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 200인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미얀마(버마)에서 오랜 핍박 속에서도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버마의 사도, 고난 속에 피어난 믿음의 거인
서론: 미국의 첫 번째 선교사, 고난의 길을 걷다
만약 윌리엄 캐리가 근대 선교의 문을 연 이론가이자 전략가였다면, 아도니람 저드슨은 그 문을 온몸으로 뚫고 나간 미국 최초의 행동가이자 순교자에 버금가는 고난의 증인이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가 붙지만, 그의 삶은 영광보다는 처절한 고통과 눈물, 그리고 상실의 연속이었다. 그는 낯선 땅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차례로 잃었고, 야만적인 감옥에 갇혀 2년 가까이 죽음의 문턱을 오갔으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하는 깊은 영적 침체를 겪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삶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고난의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결코 복음을 향한 소명을 놓지 않았던 한 인간의 위대한 인내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버마어 성경이라는 불멸의 업적을 완성했고, 그의 눈물 섞인 기도는 훗날 수십만 명의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버마 기독교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본 글은 미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도니람 저드슨의 숭고한 생애를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미국의 전도유망한 젊은 학자였던 그가 어떻게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되어 머나먼 동방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그 소명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버마에서의 끔찍한 투옥 생활과 개인적인 비극 속에서도 그가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성경 번역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완수했는지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고난 어린 사역이 미얀마와 세계 선교 역사에 어떤 깊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미국의 별, 동방을 향하다
19세기 초,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국가 미국은 서부 개척에 한창이었고, 해외 선교에 대한 개념은 거의 전무했다. 저드슨은 바로 이 미국의 내적 지평을 넘어 세계를 향한 문을 연 개척자였다.
앤도버의 별과 '건초더미 기도회'
아도니람 저드슨은 1788년, 매사추세츠의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수재였다. 브라운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때는 불가지론에 빠져 방황하기도 했으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깊은 회심을 체험하고 앤도버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뛰어난 지성과 유창한 언변으로 '앤도버의 별'이라 불리며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차세대 지도자였다.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은 사건은 1806년 윌리엄스 대학에서 시작된 학생 기도 운동이었다. 새뮤얼 밀스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이 야외에서 기도하던 중 갑작스러운 뇌우를 피해 건초더미 아래로 피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아시아의 영혼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고, 이것이 바로 미국 학생 선교 운동의 효시가 된 '건초더미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이다. 이 운동의 열기는 앤도버 신학교로 이어졌고, 저드슨은 이 기도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어 해외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품게 되었다.
1810년, 저드슨과 그의 동료들은 매사추세츠 회중교회 총회에 찾아가, 자신들을 이교도 땅에 선교사로 파송해달라는 역사적인 청원을 한다. 이들의 열정에 감동한 교단 지도자들은 마침내 1812년,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 단체인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ABCFM)'를 창설하고, 저드슨과 그의 동료 네 명을 최초의 선교사로 안수하여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바다 위의 신학 논쟁과 침례교로의 전환
1812년 2월, 저드슨은 결혼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아내 앤 해슬타인(Ann Hasseltine)과 함께 인도를 향한 배에 올랐다. 그는 인도의 윌리엄 캐리를 만나 협력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4개월간의 긴 항해 중에 그의 삶을 바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파송 교단인 회중교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했지만, 저드슨은 항해 중에 세례의 성경적 의미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약성경을 원어로 연구한 끝에, 세례는 신앙을 고백한 신자만이 받을 수 있는 침수례(immersion)의 형태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자신을 파송해준 교단의 신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인도에 도착한 저드슨 부부는 양심의 가책 끝에, 자신들을 파송해준 회중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침례교인이 되기로 결단한다. 이는 모든 재정적 지원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는 미국에 있는 침례교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고, 이 편지는 미국 침례교인들을 각성시켜 1814년 최초의 전국 단위 침례교 선교회(Triennial Convention)가 조직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본론 2: 버마의 어둠 속에서 - 투옥과 상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방해로 인도에 머물 수 없게 된 저드슨 부부는 마침내 1813년, 당시 서구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폐쇄적인 불교 왕국, 버마의 랑군(현재의 양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그의 전설적인 고난의 서사가 시작된다.
아바의 죽음의 감옥
초기 사역은 더디고 힘들었다.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차이, 그리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버마 왕정의 의심 속에서, 그는 6년 만인 1819년에야 첫 개종자인 마웅 나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조금씩 진전을 보이려던 찰나, 버마와 영국 사이에 제1차 영국-버마 전쟁(1824-1826)이 발발했다.
버마인들은 모든 백인들을 영국의 첩자로 의심했다. 1824년, 저드슨은 수도 아바(Ava)에서 갑자기 체포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죽음의 감옥'에 던져졌다. 그는 발목에 세 개의 족쇄가 채이고, 밤에는 대나무 장대에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리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17개월을 보내야 했다.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절망 속에서 그의 동료 감수들은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이 지옥 같은 시간 동안 그의 생명을 지탱해준 것은 아내 앤의 영웅적인 헌신이었다. 앤은 갓 태어난 딸 마리아를 품에 안고 매일 감옥을 찾아와 남편에게 음식을 넣어주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그의 석방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녀는 남편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버마어 신약성경 번역 원고를 흙으로 더럽힌 베개 속에 숨겨 감옥으로 몰래 반입하여 지켜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다
1825년 말, 저드슨은 버마와 영국 사이의 통역관으로 쓰이기 위해 기적적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감옥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더 큰 비극이었다. 오랜 감옥 생활과 마음고생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아내 앤이 그가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6개월 후, 그들의 어린 딸 마리아마저 엄마의 뒤를 따랐다. 저드슨은 짧은 시간 안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모두 잃는 참담한 고통을 겪었다.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한동안 정글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며 자신의 신앙과 씨름해야 했다.
본론 3: 고난의 열매, 불멸의 유산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저드슨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버마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경 번역이라는 미완의 사명이었다.
버마어 성경의 완성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은 슬픔 속에서, 저드슨은 성경 번역 작업에 더욱 몰두했다. 그는 아내 앤이 목숨처럼 지켜낸 신약성경 원고를 다듬고, 구약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단어 한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하며 버마인들의 마음에 가장 잘 와닿을 수 있는 번역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내 1834년, 버마에 도착한 지 21년 만에 그는 버마어 신구약 성경 전체의 번역을 완성했다. 그리고 1840년, 마침내 버마어 성경 완역본이 출판되었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헌신의 가장 위대한 결실이었다. 그가 번역한 성경은 오늘날까지도 약간의 수정을 거쳐 미얀마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표준 성경으로 남아 있다. 그는 버마 민족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물한 것이다. 그는 또한 최초의 버마어-영어 사전을 편찬하여, 후대의 선교사들과 학자들이 버마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카렌족의 부흥과 꺼지지 않는 불씨
저드슨의 사역은 버마족에게는 비교적 더딘 성과를 보였지만, 뜻밖의 곳에서 놀라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버마의 소수 민족이었던 카렌족(Karen people) 사이에서였다. 카렌족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예언이 있었는데, 그것은 먼 옛날 잃어버렸던 '황금 책'을 가진 하얀 형제가 바다를 건너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줄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저드슨의 제자였던 조지 보드맨 선교사와 카렌족 출신의 첫 개종자였던 코 타뷰(Ko Tha Byu)가 카렌족 마을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카렌족이 자신들을 예언 속의 '하얀 형제'로 여기며 놀라울 정도로 복음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을 목격했다. 저드슨의 생애 말년에 시작된 이 카렌족의 부흥은, 그가 죽은 후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미얀마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침례교 국가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저드슨이 버마족이라는 단단한 땅에 눈물로 심었던 씨앗이, 준비된 땅이었던 카렌족에게서 수백 배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결론: 고난의 별, 영원의 하늘에 빛나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1850년, 세 번째 아내 에밀리와 함께 건강 회복을 위해 떠난 바닷길에서 6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어 벵골만에 수장되었다. 그의 마지막은 묘비 하나 없이 망망대해에 잠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미국과 미얀마, 그리고 전 세계 기독교인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졌다.
그의 삶은 고난의 의미에 대한 가장 깊은 신학적 성찰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큰 고통을 자신에게 허락하셨는지 평생에 걸쳐 질문했지만, 결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삶은 "복음의 전진은 위대하고 효과적인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대적자들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단순한 '미국 최초의 선교사'가 아니다. 그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도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충성스러운 종이었고, 한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물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잉크 삼아 성경을 번역한 위대한 학자였으며, 그의 고난 자체가 버마 교회의 주춧돌이 된 살아있는 순교자였다. 그가 버마의 어둠 속에서 흘린 눈물과 땀은, 오늘날 미얀마 땅에서 울려 퍼지는 수많은 찬송 소리가 되어 영원의 하늘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