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 200인
윌리엄 린튼 (William Linton)
4대에 걸쳐 한국에서 교육과 선교에 헌신한 린튼 가문의 시작으로, 한남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한국을 사랑한 4대의 약속, 린튼 가문 이야기: 윌리엄 린튼에서 시작된 헌신
서론: 대를 이어온 100년의 사랑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린튼(Linton)'이라는 푸른 눈의 한 미국인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명의 선교사가 낯선 땅에서 헌신했다는 기록을 넘어, 한 가족 4대가 1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땅의 가장 아픈 역사적 순간들을 함께하며 사랑을 실천해 온 감동적인 대서사시이다.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저항, 6.25 전쟁의 비극과 희생, 그리고 오늘날 분단된 한반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까지, 린튼 가문의 역사는 곧 한국의 근현대사와 깊이 맞닿아 있다.
그 위대한 역사의 첫 장을 연 인물이 바로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한국명 인돈, 印敦)이다. 1912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 땅을 밟은 그는, 이후 4대에 걸쳐 이어질 '한국 사랑'의 씨앗을 심은 위대한 개척자였다. 그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를 넘어,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정신과 희망을 심어준 교육자였으며,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일제의 폭압에 굴하지 않았던 굳건한 신앙인이었다.
본 글은 린튼 가문 100년 역사의 뿌리가 된 윌리엄 린튼의 삶과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식민지 조선에서 펼쳤던 교육 사역과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의 희생과 헌신이 아들 휴 린튼(인휴)의 순교와 손자 인요한(John Linton), 인세반(Stephen Linton)의 대북 사역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 장대한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이들 '푸른 눈의 한국인' 가문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의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인돈(印敦) 윌리엄 린튼 - 교육과 저항의 씨앗을 심다
윌리엄 린튼의 사역은 한국 역사상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시기, 즉 일제강점기에 펼쳐졌다. 그의 사역은 복음 전파와 더불어, 억압받는 민족에게 희망을 심는 일과 직결되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교육자
1912년, 미국 남장로회 파송을 받아 21세의 나이로 한국에 온 윌리엄 린튼은 전라도 군산과 전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군산 영명학교와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등에서 교장 및 교사로 섬기며 한국의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교육 사역에 전념했다.
그의 교육은 단순히 영어와 근대 학문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그가 교장으로 있었던 신흥학교와 영명학교는 3.1 만세 운동 당시 호남 지역 학생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수많은 졸업생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에게 교육은 곧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애국 운동이었다.
신사참배 반대,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그의 신앙과 용기가 가장 빛을 발한 것은 1930년대 후반, 일제가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였다. 신사참배는 일본의 왕을 신으로 숭배하는 우상숭배 행위였으며, 이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기독교의 제1계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학교들이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지만, 윌리엄 린튼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는 신사참배가 명백한 우상숭배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판하며 학생들의 참여를 막았다. 그의 이러한 완강한 저항에, 결국 일제는 그가 교장으로 있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강제로 폐교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그는 학교를 잃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신앙의 순수성과 양심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그의 이러한 굳건한 자세는 당시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던 한국 교회에 큰 용기와 도전이 되었다.
본론 2: 인휴(印休)와 인두화(印斗化) - 전쟁의 상흔 속에서 피어난 희생
윌리엄 린튼이 심은 헌신의 씨앗은 그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져, 6.25 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 속에서 순교의 피로 열매 맺었다.
아버지의 길을 따른 아들들
윌리엄 린튼의 네 아들 중 휴 린튼(Hugh Linton, 인휴)과 드와이트 린튼(Dwight Linton, 인두화)은 아버지처럼 한국 선교사가 되어 돌아왔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게 한국은 제2의 고향이었다.
특히 차남이었던 휴 린튼의 삶은 짧고 강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 장교로 참전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신학을 공부하여 1948년 선교사로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전남 순천 지역에서 결핵 퇴치와 구제 사역에 헌신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6.25 전쟁과 순교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아내와 가족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 한국을 지키기 위해 미 해군 대위로 재입대했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최전선에서 중요한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며칠 앞두고, 그는 적진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위험한 정찰 임무에 자원했다가 북한군의 총격으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한국 땅에서 태어나,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고, 마침내 한국 땅을 지키다 목숨을 바친 진정한 '순교자'였다.
한편, 그의 동생 드와이트 린튼 역시 선교사로서 한국의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훗날 한남대학교로 발전하게 되는 대전대학의 설립을 주도하며 아버지의 교육 선교 유산을 이어갔다.
본론 3: 인요한(印耀漢)과 인세반(印世潘) - 분단된 한반도를 품다
린튼 가문의 한국 사랑은 3대와 4대에 이르러, 분단된 한반도의 가장 아픈 곳, 북한을 향한 인도주의적 사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한 의사, 인요한
순교자 휴 린튼의 아들인 인요한(John Linton)은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푸른 눈의 한국인'으로 유명하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인 그는, 한국의 응급 의료 시스템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1990년대 초, 한국의 좁은 골목길에 맞는 '한국형 앰뷸런스'를 직접 개발하여 보급했으며, 이는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의 사역은 남한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과도 같았던 북한의 결핵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수십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결핵 퇴치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린튼 가문의 이름을, 분단된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화해의 이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북한 결핵 퇴치의 선구자, 인세반
윌리엄 린튼의 또 다른 손자인 스티븐 린튼(Stephen Linton, 인세반) 역시 북한을 향한 헌신으로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1995년 '유진벨 재단(Eugene Bell Foundation)'을 설립하여, 지난 30년 가까이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묵묵히 북한의 결핵 환자, 특히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을 위한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지원해왔다. 그의 끈질긴 인도주의적 노력은 북한의 수많은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굳게 닫힌 북한 사회에 신뢰와 사랑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결론: 푸른 눈의 한국인, 100년의 사랑
윌리엄 린튼이 1912년 한국 땅에 심은 하나의 밀알은, 4대에 걸친 거대한 생명나무로 자라났다. 그 나무는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교육의 그늘을,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는 순교의 붉은 열매를, 그리고 오늘날 분단의 상처 위에서는 치유와 화해의 푸른 잎사귀를 틔우고 있다.
린튼 가문의 사람들은 단순히 '한국에서 사역한 미국인'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의 역사와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기꺼이 '푸른 눈의 한국인'이 되기를 선택했다. '인돈(印敦)', '인휴(印休)', '인요한(印耀漢)'과 같은 그들의 한국 이름은, 이 땅과 사람들을 향한 그들의 깊은 사랑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윌리엄 린튼에서 시작된 110여 년의 이야기는, 한 가족의 신실한 헌신이 어떻게 세대를 넘어 한 민족의 운명에 깊이 관여하며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이다. 그들의 삶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