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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말콤 펜윅 (Malcolm Fenwick)

한국 침례교의 창시자로, 원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한국 침례교의 개척자, 말콤 펜윅: 순수한 신약교회를 꿈꾼 고독한 이상가
서론: 교파의 울타리를 넘은 독립 선교사
19세기 말,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교단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한국 땅을 밟을 때, 아무런 조직의 지원 없이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혈혈단신 한국을 찾아온 한 캐나다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말콤 펜윅. 그는 훗날 '한국 침례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지만, 그의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류 선교계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고독하고 험난한 길이었다.

그는 어떤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 선교사로 시작했으며, 오직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한국 땅에 재현하겠다는 이상을 품었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서당' 방식을 차용하여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했고, 모든 교회가 선교사의 재정 지원 없이 자립해야 한다는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고수했다.

그러나 신약교회의 순수성을 향한 그의 열정은 때로는 독선과 배타성으로 비쳤고, 그의 독특한 신학과 선교 방식은 다른 선교사들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을 낳았다. 그는 위대한 개척자였지만, 동시에 비판과 오해의 중심에 섰던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본 글은 이처럼 한국 침례교의 뿌리가 된 말콤 펜윅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독립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신약교회'를 향한 그의 이상과 독특한 선교 전략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이 남긴 빛과 그림자, 그리고 오늘날 한국 침례교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맨손으로 시작한 헌신, 원산에서의 첫걸음
말콤 펜윅은 1867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D. L. 무디의 부흥 집회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해외 선교에 대한 열망을 품었지만,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토론토 대학 YMCA의 지원을 받아 1889년 독립 선교사로서 한국에 도착했다.

자비량 순회 전도
아무런 조직적 기반이 없었던 그는, 처음에는 행상(行商)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자비량 선교사'로 사역했다. 그는 갓과 도포를 입고 한국인처럼 생활하며,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등 북한 지역 곳곳을 누볐다.

1894년, 그는 함경남도 원산(元山)에 정착하여 자신의 선교 기지를 마련했다. 원산은 당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중심지였지만, 펜윅은 그들과 협력하면서도 자신만의 독립적인 사역 노선을 걸었다. 그는 이 시기에 침례(浸禮)가 성경적인 세례 방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장로교 선교사들과 결별하여 독자적인 침례교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본론 2: '신약교회'를 향한 꿈과 독특한 선교 방식
펜윅의 모든 사역을 관통하는 핵심 비전은, 인간적인 전통이나 교파적인 제도가 아닌, 오직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한국 땅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대한기독교회: 자립, 자치, 자전의 실험
1906년, 그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중심으로 '대한기독교회'라는 이름의 독립적인 교단을 창설했다. 이 교단의 운영 원칙은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철저한 자립: 그는 외부 선교 자금에 의존하는 것을 교회의 영적 타락으로 간주했다. 그는 선교사로부터 어떤 재정 지원도 받지 않고, 모든 교회는 한국인 신자들 자신의 헌금으로만 운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신도 중심의 리더십: 그는 서구식 신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목회자 중심의 구조를 비판했다. 대신, 각 교회의 신실한 평신도 지도자(영수, 領袖)를 중심으로 교회가 자치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서당식 성경 교육: 그는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성경 학원'을 설립했지만, 그 방식은 서구 신학교 모델이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서당 교육 방식이었다. 학생들은 스승인 펜윅과 함께 생활하며, 오직 성경만을 깊이 있게 암송하고 토론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의 이러한 원칙들은, 선교 자금을 통해 현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당시의 일반적인 선교 방식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의 '대한기독교회'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그의 이상을 담은 위대한 실험이었다.

본론 3: 고독한 이상가의 빛과 그림자
펜윅의 순수한 이상과 급진적인 원칙은 한국 침례교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동시에 그를 고립시키고 많은 갈등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분열과 갈등
그의 철저한 무(無)교파주의와 독립 노선은 다른 교파 선교사들과의 연합 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그는 성경 번역 사업에서 다른 선교사들과의 공동 번역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신약성경 번역을 고집하여 출판했다. 이는 선교계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독선적인 리더십 스타일은 그가 세운 교단 내에서도 갈등을 일으켰다. 그의 엄격한 자립 원칙과 독특한 신학(세대주의적 종말론 등)에 동의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교단을 떠나면서, '대한기독교회'는 여러 차례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하나 된 신약교회'의 이상이 현실 속에서 깨어지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했다.

한국 침례교의 뿌리가 되다
수많은 어려움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말콤 펜윅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남긴 족적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다. 비록 그의 '대한기독교회'는 흩어졌지만, 그 신앙의 유산은 해방 이후 새롭게 창설된 '기독교 한국 침례회'로 이어져, 오늘날 한국의 주요 교단 중 하나로 성장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가 강조했던 '평신도 중심의 자립 교회' 정신은, 오늘날 한국 침례교회가 가진 '개교회주의'와 역동성의 중요한 영적 자산이 되었다. 그는 1935년 한국을 떠나, 1949년 캐나다에서 눈을 감았다.

결론: 고독했지만 순수했던 개척자
말콤 펜윅은 한국 선교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복합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안락한 교단의 지원을 거부하고,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척했던 고독한 개척자였다. 그는 서구의 신학이나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이식하는 대신, 오직 성경 속에서 길을 찾고, 한국의 토양 위에서 가장 한국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위대한 이상가였다.

그의 타협을 모르는 순수성은 때로 배타성과 분열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홀로 걸으며, 외부의 도움 없이 자립하는 교회의 씨앗을 심고자 했던 그의 헌신과 열정은, 오늘날 물질주의와 안락함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에 깊은 성찰과 도전을 던진다.

비록 그의 이름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 침례교회의 모든 역사는 바로 이 고독했던 이상가, 말콤 펜윅의 어깨 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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