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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 (Óscar Romero)

엘살바도르의 대주교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사회 정의를 외치다 미사 집전 중 암살당했습니다.

소리 없는 이들의 소리, 오스카 로메로: 제단 위에서 흘린 순교의 피
서론: 총탄이 멎게 한 심장, 그러나 멈추지 않은 목소리
1980년 3월 24일 저녁,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 있는 한 작은 병원 경당. 미사를 집전하던 대주교가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며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하는 순간, 한 발의 총성이 고요한 성당을 갈랐다. 제단 위에 쓰러진 대주교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는, 그가 방금 축성했던 포도주와 하나가 되었다. 이날 암살당한 이가 바로, 2018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된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이다.

그는 처음부터 불의에 맞서는 투사가 아니었다. 그는 보수적이고 온건하며, 교회와 국가 권력의 분리를 신봉하던 평범한 성직자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고, 특히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암살을 계기로, 침묵하는 목자에서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로 거듭났다. 그의 강론은 군부 독재의 폭압 아래 신음하던 엘살바도르 국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의 목소리이자 진실의 창구가 되었다.

그의 삶은 한 인간이 어떻게 시대의 양심으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여정이며, 그의 죽음은 복음이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설 때 세상 권력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증언이다. 본 글은 '소리 없는 이들의 소리'가 되었던 오스카 로메로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보수적인 학자였던 그가 어떻게 민중의 목자로 변화되었는지 그 회심의 과정을 살펴보고, 군부 독재에 맞서 진실을 외쳤던 그의 용기 있는 사역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순교가 엘살바도르와 전 세계에 어떤 깊은 울림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보수적인 학자, 민중의 편에 서다
오스카 로메로는 1917년 엘살바도르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된 후, 20년 이상을 산미겔 교구에서 조용히 사목하며 보수적인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책벌레' 로메로와 변화의 바람
그는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학구적이었고, 정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꺼렸다. 그는 당시 남미 가톨릭 교회를 휩쓸고 있던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그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1977년 그가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엘살바도르의 부유한 과두 지배층과 군부 정권은 크게 안도했다. 그들은 로메로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가난한 농민들과 진보적인 사제들은 그의 임명에 실망했다.

친구의 죽음, 양심을 깨우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대주교로 임명된 지 불과 몇 주 만에 일어났다. 1977년 3월 12일,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가난한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하던 예수회 소속 루틸리오 그란데(Rutilio Grande) 신부가 정부가 보낸 암살단에 의해 길 위에서 두 명의 농부와 함께 무참히 살해당했다.

친구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로메로는 깊은 충격과 영적 각성을 경험했다. 그는 더 이상 침묵이 중립이 아니라, 불의에 동조하는 죄악임을 깨달았다. 그는 "만약 그들이 루틸리오 신부를 단지 그가 행한 일 때문에 죽였다면, 나 또한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날 이후, 겁 많고 보수적이던 학자 로메로는 죽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불의에 맞서는 용감한 목자 로메로가 다시 태어났다.

본론 2: 마이크를 든 예언자 - 진실을 위한 투쟁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장례 미사에서, 로메로는 암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정부의 어떤 공식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군부 정권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정면 도전이었다. 이후 그의 무기는 산살바도르 대성당의 설교단과 라디오 마이크가 되었다.

'희망의 주간 강론'
당시 엘살바도르의 모든 언론은 정부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주 일요일 아침 대성당에서 거행되고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는 로메로 대주교의 강론은, 국민들이 진실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그의 강론은 단순한 성경 해설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한 주 동안 군부와 우익 암살단에 의해 자행된 모든 살인, 고문, 납치, 실종 사건들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그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대중 앞에서 폭로했다. 그의 강론은 억압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를 담은 '인권 보고서'였고, 거짓된 평화를 외치는 정권을 향한 예언자적 고발이었다. 수십만 명의 엘살바도르 국민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고, 그는 '소리 없는 이들의 소리(Voice for the Voiceless)'가 되었다.

"살인하지 말라!" - 마지막 설교
그의 이러한 담대한 행동은 당연히 군부 정권과 기득권층의 극심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살해 협박에 시달렸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1980년 3월 23일 주일,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될 주일 강론에서, 군인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호소했다.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우리와 같은 국민입니다. 당신들은 당신 자신의 형제 농민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어떤 군인도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어떤 명령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고통받는 우리 민중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명령합니다, 제발 억압을 멈추십시오!"

이 설교는 사실상의 사형 선고였다. 바로 다음 날, 그는 제단 위에서 기도하는 중에 암살자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본론 3: 순교의 피, 해방의 씨앗이 되다
로메로의 죽음은 엘살바도르 국민들에게 깊은 슬픔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의 장례 미사에는 25만 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했지만, 군대는 이 비무장 추모객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사건은 이후 12년간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엘살바도르 내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해방의 아이콘, 교회의 성인
비록 그의 죽음이 즉각적인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의 유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력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삶과 죽음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이 복음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고, 전 세계의 해방신학 운동과 사회 정의 운동에 지대한 영감을 주었다.

그는 교회의 양심을 일깨웠다. 그의 순교는 가톨릭 교회가 사회적 불의의 문제에 더 깊이 관여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오랜 논쟁 끝에,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침내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며, 그의 삶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생전에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을 향해 "나는 순교자로서 나의 피가 엘살바도르의 해방을 위한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교는 죽을지라도,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용서와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다.

결론: 제단 위에 바쳐진 선한 목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걸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받는 양 떼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지 못했고, 기꺼이 늑대들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 선한 목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불의한 권력의 총탄에 의해 멎는 듯했지만, 그의 순교의 피는 침묵 속에서 더 크게 외치며 전 세계의 양심을 일깨웠다.

그의 삶은, 진정한 신앙이란 제단 위에서의 거룩한 예식뿐만 아니라, 거리의 불의와 고통 속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성찬 예식을 거행하던 바로 그 순간, 실제로 자신의 몸을 민중을 위한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신의 삶과 죽음을 가장 완벽한 예배로 완성했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리 없는 이들의 소리'가 되어주기를 두려워하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과 도전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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