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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아치볼드 글로버 (Archibald Glover)

'케임브리지 7인' 중 한 명으로,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 내지 선교회에서 사역하며 중국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케임브리지 7인'의 숨은 헌신, 아치볼드 글로버
서론: 영광의 길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1885년, 영국 사회는 일곱 명의 젊은 엘리트들의 결정에 큰 충격을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전도유망한 운동선수, 장교, 학자들이 자신들의 보장된 미래를 모두 버리고,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중국 내륙으로 선교사로 떠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7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헌신은, C. T. 스터드와 같은 스타 선수 덕분에 빅토리아 시대 선교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아치볼드 글로버는 바로 이 '케임브리지 7인'의 일원이었다. 비록 C. T. 스터드처럼 화려한 명성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는 조용하고 꾸준한 헌신으로 중국 내지 선교회(CIM)의 사역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의 삶은 유명세와 상관없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진 신실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 글은 '케임브리지 7인'의 숨은 헌신자, 아치볼드 글로버의 생애와 사역을 간략하게 조명하고자 한다.

본론: 격동의 중국에서 보낸 10년
1860년생인 아치볼드 글로버는 케임브리지 클레어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목사의 아들로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D. L. 무디의 집회 등을 통해 중국 선교에 대한 강렬한 부르심을 받고, 1885년 '케임브리지 7인'의 동료들과 함께 허드슨 테일러가 이끄는 중국내지선교회(CIM)에 합류하여 중국으로 향했다.

그가 사역했던 곳은 산시성(山西省) 등 중국의 내륙 지역이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식 복장을 하고 변발을 하며, 철저히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낯선 환경과 언어의 장벽, 그리고 서양인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싸워야 했다.

그의 아내 또한 CIM 소속의 선교사였으며, 부부는 함께 중국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중국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고, 결국 그는 약 10년간의 사역을 마친 뒤 1896년 영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결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영국으로 돌아온 후, 아치볼드 글로버의 후반기 생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C. T. 스터드처럼 또 다른 선교 단체를 창설하거나, 다른 동료들처럼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주님을 섬기다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가치는 결코 다른 유명한 동료들보다 작지 않다. 그의 삶은, 위대한 '케임브리지 7인'이라는 운동이 단지 몇몇 스타 플레이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배경과 성품을 가진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 함께 순종했던 '팀'의 이야기임을 상기시켜준다. 아치볼드 글로버의 헌신은, 세상의 명성과 상관없이 부르심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모든 '이름 없는 선교사'들의 위대함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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