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 200인
메리 슬레서 (Mary Slessor)
나이지리아 칼라바르 지역에서 쌍둥이 살해 풍습을 막고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을 위해 싸운 '칼라바르의 여왕'입니다.

칼라바르의 백인 여왕, 메리 슬레서: 아프리카의 어둠을 밝힌 위대한 어머니
서론: 악의 숲에서 울려 퍼진 아기의 울음소리
19세기 말 서아프리카 칼라바르(Calabar)의 깊은 정글, 원주민들에게 '악의 숲'이라 불리는 곳에서 갓 태어난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생명의 환희를 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쌍둥이의 탄생을 불길한 저주로 여겼던 부족의 끔찍한 미신 아래, 아이들은 산 채로 항아리에 담겨 버려지거나 숲속 맹수의 밥이 되도록 내팽개쳐졌다. 때로는 아이를 낳은 어머니마저 함께 살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모두가 외면하던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한 스코틀랜드 여인이 횃불을 들고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 슬레서였다.
메리 슬레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 선교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유복한 가정 출신의 교양 있는 숙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던디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11살 때부터 방직 공장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노동자 계급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거친 삶이 그녀를 아프리카의 가장 험난한 오지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부족 전체의 존경을 받는 '백인 여왕'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녀는 설교자이자, 사회 개혁가였고, 재판관이었으며, 무엇보다 버려진 아이들의 위대한 어머니였다. 그녀의 선교는 단순히 교리를 전파하는 것을 넘어, 야만적인 관습에 정면으로 맞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거룩한 투쟁이었다. 본 글은 이처럼 비범하고 용감했던 여성 선교사 메리 슬레서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던디의 공장 소녀가 어떻게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녀가 칼라바르에서 쌍둥이 살해 풍습과 같은 어두운 관습에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헌신이 어떻게 한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고 오늘날까지 깊은 영감을 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던디의 공장 소녀, 아프리카를 꿈꾸다
메리 슬레서의 강인함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깊은 공감 능력은 그녀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난과 노동, 그리고 신앙
1848년,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태어나 던디의 빈민가에서 성장한 메리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가 힘겹게 가정을 꾸려나가야 했다. 메리는 11살 때부터 주트(jute) 방직 공장에 나가 하루 12시간씩 고된 노동을 하며 집안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녀의 영혼은 꺼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아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고, 일과가 끝나면 자신이 일하던 공장 주변의 빈민가 아이들을 위한 선교 활동에 헌신했다. 그녀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자신보다 더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었다.
리빙스턴의 유산, 아프리카를 향한 부르심
그녀의 마음을 더 넓은 세계, 특히 아프리카로 이끈 것은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이야기였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영국 전역은 그의 희생적인 삶에 대한 추모 열기로 가득 찼다. 메리는 리빙스턴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자신도 그처럼 아프리카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강렬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1876년, 28세의 나이로 그녀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아, 당시 '백인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위험하고 미지의 땅이었던 나이지리아 칼라바르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연약해 보이는 독신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프리카를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본론 2: 쌍둥이의 수호자, 어둠의 풍습에 맞서다
칼라바르에 도착한 메리 슬레서는 곧 현지 사회를 지배하는 끔찍한 미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잔인한 것이 바로 쌍둥이 살해 풍습이었다.
'악의 숲'에 버려진 생명들
당시 칼라바르 내륙의 에픽(Efik)족과 오코용(Okoyong)족 사회에서는 쌍둥이의 탄생을 끔찍한 저주로 여겼다. 그들은 인간은 한 번에 한 명의 아이만 낳을 수 있으며,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난 것은 어머니가 악령과 간통했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따라서 쌍둥이 중 한 명, 혹은 두 명 모두를 악의 화신으로 간주하여 산 채로 숲에 버려 죽게 했다. 때로는 어머니까지 함께 살해되거나 공동체에서 추방당했다.
두려움 없는 어머니의 사랑
메리 슬레서는 이 야만적인 관습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한밤중이라도 횃불을 들고 '악의 숲'으로 달려가 버려진 아기들을 찾아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집을 버려진 쌍둥이들을 위한 피난처로 만들었고, 수십 명, 수백 명의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입양하여 길렀다. 그녀의 작은 집은 언제나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위대한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구조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부족의 추장들과 장로들을 두려움 없이 찾아가, 쌍둥이 살해가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잔인한 일인지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녀는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날카로운 논리로, 때로는 불같은 분노로 그들의 미신에 도전했다. 한번은 쌍둥이를 낳은 어머니를 죽이려는 부족민들 앞에서, "이 여자를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라!"고 외치며 온몸으로 막아선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녀는 또한 '독약 재판(trial by ordeal)'이라 불리는 야만적인 관습에도 맞서 싸웠다. 이는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독이 든 콩을 먹여, 죽으면 유죄, 살아남으면 무죄라고 판단하는 비합리적인 재판이었다. 메리는 재판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독약을 빼앗거나, 피고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는 등 과감한 행동으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구했다.
본론 3: '에페 음보카라' - 백인 여왕의 지혜와 사랑
메리 슬레서의 영향력은 그녀의 비범한 용기와 헌신을 통해 점점 커져갔다. 그녀는 단순한 선교사를 넘어, 지역 사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지도자가 되었다.
더 깊은 오지로
대부분의 유럽 선교사들이 비교적 안전한 해안가 선교부에 머물렀지만, 메리 슬레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복음이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더 깊은 내륙, 특히 식인 풍습이 남아있다고 알려진 호전적인 오코용족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88년 입양한 아이들과 함께 오코용족 마을로 들어가, 그들과 똑같이 진흙으로 지은 집에 살고,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생활했다.
맨발로 정글을 누비고, 현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그녀의 모습에 원주민들은 점차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집은 병원이자, 학교였고, 재판소였다.
칼라바르의 백인 여왕
그녀의 지혜와 공정함에 대한 명성이 퍼져나가면서, 부족들은 자신들의 분쟁을 해결해달라며 그녀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족 간의 전쟁을 중재하고, 도난 사건을 판결하며, 가정 문제를 상담해주는 실질적인 재판관이자 통치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권위는 총이나 칼이 아닌, 오직 그녀의 인격과 사랑에서 나왔다.
그녀의 독보적인 영향력을 인정한 영국 식민 정부는 이례적으로 그녀를 '부영사(Vice-Consul)'로 임명하여 공식적인 사법권을 부여했다. 그녀는 '칼라바르의 백인 여왕'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그녀 자신은 언제나 자신을 '모든 사람의 어머니'로 여겼다. 현지인들은 그녀를 존경과 사랑을 담아 '에페 음보카라(Eka Kpukpru Owo)', 즉 '모든 사람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결론: 가장 위대한 설교, 어머니의 사랑
1915년, 메리 슬레서는 40년에 가까운 아프리카 사역을 마치고 66세의 나이로 자신이 사랑했던 칼라바르 땅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그녀가 구한 수많은 쌍둥이 자녀들을 비롯하여, 수천 명의 원주민들이 모여 진심으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메리 슬레서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상과 선교사상의 모든 고정관념을 깨뜨린 인물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선교 현장에서, 독신 여성으로서, 그리고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서, 그 어떤 남성 선교사보다도 더 위대하고 지속적인 족적을 남겼다. 그녀의 선교는 강단 위에서 외치는 설교가 아니라, 삶의 가장 어둡고 비참한 현장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보여주는 '실천하는 사랑'이었다.
그녀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녀가 세운 교회나 학교의 숫자가 아니라, 그녀의 품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수백 명의 아이들이다. 그녀는 쌍둥이의 탄생이 저주가 아닌 축복임을 온몸으로 증명했고, 모든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칼라바르 땅에 깊이 새겨 넣었다. 오늘날 나이지리아 지폐에 그녀의 초상이 새겨지고, 스코틀랜드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녀의 삶이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사랑의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메리 슬레서의 삶은, 가장 위대한 설교는 바로 '어머니의 마음'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