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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Bartolomé de las Casas)

16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회 사제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식민주의자들의 착취를 고발하고 원주민의 인권을 옹호했습니다.

신대륙의 양심,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인디언의 눈물을 닦아준 사제
서론: 정복자의 편에서, 원주민의 수호자로
16세기 초, 스페인의 탐험가들이 '신대륙' 아메리카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들의 뒤에는 십자가를 든 사제들이 따랐다. 대부분의 사제들은 정복자들의 잔혹한 약탈과 학살을 '이교도를 향한 신의 심판'으로 정당화하거나 침묵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정복자의 칼이 아닌 원주민의 눈물을 먼저 보았던 한 사제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도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농장주였지만, 어느 날 복음의 빛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남은 평생을 원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인디언의 사도'로 살았다. 그의 이름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이다.

그는 선교사가 아니라 '예언자'였다. 그는 스페인 국왕과 교황청을 향해, 신대륙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죄악을 고발하고 식민지 정책의 근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당시 유럽인들이 '영혼 없는 짐승'처럼 여겼던 원주민들도 동등한 이성과 영혼을 가진 인간이며, 강제적인 정복이 아닌 평화적인 설득을 통해서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삶은 자신의 동족과 제국의 죄악에 맞서 싸웠던, 고독하고 치열한 투쟁의 역사였다. 그의 급진적인 주장은 수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의 이상적인 선교 실험은 종종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꺾이지 않는 목소리는 훗날 국제법과 인권 사상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본 글은 이처럼 '신대륙의 양심'이라 불렸던 라스 카사스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부유한 농장주에서 원주민의 수호자로 거듭났는지 그의 극적인 회심을 살펴보고, '엔코미엔다' 제도의 잔혹성에 맞선 그의 투쟁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정의와 인권, 그리고 선교의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엔코미엔다 농장주, 회개의 눈물을 흘리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1484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상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콜럼버스의 2차 항해에 참여했으며, 그 역시 1502년 '신대륙' 히스파니올라 섬(오늘날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건너가 부와 성공을 꿈꾸던 평범한 식민지 개척자 중 한 명이었다.

엔코미엔다 제도의 수혜자
그는 당시 스페인 식민지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엔코미엔다(Encomienda)' 제도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엔코미엔다는 명목상으로는 스페인 정착민이 일정 지역의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기독교로 개신교화하는 책임을 지는 대신, 그들로부터 노동력을 제공받는 위탁 제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주민들을 사실상의 노예로 만들어 금광과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는 잔인한 착취 시스템이었다.

라스 카사스 역시 엔코미엔다를 통해 원주민들을 소유한 농장주가 되었고, 1512년에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사제 중 한 명으로 서품받았다. 그러나 사제가 된 후에도 그는 한동안 농장주로서의 삶을 당연하게 여기며,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구조적인 죄악에 대해 무감각했다.

한 설교, 그리고 양심의 가책
그의 삶을 바꾼 것은 1511년, 도미니코회 선교사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의 불같은 설교였다. 몬테시노스는 엔코미엔다 농장주들이 가득 찬 성당에서 "여러분은 모두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학대한 죄로 인해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권리로 이 평화로운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습니까? 이들은 이성이 없는 존재입니까? 이들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지 않았습니까?"라고 외쳤다.

이 설교는 식민지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라스 카사스의 양심에도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완전한 회심은 몇 년이 더 걸렸다. 1514년, 쿠바에서 사목하던 그는 성령강림대축일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구약성경 집회서 34장 "가난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아들의 목전에서 그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구절을 읽다가 마침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자신이 원주민들의 피와 땀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위선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엔코미엔다와 노예를 포기하고, 남은 평생을 원주민들의 해방을 위해 바치기로 서원했다.

본론 2: 인디언의 사도, 정의를 위한 투쟁
회심 이후,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가장 열정적이고 끈질긴 투사가 되었다. 그의 무기는 칼이 아닌 펜과 혀였다.

『인디아스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
그는 수십 차례 대서양을 횡단하며 스페인 왕궁과 교황청을 찾아가, 엔코미엔다 제도의 비인간성과 정복자들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가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증언들이었다.

1542년, 그는 자신의 40년간의 경험을 집대성한 책, **『인디아스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A Short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를 저술하여 당시 스페인의 왕세자였던 펠리페 2세에게 헌정했다. 이 책에서 그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학살과 고문, 강간, 그리고 온갖 잔혹 행위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그는 스페인인들이 도착한 후 수십 년 만에 카리브해의 원주민 인구가 수백만 명에서 수천 명으로 급감한 '인구학적 재앙'의 실상을 폭로했다.

이 책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스페인의 적국들에 의해 '검은 전설(Black Legend)'을 퍼뜨리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조국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양심을 일깨워 식민지 정책의 근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바야돌리드 논쟁: "원주민도 인간인가?"
라스 카사스의 노력은 마침내 1550년, 스페인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역사적인 논쟁을 이끌어냈다. 카를 5세 황제는 신대륙에서의 모든 정복 활동을 잠정 중단시키고, 원주민에 대한 전쟁이 과연 정당한지를 신학자와 법률가들이 토론하게 했다.

이 논쟁에서 라스 카사스의 주된 상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노예설'을 신봉하던 학자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Juan Ginés de Sepúlveda)였다. 세풀베다는 원주민들이 이성 없는 야만인이므로, 우월한 문명을 가진 스페인인들이 그들을 무력으로 정복하여 '문명화'시키는 것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들 역시 복잡한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이성을 가진 동등한 인간임을 역설했다. 그는 "모든 인류는 하나다"라고 선언하며, 복음은 칼이 아닌 평화적인 설득과 선한 모범을 통해서만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뚜렷한 승자 없이 끝났지만,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할 권리가 있는지를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토론했다는 점에서 인권 사상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본론 3: 평화적 선교 실험과 복합적인 유산
라스 카사스는 비판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직접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1520년 베네수엘라의 쿠마나(Cumaná)에서, 군인들의 도움 없이 오직 선교사들과 평화로운 원주민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이상적인 식민지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이웃한 스페인인들의 방해와 노예 사냥으로 인해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다.

그의 유산에는 또한 심각한 오점도 존재한다. 초기에 그는 원주민들의 강제 노동을 대체하기 위해, 더 강인하다고 여겨졌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수입하는 것을 한때 용인했다. 비록 그는 훗날 이 생각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과오를 깊이 후회했지만, 그의 초기 주장이 대서양 흑인 노예 무역을 정당화하는 데 일부 이용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론: 시대를 초월한 예언자의 목소리
1566년, 92세의 나이로 마드리드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외로운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살아생전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이상가처럼 보였다. 엔코미엔다 제도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태를 바꾸어 계속되었고, 원주민들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그의 즉각적인 성공 여부로 평가될 수 없다.

그는 '인권'이라는 개념의 새벽을 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인종이나 문화와 상관없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보편적 인권 사상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사상은 훗날 국제법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일깨웠다. 그는 교회가 권력의 편에 서서 불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시대의 죄악을 고발해야 한다는 예언자적 전통의 모델이 되었다. 그의 삶은 20세기 남미의 '해방 신학'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500년이라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당시에는 대부분 무시당했지만, 그의 외침은 역사의 강을 건너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의 삶은, 진정한 신앙이란 안락한 성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깊은 상처와 불의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십자가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영원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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