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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더프 (Alexander Duff)
인도에서 서양식 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교육 선교'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인도의 교육을 바꾼 선교사, 알렉산더 더프: 영어 교육으로 서구 문명의 씨앗을 심다
서론: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은 책들, 새로운 전략의 시작
1830년, 스코틀랜드 국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인도 선교사 알렉산더 더프를 태운 배가 인도 캘커타(현 콜카타)로 향하던 중 두 번이나 난파되었다. 두 번째 난파 때,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선교를 위해 준비해 온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가 그토록 아꼈던 800권의 책들이 기적적으로 해안가로 밀려왔다. 그는 파도에 젖은 책들을 말리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임을 깨달았다. 즉, 인도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기나 상품이 아닌, 서구의 지식과 기독교의 진리가 담긴 '책', 바로 '교육'을 통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더프는 19세기 인도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꾼 위대한 교육 선교사이다. 그는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거나 개별적으로 전도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 인도의 최상류층인 브라만 계급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영어와 서구 학문을 가르치는 '상향식(top-down)' 교육 선교 전략을 개척했다. 그의 목표는 서구의 지식으로 인도의 정신을 계몽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는 미래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방식은,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한다는 비판과, 직접적인 복음 전파를 소홀히 한다는 동료 선교사들의 비판에 동시에 직면해야 했던 논쟁적인 것이었다. 본 글은 이처럼 혁신적이고 논쟁적이었던 알렉산더 더프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교육 선교'라는 독특한 비전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캘커타에서 그가 세운 학교의 교육 방식과 그 파급 효과를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이 인도 사회의 근대화와 기독교 선교에 남긴 빛과 그림자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스코틀랜드의 열정, 인도의 엘리트를 향하다
1806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더프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당대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토머스 챌머스(Thomas Chalmers)의 가르침을 받았다. 챌머스는 해외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더프는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서 스승의 비전을 이어받았다.
새로운 선교 전략의 구상
당시 인도는 윌리엄 캐리와 같은 선교사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에 대해 극도로 폐쇄적이었다. 특히 힌두교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던 브라만 계급은 복음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프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전략은 '복음 전파'를 직접적인 목표로 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우회적인 접근이었다. 그는 먼저 당시 인도 젊은이들이 출세와 부를 위해 간절히 원했던 '영어'와 '서구 학문(과학, 수학, 철학 등)'을 미끼로 제공하여, 최상류층 자제들을 기독교 학교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교육 과정의 정점에 성경을 배치하여, 학생들이 서구 문명의 근간에 기독교 정신이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는 사회의 상층부를 변화시켜 아래로 영향력이 흘러내려가게 하려는 '하향식 침투(downward filtration)' 전략이었다.
1830년, 그는 스코틀랜드 국교회 최초의 인도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 대담한 실험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캘커타로 향했다.
본론 2: 캘커타의 학교 - 교육 혁명과 논쟁
캘커타에 도착한 더프는 힌두교의 중심지에서, 저명한 힌두교 개혁가였던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학교를 시작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협력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서구식 교육
1830년 7월, 더프는 '총회 학당(General Assembly's Institution)'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열었다. 그의 교육 방식은 모든 면에서 혁명적이었다.
교육 언어: 그는 모든 수업을 산스크리트어나 페르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교육 내용: 그는 힌두 경전 대신, 서양의 문학, 역사, 과학,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모든 교육의 최종 목표이자 필수 과목은 성경이었다. 그는 성경이 단순한 종교 서적이 아니라, 모든 진리의 근원이자 도덕의 기초라고 가르쳤다.
교육 방법: 그는 암기 위주의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학생들과 자유롭게 토론하고 질문하며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는 서구식 교육법을 도입했다.
그의 학교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어를 배우고 서구 학문을 통해 출세하고자 했던 수백 명의 브라만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더프의 예상대로, 학생들은 서구의 이성적인 학문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힌두교의 신화적 세계관과 카스트 제도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했다.
개종과 사회적 파장
마침내 1832년, 더프의 학교에서 공부하던 몇몇 브라만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은 힌두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브라만 청년의 개종은 단순한 개인의 종교 변경이 아니라, 가문과 사회 전체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되었다. 학생들은 가족에게서 의절당하고, 독살 위협에 시달렸으며, 학교는 성난 군중의 공격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지만, 더프의 교육 선교는 그 강력한 파급 효과를 증명했다. 그의 학교는 이후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 대학(Free Church Institution)으로 이어지며, 훗날 캘커타 대학교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고, 인도 사회의 근대화를 이끈 수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본론 3: 빛과 그림자 - 더프의 유산
알렉산더 더프는 건강 악화로 인해 여러 차례 영국과 인도를 오가며 사역하다가, 1863년 최종적으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교육 선교' 모델은 인도 전역과 세계 선교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깊은 논쟁과 그림자를 남겼다.
인도 근대화의 촉매제
더프의 가장 큰 긍정적 유산은 그가 인도 근대화의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가 도입한 영어 중심의 서구식 교육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 통치 시스템에 편입되는 동시에, 근대 과학과 민주주의, 법치주의와 같은 서구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다. 그의 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인도의 사회 개혁과 민족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인도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문화적 제국주의라는 비판
그러나 그의 방법론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문화적 엘리트주의: 그의 '하향식' 전략은 인도의 상류층 문화만을 중시하고, 대다수 민중의 토착 문화와 언어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윌리엄 캐리가 벵골어와 같은 토착어를 중시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서구 중심주의: 그의 교육은 결과적으로 인도 젊은이들에게 "인도의 것은 열등하고 서양의 것은 우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인도의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적 첨병 역할을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간접 전도의 한계: 교육을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삼은 그의 방식은, 직접적이고 순수한 복음 선포를 소홀히 한다는 신학적 비판에 직면했다. 실제로 그의 학교를 통해 개종한 사람의 숫자는 전체 학생 수에 비해 극히 적었다.
결론: 논쟁적인 개척자, 시대를 연 교육가
알렉산더 더프는 19세기 선교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도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교육 선교'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굳게 닫혀 있던 인도 상류층의 마음을 열고 인도 사회의 근대화를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방법론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그를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보는 시각과, 인도의 계몽을 이끈 위대한 교육가로 보는 시각이 공존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던진 '교육'이라는 돌이 인도라는 거대한 호수에 일으킨 파문은, 좋든 나쁘든,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선교와 교육, 그리고 문화의 관계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복음은 특정 문화를 통해 전달되어야 하는가? 교육은 선교의 도구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목적인가? 알렉산더 더프의 삶과 고뇌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기 위해 오늘날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씨름해야 할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