요한 토대라고 믿었다. 그는 수많은 초등학교를 세워 카스트나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의 교육 사역의 정점은 1818년 설립한 **세람포르 대학(Serampore College)**이었다. 이는 아시아 최초로 학위를 수여하는 근대적 대학으로, 인도인 지도자들이 서구의 학문과 과학을 배우되 기독교적 세계관의 기초 위에서 배우도록 설립되었다. 또한 캐리는 뛰어난 식물학자이자 원예학자로서, 인도의 식물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농업 기술을 개선하는 데 큰 공헌을 하여 학계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본론 3: 시련을 넘어선 인내와 유산
캐리의 41년간의 인도 사역은 눈부신 성취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끔찍한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된 길이기도 했다.
잿더미 속에서 다시 피어난 소망
개인적인 삶의 비극 외에도, 그의 사역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사건은 1812년에 일어난 인쇄소 화재였다. 이 화재로 인해 수년간의 피땀 어린 노력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수많은 언어로 번역된 성경 원고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산스크리트어 대사전, 귀중한 동양 고문서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그 손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캐리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이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손실은 분명 막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 재앙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받아들이고, 다음 날부터 곧바로 번역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이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이전에는 선교에 무관심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불굴의 의지에 감동하여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보내왔다. 역설적으로, 이 화재는 세람포르 선교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과 지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 근대 선교의 유산
1834년, 윌리엄 캐리는 73세의 나이로 자신이 사랑했던 땅 인도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남긴 유산은 한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첫째, 그는 개신교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는 지상 대위임 명령이 모든 교회의 최우선적이고 지속적인 의무임을 성경적으로, 실천적으로 증명해냈다. 그가 창립한 선교회와 그의 삶은 전 세계 개신교회에 선교의 불을 지폈고,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불리게 되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허드슨 테일러 등 이후의 모든 위대한 선교사들은 캐리의 어깨 위에 서 있었다.
둘째, 그는 총체적 선교의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성경 번역, 교회 개척, 교육, 의료, 사회 개혁, 문화 연구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분리될 수 없는 과업임을 보여주었다.
셋째, 그는 인도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많은 인도 역사가들조차 캐리를 '인도 근대화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가 표준화한 벵골어 문법과 인쇄술의 도입은 벵골 문예 부흥(Bengal Renaissance)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그가 세운 세람포르 대학은 인도의 고등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론: 한 구두 수선공이 세상을 바꾸다
윌리엄 캐리의 삶은 한 평범한 개인이 품은 위대한 비전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그는 부유하지도, 학벌이 뛰어나지도, 유창한 웅변가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작은 작업실에서 세계 지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던 한 명의 구두 수선공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해한 성경의 진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미지의 땅으로 향했으며,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역경과 비극 속에서도 결코 자신의 소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그가 외쳤던 모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를 온몸으로 살아낸 증거 그 자체였다.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선교사들이 낯선 땅에서 그곳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지으며,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 모든 사역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인도 세람포르의 먼지 속에서 묵묵히 말씀을 번역하고, 사티의 불길에 고통받는 여인들을 위해 눈물 흘렸던 한 위대한 개척자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윌리엄 캐리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 쉬며 전 세계를 향한 교회의 사명을 이끌고 있는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