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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David Brainerd)

북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젊은 선교사로, 그의 경건한 삶과 일기는 후대 선교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짧은 생애, 영원한 영향력: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와 기도
서론: 죽어서 더 크게 말하는 삶
기독교 역사상,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선교사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 그는 29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고, 북미 대륙의 숲속에서 이름 없는 인디언들을 상대로 사역했으며, 눈에 띄는 거대한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출판된 그의 일기는 대서양을 건너 윌리엄 캐리, 헨리 마틴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200년의 세월을 넘어 짐 엘리엇의 순교적 결단을 이끌어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이다.

그의 이야기는 성공 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삶은 고독과 질병, 그리고 깊은 영적 우울감과의 처절한 사투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선교 전략가도, 조직가도, 웅변가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거룩한 열망과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고뇌를 가감 없이 기록했던 한 명의 진실한 순례자였다.

브레이너드의 진정한 유산은 그가 이룬 사역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사역의 과정 속에서 겪었던 모든 영적 씨름을 담아낸 그의 일기 그 자체이다. 이 일기를 편집하고 출판하여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1차 대각성 운동의 거장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 속에서 자신이 역설했던 '참된 신앙 감정'의 가장 순수한 결정체를 발견했다. 본 글은 이처럼 역설적인 삶을 살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은 예일 대학에서의 추방과 광야로의 부르심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의 일기 속에 담긴 고독한 영적 투쟁과 기도의 삶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짧은 생애가 어떻게 시대를 초월하여 수많은 위대한 영혼들을 일깨우는 '선교의 교과서'가 되었는지 그 놀라운 영향력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예일에서의 추방과 광야로의 부르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선교사로서의 삶은 그의 인생에 닥친 예기치 않은 좌절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한 문이 된 것이다.

깊은 경건과 영적 고뇌
1718년, 미국 코네티컷의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난 브레이너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고아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과 영원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으며, 종종 깊은 우울감(melancholy)에 시달렸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는 율법적인 노력과 자신의 전적인 타락 사이에서 몇 년간을 고통스럽게 방황했다.

21세 되던 해,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회심을 체험했다. 그는 당시 미국을 휩쓸고 있던 1차 대각성 운동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예일 대학에 입학했고, 부흥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뉴 라이트(New Light)'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좌절이 부른 소명
그러나 그의 불같은 열정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1742년, 그는 친구에게 사적인 대화로 "저 튜터(교수)는 이 의자보다도 은혜(grace)가 없다"고 말한 것이 학교 당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예일 대학은 대각성 운동의 '감정적인' 측면에 대해 비판적인 '올드 라이트(Old Light)'가 장악하고 있었고, 학교는 이를 심각한 불경죄로 간주하여 브레이너드를 퇴학시키는 가혹한 징계를 내렸다.

예일에서의 추방은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던 브레이너드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예일 졸업장이 없이는 안수받은 목사가 되는 길이 사실상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깊은 수치심과 좌절에 빠진 그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제도권 교회가 아닌,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낯선 땅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인디언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은 그의 가장 큰 좌절을 들어, 그를 가장 위대한 소명의 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본론 2: 고독한 사투와 기도의 일기
1743년, 브레이너드는 그의 첫 선교지인 매사추세츠 카우나믹(Kaunameek)의 인디언 마을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그가 2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약 4년간의 사역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고난과의 싸움이었다.

광야의 삶: 고독, 질병, 그리고 우울
브레이너드의 사역 환경은 처참했다. 그는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숲속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홀로 살았다. 그의 일기는 지독한 외로움과의 싸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지적인 대화를 나눌 친구도, 따뜻한 위로를 건넬 가족도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는 이들 가운데서 철저히 고립되었다.

육체적 고통은 그를 더욱 괴롭혔다. 그는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선교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던 결핵은 점점 심해져 갔다. 그의 일기에는 피를 토하고, 밤새 기침하며,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리는 고통스러운 기록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내면의 싸움이었다. 그는 평생 '검은 우울(black melancholy)'이라 불렀던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의 일기에는 영적 침체와 불신앙, 교만과 싸우는 처절한 자기 성찰,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통렬하게 고백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오, 나의 영혼은 너무나 메말랐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전혀 타오르지 않는다. 나는 땅의 벌레와 같아, 기어 다니며 먼지나 먹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솔직함이 그의 일기를 위대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경건함이나 성공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비참함과 연약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절박하게 구했다.

기도의 제단 위에 바쳐진 삶
이 모든 고난 속에서 브레이너드가 붙들었던 유일한 무기는 기도였다. 그의 일기는 사실상 하나의 긴 기도문과도 같다. 그는 종종 하루 종일 숲속에 들어가 기도에 매달렸다. 그의 기도의 중심 주제는 자신의 안위나 성공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타오르는 불꽃이 될 수만 있다면! 내 모든 친구, 나의 모든 소유, 이 세상의 모든 위로, 그리고 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리라."

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제물이 되기를 갈망했다. 그의 사역에 아무런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조차, 그는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의 제단을 쌓았다.

본론 3: 크로스윅성에서의 부흥과 마지막 불꽃
수년간의 고통스러운 씨 뿌림 끝에, 하나님은 마침내 브레이너드의 사역에 놀라운 열매를 허락하셨다.

기도의 응답, 크로스윅성 부흥
1745년, 브레이너드는 뉴저지의 크로스윅성(Crossweeksung)에 있는 델라웨어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의 설교를 통해 강력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수년간의 영적 가뭄 끝에 찾아온 기적적인 단비였다.

이 부흥은 단순한 감정적 흥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닫고 통곡했으며, 진정한 회개와 믿음의 결단으로 나아왔다. 술주정뱅이들이 술을 끊고, 분열되었던 가정들이 회복되었으며,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 신앙 공동체가 탄생했다. 브레이너드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임을 그의 일기에 분명히 기록했다. 이 크로스윅성의 부흥은 그의 고난에 찬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자 위로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집에서 맞이한 죽음
그러나 이 부흥은 그의 마지막 남은 생명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켰다. 그의 결핵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그는 더 이상 사역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노샘프턴 자택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에드워즈의 가족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마지막 몇 달을 보냈다. 그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천상의 기쁨과 평안을 누렸으며, 그의 마지막 모습은 에드워즈와 그의 가족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적 도전을 주었다. 1747년 10월 9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2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젊은 선교사의 삶과 일기에 너무나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의 일기를 직접 편집하고 자신의 해설을 덧붙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The 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이야말로, 자신이 『신앙 감정론』에서 그토록 설명하고자 했던 '참된 거룩한 감정'의 완벽한 실체라고 보았다.

결론: 죽어서 더 크게 말하는 삶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직접적인 선교 사역은 짧고 미미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그의 일기는 그 어떤 위대한 설교가나 선교 전략가보다도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의 일기는 윌리엄 캐리가 인도로 떠나는 결단을 굳히게 했고, 헨리 마틴이 케임브리지의 영광을 버리고 페르시아로 향하게 했으며, 짐 엘리엇이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다. 존 웨슬리는 모든 설교자들에게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의 삶은 이후 200년 동안 개신교 선교의 표준이자 모델이 되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삶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쳐준다. 인생의 가치는 그 길이와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와 방향에 있다는 것을. 우리의 가장 위대한 영향력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려진 우리의 진실한 고난과 기도를 통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하나님을 위한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를 갈망했고, 하나님은 그의 짧고 고통스러운 삶을 들어, 시대를 넘어 수많은 영혼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꺼지지 않는 횃불로 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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