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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도요히코 가가와 (Toyohiko Kagawa)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기독교 사상가로, 빈민가에 들어가 노동자, 농민과 함께 살며 사회 개혁과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일본의 양심, 가가와 도요히코: 빈민가의 성자, 십자가를 사회에 심다
서론: 여섯 자 짜리 방, 빈민가로 들어간 성자
1909년 겨울, 일본 고베의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 전도유망한 청년이 돌연 짐을 꾸려 도시에서 가장 비참하고 위험한 빈민가 신카와(新川)로 들어갔다. 그가 거처로 삼은 곳은 빛도 들지 않는,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여섯 자(尺)짜리 오두막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깡패와 매춘부, 알코올 중독자, 그리고 전염병 환자들의 이웃이 되어 14년간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아파했다. 그의 이름은 가가와 도요히코, '일본의 성 프란체스코'라 불리며 20세기 일본의 양심을 대변했던 위대한 기독교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는 자선가가 아니었다. 그는 가난과 불의를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 자체를 변혁하고자 했던 혁명가였다. 그는 일본 최초의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고, 협동조합 운동을 일으켜 서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왔으며, 군국주의가 광기로 치닫던 시절에는 목숨을 걸고 전쟁에 반대했던 평화의 사도였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은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어둡고 아픈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급진적인 사랑의 실천임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그는 십자가의 희생을 개인 구원의 교리로만 이해하지 않고, 사회의 모든 모순과 죄악을 짊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원리로 살아냈다. 본 글은 이처럼 치열하게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던 가가와 도요히코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빈민가의 아들이 되기를 결단했는지 살펴보고, 노동 운동, 협동조합 운동, 그리고 평화 운동을 통해 그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삶이 오늘날 일본과 세계 교회에 던지는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사무라이의 후예, 빈민가의 아들이 되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급진적인 사랑은, 그 자신이 겪었던 불우한 어린 시절과 그 속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은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고독한 소년, 그리스도를 만나다
1888년 고베에서 태어난 가가와는 명망 있는 사무라이 가문의 후예였으나, 아버지가 장관급 고위 관료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처의 자식이 아닌 첩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아픔을 안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고 큰어머니의 집에서 구박받으며 고독한 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삶에 빛이 찾아온 것은,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며 기독교 신앙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었던 선교사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15세 때, 그는 자신을 버렸던 친척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결정으로 그는 가문에서 의절당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신카와 빈민가로의 '성육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를 준비하던 중, 그는 결핵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된다. 요양 중에 그는 고베의 신카와 빈민가의 참상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신카와는 당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범죄와 질병, 굶주림에 시달리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1909년 12월 24일, 성탄 전야에 그는 자신의 삶을 바꿀 위대한 결단을 내린다. "말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은 위선이다.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나도 저 가장 낮은 곳으로 들어가 그들의 일부가 되겠다." 그는 자신의 모든 책과 소지품을 팔아, 신카와 빈민가의 한 평짜리 오두막으로 이사했다.

그의 빈민가 생활은 문자 그대로 '성육신(Incarnation)'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은 방을 아픈 사람,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내어주었고, 자신의 옷과 음식을 starving 이웃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한 노인의 눈병을 치료해주다가 트라코마에 감염되어 평생 한쪽 시력을 거의 잃게 되었지만, 결코 빈민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다.

본론 2: 십자가의 사랑, 사회를 향한 실천
신카와에서의 14년간의 생활을 통해, 가가와는 개인적인 구제만으로는 결코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그는 가난을 만들어내는 불의한 사회 구조 자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사회 복음'에 눈을 뜨게 되었다.

노동자의 벗, 노동 운동의 선구자
가가와는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는 1918년 일본 최초의 노동조합 중 하나인 '우애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21년에는 고베의 조선소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업을 이끌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폭력적인 혁명을 거부하고, 비폭력 저항과 협상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기독교적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협동조합 운동: 사랑의 경제학
가가와의 사회 개혁 운동의 가장 위대한 결실은 '협동조합 운동'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과 이윤 추구가 아닌, 상호 부조와 나눔이라는 기독교적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 공동체를 꿈꿨다.

그는 일본 전역을 다니며 소비자 협동조합, 의료 협동조합, 신용 협동조합 등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그의 노력으로 세워진 협동조합들은 가난한 서민들이 고리대금업자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저렴한 가격에 생필품과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본론 3: 평화의 사도 - 군국주의에 맞선 양심
가가와 도요히코의 십자가 신앙은 일본이 군국주의의 광기로 치닫던 시대에, 그를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예언자이자 '평화의 사도'로 만들었다.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을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정면으로 비판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그는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직접 건너가 "일본의 죄를 대신하여 사죄한다"며 중국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용기 있는 행동을 보였다. 이는 일본 국내에서 그를 '매국노'로 비난하는 여론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그는 반전(反戰) 강연과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에서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평화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감옥에 있다"고 당당히 말했다. 진주만 공습 직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전쟁을 막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일본의 재건과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했으며,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이러한 헌신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그는 여러 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결론: 시대를 초월한 예언자적 목소리
1960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은 십자가의 사랑을 이 땅 위에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그는 신학자였고, 소설가였으며, 사회 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의 모든 정체성의 중심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이 있었다.

그의 유산은 다각적이다.

그는 일본 사회에 기독교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각인시켰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적인 위안을 넘어, 사회적 불의와 싸우고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함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는 일본 대중에게 기독교를 알린 위대한 전도자였다. 그의 자전적 소설 『사선을 넘어서(死線を越えて)』는 당시 수백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일본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사회적 복음의 세계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그의 협동조합 운동과 평화 운동은 전 세계 교회에 큰 영감을 주었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의 신앙은 안락한 교회 건물 안에만 갇혀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장 어둡고 아픈 곳, 신카와 빈민가와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는 십자가가 단지 예배당 벽에 걸린 장식품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짊어지고 사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삶의 원리임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의 이름은 오늘날 많이 잊혔지만, 그의 예언자적 목소리와 급진적인 사랑의 실천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안일한 신앙을 깨우는 영원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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