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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아프리카 탐험가이자 선교사로, 미지의 아프리카 대륙을 탐험하며 노예 무역의 실상을 알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아프리카의 심장을 탐험한 선교사, 어둠의 대륙을 밝힌 인도주의의 횃불
서론: "리빙스턴 박사님이시군요?" - 전설의 시작
"리빙스턴 박사님이시군요?(Dr. Livingstone, I presume?)" 1871년, 아프리카 대륙의 깊숙한 탕가니카 호숫가 우지지(Ujiji) 마을에서,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가 몇 년간 소식이 끊겼던 한 남자를 찾아내며 건넨 이 말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사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한 문장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단순한 선교사를 넘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다 실종된 신화적인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조난당한 탐험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어둠의 대륙'이라 불렸던 아프리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불굴의 선교사였다. 그는 의사이자 과학자였고,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였으며, 무엇보다 '이 세상의 열린 상처(the open sore of the world)'라 불렀던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철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열정적인 인도주의자였다.

그의 삶은 스코틀랜드의 비천한 공장 소년이 어떻게 아프리카 대륙을 30년 넘게 종횡무진하며 서구 세계에 그 실체를 알리고, 그곳의 영혼들을 억압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장대한 여정이다. 그의 선교 방식은 '상업, 기독교, 문명(Commerce, Christianity, and Civilization)'이라는 '3C 정책'으로 요약되며, 이는 그의 유산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드리우는 복합적인 평가를 낳았다. 본 글은 이처럼 다층적인 인물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가난한 공장 소년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향한 꿈을 품게 되었는지 그의 소명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의 위대한 탐험과 그 이면에 담긴 선교 및 노예 무역 철폐 전략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헌신이 아프리카와 세계에 어떤 거대한 유산을 남겼는지 그 빛과 그림자를 함께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공장의 소년, 아프리카의 꿈을 꾸다
리빙스턴의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정신력은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방직 공장의 책상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13년,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Blantyre)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부터 면직 공장에 나가 하루 14시간씩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피서(piecer)'라 불렸던 그의 일은 방적기 밑으로 기어들어가 끊어진 실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그의 열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그날의 첫 임금으로 라틴어 문법 책을 샀고, 굉음이 울리는 방적기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일하는 틈틈이 라틴어를 공부했다. 일과가 끝난 후에는 야학에 다니며 지식을 쌓았다.

독실한 회중교회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신앙 안에서 성장한 그는, 청년 시절 의료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자신의 꿈을 준비해나갔다. 이 어린 시절의 고난은 그에게 평생의 자산이 될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 그리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굳센 의지를 심어주었다.

"천 개 마을의 연기"
그의 인생 행로를 중국에서 아프리카로 바꾼 것은 한 선교사의 연설이었다. 당시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던, 아프리카 남부에서 활동하던 전설적인 선교사 로버트 모펫(Robert Moffat)의 강연을 듣게 된 것이다. 모펫은 자신의 선교지 북쪽의 광활한 미지의 땅을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동이 틀 때, 아직 단 한 명의 선교사도 방문한 적이 없는 천 개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리빙스턴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이미 선교사가 있는 중국이 아니라, 복음이 전혀 닿지 않은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있음을 깨달았다. 1841년, 그는 마침내 런던 선교회(LMS) 파송을 받아 아프리카 남단의 쿠루만(Kuruman)에 있는 모펫의 선교 본부에 도착했다. 훗날 그는 모펫의 딸인 메리(Mary)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다.

쿠루만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기존의 정착형 선교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선교사가 한곳에 머무르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을 찾아 직접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위대한 탐험가로서의 여정은 바로 이 선교적 신념에서 시작되었다.

본론 2: '상업, 기독교, 문명' - 탐험과 선교의 길
리빙스턴의 이름은 19세기 아프리카 탐험의 역사와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탐험은 지리학적 발견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아프리카를 구원하려는 거대한 선교 전략의 일부였다.

대륙 횡단과 빅토리아 폭포의 발견
리빙스턴은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하여 칼라하리 사막을 건너고 응가미 호수를 발견하는 등 서구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아프리카 내륙의 지도를 그려나갔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여정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이어진 아프리카 대륙 횡단이었다. 그는 소수의 아프리카인 동료들과 함께, 대서양 연안의 루안다(Luanda)에서 시작하여 내륙의 잠베지 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 인도양 연안의 켈리마네(Quelimane)에 도달하는 수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을 완수했다. 인류 역사상 유럽인이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횡단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이 여정 중에 그는 1855년, 잠베지 강 중류에서 원주민들이 '천둥 치는 연기(Mosi-oa-Tunya)'라고 부르는 경이로운 폭포를 발견했다. 그는 이 장엄한 광경에 압도되어 "천사들이 날아가며 분명 이토록 사랑스러운 광경을 보았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기리기 위해 '빅토리아 폭포(Victoria Falls)'라고 이름 붙였다.

'3C 정책'과 잠베지 원정
이 대륙 횡단 탐험을 통해 영국으로 돌아온 리빙스턴은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이 명성을 이용하여 아프리카를 위한 자신의 비전, 즉 '3C 정책'을 설파했다.

상업(Commerce): 그는 아프리카의 가장 큰 비극인 노예 무역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대체할 합법적이고 이로운 '상업'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프리카인들이 노예 대신 면화나 상아 같은 자신들의 산물을 팔 수 있는 무역로를 개척하면, 노예 무역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Christianity): 합법적인 상업과 함께 선교사들이 들어가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아프리카인들의 삶에 도덕적, 영적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명(Civilization): 이 두 가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서구의 의학과 기술, 교육 등 '문명'의 혜택이 아프리카에 전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 '3C'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1858년 영국 정부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 '잠베지 원정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원정은 재앙에 가까운 실패로 끝났다. 강을 항해하기 위해 가져간 증기선은 계속 고장을 일으켰고, 동료 유럽인들과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원정 도중 사랑하는 아내 메리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끔찍한 비극을 겪었다. 큰 상처와 실망을 안고 그는 1864년 영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본론 3: 나일강의 근원과 '세계의 열린 상처'
잠베지 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의 아프리카를 향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두 가지 목표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하나는 지리학적 목표인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궁극적인 목적인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실상을 폭로하고 근절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여정과 노예 무역의 참상
리빙스턴은 나일강의 발원지를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회복하고, 이를 통해 노예 무역 철폐라는 대의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는 1866년, 마지막 탐험을 위해 잔지바르를 통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 마지막 여정 동안 그는 아랍-스와힐리 상인들이 자행하는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끔찍한 실상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목격했다. 특히 1871년 니앙궤(Nyangwe) 마을에서 노예 상인들이 시장에 모인 수백 명의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그에게 깊은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일기에 "이 끔찍한 광경을 내 마음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주겠다"고 기록했다. 이 경험은 노예 무역을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는 그의 사명감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리빙스턴 박사님이시군요?"와 영웅의 죽음
수년간 외부 세계와의 연락이 끊긴 채 질병과 굶주림, 탈진에 시달리며 아프리카 내륙을 헤매던 리빙스턴은 사실상 실종 상태가 되었다.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뉴욕 헤럴드 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탐험가 헨리 스탠리가 그를 찾아 나섰고, 마침내 1871년 11월 10일 우지지에서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스탠리가 전한 외부 세계의 소식과 보급품은 리빙스턴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스탠리는 그에게 영국으로 돌아가 영웅으로서의 안락한 여생을 보낼 것을 간청했지만, 리빙스턴은 자신의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스탠리가 유럽으로 돌아가 리빙스턴의 생존 소식과 그가 기록한 노예 무역의 참상을 전하자, 전 세계는 들끓었다. 리빙스턴은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고, 노예 무역 철폐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스탠리가 떠난 후, 리빙스턴은 쇠약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탐험을 계속했다. 마침내 1873년 5월 1일, 그는 오늘날 잠비아의 치탐보 마을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충실한 아프리카인 동료였던 수시(Susi)와 추마(Chuma)는 그의 심장을 꺼내 아프리카 땅에 묻은 뒤,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1,500km가 넘는 험난한 길을 운구하여 해안가로 옮겼다. 아프리카를 너무나 사랑했던 그의 심장은 아프리카에 남겨졌고, 그의 유해는 영국으로 옮겨져 최고의 영예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결론: 복합적인 유산, 위대한 인도주의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유산은 단순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그는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은 의도치 않은 비극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그는 19세기 최고의 인도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생생한 보고서와 희생적인 삶은 유럽인들의 양심을 일깨워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탐험은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서구 세계의 지식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으며,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미개한 야만인이 아닌,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유산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한다. 그가 '상업, 기독교,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 개척한 길은, 역설적이게도 훗날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분할하는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의 경로가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를 구원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국주의의 길을 닦은 '자신도 모르는 제국주의의 선구자'가 되고 만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사로서 그가 직접 개종시킨 사람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그의 진정한 선교는 세례를 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그의 삶 자체에 있었다. 그는 의사로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의 몸을 치료했고, 탐험가로서 그들의 땅을 세상에 알렸으며, 예언자로서 그들을 묶고 있던 노예 제도의 사슬을 끊기 위해 외쳤다. 아프리카 땅에 묻힌 그의 심장은, 그가 얼마나 이 대륙과 그곳의 사람들을 깊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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