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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했습니다.

배재학당의 설립자, 한국 감리교의 아버지: 헨리 아펜젤러의 숭고한 삶
서론: 같은 날, 같은 꿈을 안고 도착한 두 거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조선의 제물포 항구에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두 명의 젊은 선교사가 함께 첫발을 내디뎠다. 한 명은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미국 북감리회의 첫 한국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였다. 같은 날, 같은 꿈을 안고 이 땅을 밟은 두 사람은 이후 한국 개신교 역사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위대한 동역자이자 선의의 경쟁자로서, 어둠의 땅에 복음과 근대의 빛을 밝히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만약 언더우드가 불같은 열정으로 전국을 누비며 교회를 개척한 '야전 사령관'이었다면, 아펜젤러는 학교와 교회를 세워 다음 세대를 길러낸 '견고한 건축가'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 중 하나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여 민족의 인재를 양성했고, 한국 감리교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워 복음의 뿌리를 내렸다.

그의 삶은 "오른손에는 복음을, 왼손에는 교육을"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총체적 선교의 모델이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은, 침몰하는 배에서 한 한국인 소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숭고한 희생으로 마감되었다. 본 글은 이처럼 한국 감리교의 아버지이자 근대 교육의 선구자였던 헨리 아펜젤러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를 미지의 땅 조선으로 이끈 소명의 과정을 살펴보고,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인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설립 사역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순교와도 같은 죽음이 한국인의 마음에 어떤 깊은 울림을 남겼으며, 그의 헌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캄캄한 밤, 그러나 동이 트려 합니다" - 조선을 향한 부르심
헨리 아펜젤러는 18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경건한 독일계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랭클린 앤 마셜 대학과 드루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뛰어난 학업 성적과 신실한 신앙을 겸비한 인재로 성장했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미국 감리교 선교본부는 일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미지의 땅, '은둔의 왕국' 조선에 첫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이 영광스럽지만 위험천만한 부르심에, 26세의 젊은 아펜젤러가 기꺼이 순종했다. 1885년 2월, 그는 갓 결혼한 아내 엘라(Ella)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 그날 밤, 아펜젤러는 자신의 일기에 역사적인 기도문을 남겼다.

"우리는 오늘 밤, 주님, 이 낯선 땅에 와서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오늘 캄캄한 어둠에 싸여 있는 이 백성에게, 주께서 부활하신 아침의 빛을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우리가 이 땅을 당신의 것으로서 차지하오니,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의 여파로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아내를 일본에 잠시 남겨두고 홀로 서울에 입성했다. 아직 공개적인 복음 전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는 언어를 배우고 한국의 정세를 살피며 조용히 사역을 준비했다.

본론 2: 오른손에는 학교, 왼손에는 교회 -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아펜젤러는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교육임을 일찍부터 간파했다. 그는 학교를 통해 복음의 문을 열고, 민족을 이끌어갈 미래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고자 했다.

배재학당: 인재를 기르는 집
1885년 8월, 아펜젤러는 자신의 집에서 두 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작은 학교를 시작했다. 학생이 점차 늘어나자 그는 1886년, 고종 황제에게 학교 설립을 정식으로 청원했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비전에 감명받은 고종은,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의미의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직접 하사했다. 이는 왕실이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로서, 아펜젤러의 사역에 강력한 보호막이자 추진력이 되어주었다.

배재학당은 단순히 성경만 가르치는 종교 학교가 아니었다. 아펜젤러는 영어, 수학, 과학, 지리 등 서구의 근대 학문을 적극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배재학당이 기독교 신앙과 근대적 이성을 겸비한 전인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이 되기를 꿈꿨다. 그의 비전은 정확히 실현되었다. 배재학당은 이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한국 근대화의 산실 역할을 했다. 특히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주시경 등, 배재학당 출신들은 독립협회와 한글 연구 등 민족 계몽과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는 교회를 넘어 민족 전체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된 것이다.

정동제일교회: 한국 감리교의 요람
교육 사역과 함께, 아펜젤러는 교회 설립에도 힘썼다. 1885년 10월, 그는 자신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고, 1887년에는 정식으로 예배당을 건축하여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벧엘 예배당', 즉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덕수궁 돌담길 옆에 위치한 이 교회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많은 지식인과 관리들이 복음을 접하는 통로가 되었고, 한국 감리교 운동의 모(母)교회로 성장했다. 1897년 완공된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 예배당 건물은 오늘날까지도 서울의 상징적인 근대 건축물로 남아,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성경번역위원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한국어 성경 번역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그리스도인회보'와 같은 기독교 신문을 창간하여 문서 선교의 길을 여는 등, 한국 교회의 기초를 놓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본론 3: 한국인을 사랑한 목자, 바다에 잠들다
아펜젤러의 삶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 땅에서, 한국인을 구하려다 맞이한 숭고한 죽음으로 마감되었다.

마지막 항해
1902년 6월,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탔다. 그가 탄 '구마가와마루'호에는 그의 한국인 조사(助事)였던 조한규와,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던 한 여학생이 동행하고 있었다.

그날 밤, 배가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처를 지날 때 짙은 안갯속에서 다른 기선 '기소가와마루'호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배는 순식간에 두 동강 나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갑판에 나와 있던 아펜젤러는 충분히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숭고한 희생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선실에 잠들어 있을 자신의 조사와 어린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아수라장이 된 어두운 선실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못했다. 1902년 6월 11일 밤, 44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자신이 구원하고자 했던 한국의 영혼들과 함께 차가운 황해의 바닷속에 잠들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는 요한복음 10장 11절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한 순교적 죽음이었다. 그의 희생은 한국인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과 슬픔을 남겼고, 그가 전한 복음의 진정성을 피로써 증명했다.

결론: 한국 근대 교육의 새벽을 열다
헨리 아펜젤러의 17년간의 한국 사역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깊고 영원하다. 그는 한국 감리교회의 아버지로서 수많은 교회의 초석을 놓았으며, 무엇보다 한국 근대 교육의 새벽을 연 위대한 선구자였다.

그와 언더우드는 교파는 달랐지만, 한반도의 복음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평생에 걸쳐 협력했던 아름다운 동역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언더우드가 순회 전도를 통해 복음의 영토를 넓혔다면, 아펜젤러는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라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그 영토를 지키고 다음 세대를 길러냈다.

아펜젤러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세운 배재학당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배재학당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암울했던 구한말,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준 계몽의 중심지이자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그의 교육을 통해, 복음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 민족 전체를 깨우고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캄캄한 밤에 도착하여 동이 트기를 기도했던 한 선교사의 삶은, 스스로가 한국의 근대를 여는 새벽 별이 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꺼지지 않는 빛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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