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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에게데 (Hans Egede)

'그린란드의 사도'로, 18세기 덴마크-노르웨이의 루터교 선교사로서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족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린란드의 사도, 한스 에게데: 얼음의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은 개척자
서론: 사라진 바이킹을 찾아서
18세기 초, 노르웨이의 한 젊은 루터교 목사의 마음은 수백 년 전의 낡은 역사 기록에 사로잡혔다. 그 기록은 바로 '붉은 머리 에리크(Erik the Red)'가 이끄는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를 떠나 서쪽의 거대한 얼음의 땅, '그린란드(Greenland)'에 정착했다는 이야기였다. 한때 번성했던 그들의 정착지는 15세기 이후 외부 세계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젊은 목사는 질문했다. "그곳에 남겨진 우리의 동족, 바이킹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있을까, 아니면 이교도의 어둠 속으로 돌아갔을까?"

이 질문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인물이 바로, '그린란드의 사도'라 불리는 한스 에게데이다. 그는 잊혀진 바이킹들을 다시 복음화하겠다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덴마크-노르웨이 국왕을 설득하여, 거의 10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그린란드로 향하는 험난한 뱃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것은 사라진 바이킹의 흔적이 아닌,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원주민 이누이트(Inuit)족이었다.

그의 삶은 목표했던 대상을 찾지 못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에 자신의 삶을 바친 위대한 헌신의 이야기이다. 본 글은 이처럼 '얼음의 땅' 그린란드의 문을 연 한스 에게데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를 그린란드로 이끈 독특한 소명의 과정을 살펴보고, 이누이트족 사이에서 그가 겪었던 고난과 선교 사역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헌신이 그린란드와 북극 선교 역사에 어떤 깊은 초석을 놓았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잊혀진 동족을 향한 13년간의 기도
한스 에게데는 1686년 노르웨이 북부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북극권에 가까운 로포텐(Lofoten) 제도의 목사로 부임했다.

바이킹의 후손들을 향한 부르심
그가 그린란드에 대한 소명을 품게 된 것은 오래된 노르웨이 연대기를 읽으면서부터였다. 그는 한때 가톨릭 주교구까지 있었던 그린란드의 기독교 공동체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잊혀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 남겨진 동족들이 신앙을 잃고 이교도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깊은 영적 부담감을 느꼈다.

1710년부터 그는 "사라진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덴마크-노르웨이의 프레데리크 4세 국왕에게 여러 차례 청원서를 보냈지만, 막대한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그의 계획은 계속해서 묵살되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상인들을 설득하여 '베르겐 그린란드 회사'를 설립하고, 선교와 무역을 결합한 탐험 계획을 추진했다. 마침내 10년이 넘는 끈질긴 노력 끝에, 그는 왕의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 1721년 아내 게르트루드(Gertrud)와 네 자녀, 그리고 40여 명의 정착민들과 함께 '희망(Haabet)'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그린란드로 향했다.

본론 2: 이누이트족의 친구가 되다 - 고난 속의 사역
그린란드에 도착한 에게데가 마주한 현실은 그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그가 찾던 바이킹 정착지는 수백 년 전 기후 변화와 원주민과의 갈등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였고, 그 땅의 주인은 혹독한 자연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던 이누이트족이었다.

절망 속에서 찾은 새로운 사명
처음 그는 깊은 실망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신 진짜 이유가, 사라진 바이킹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이누이트족을 위함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수정하여, 이누이트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사역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괴혈병과 같은 질병이 끊임없이 그와 정착민들을 위협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벽은 언어와 문화였다. 이누이트어는 배우기 극도로 어려웠고,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빵'이라는 단어조차 없는 그들에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주기도문을 설명하는 것은 난제였다.

그림을 통한 복음 전파
언어의 장벽 앞에서, 에게데는 창의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성경의 주요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려, 이누이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복음을 설명했다. 그는 또한 의사로서 그들의 병을 치료해주고, 사냥 기술을 가르쳐주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그들의 신뢰를 얻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누이트족의 샤먼(angakkoq)들과 여러 차례 영적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주술이 아닌 과학과 의술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미신에 얽매인 그들의 세계관에 도전했다.

천연두의 비극과 아내의 헌신
1733년, 덴마크에서 온 배 한 척이 그린란드에 치명적인 천연두를 옮겨왔다. 면역력이 없던 이누이트족에게 이 전염병은 재앙과도 같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에게데가 12년간 쌓아온 사역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바로 이 비극의 순간에, 에게데와 그의 아내 게르트루드의 진가가 드러났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어가는 이누이트 환자들을 밤낮으로 간호했다. 특히 아내 게르트루드의 헌신적인 사랑은 이누이트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많은 이누이트 사람들이 비로소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본론 3: 그린란드 선교의 초석을 놓다
천연두로 아내마저 잃고 자신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한스 에게데는, 1736년 1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아들 파울(Poul)에게 선교지를 맡긴 채 덴마크로 돌아왔다.

그가 살아서 직접 본 열매는 많지 않았다. 그가 세례를 준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가 떠날 때 그린란드의 기독교 공동체는 여전히 작고 연약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의 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그가 남긴 가시적인 결과물로 평가될 수 없다.

그는 그린란드 선교의 문을 연 위대한 개척자였다. 1000년 가까이 잊혀졌던 땅 그린란드와 유럽 사이의 다리를 다시 놓았고, 후대의 모든 선교사들이 걸어갈 길을 열었다.

그는 그린란드 연구의 아버지였다. 그는 이누이트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그린란드의 자연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가 저술한 『오래된 그린란드와 새로운 그린란드(The Old Greenland and the New Greenland)』는 이후 100년 넘게 그린란드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연구 자료가 되었다.

그는 자녀들을 통해 유산을 이어갔다. 그의 아들 파울 에게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대한 선교사이자 언어학자가 되었다. 그는 이누이트어를 완벽하게 습득하여 신약성경 전체와 교리문답, 찬송가를 이누이트어로 번역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아버지가 시작한 일을 아들이 완성한 것이다.

결론: 잊혀진 땅의 등불이 된 사람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한스 에게데는 그린란드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는 신학교를 세워, 죽는 날까지 그린란드를 위해 일하다 1758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그는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Nuuk) 언덕 위에 동상으로 서서,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그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스 에게데의 삶은 빗나간 목표로 시작하여, 더 위대한 사명을 발견한 역설의 이야기이다. 그는 사라진 바이킹을 찾아 나섰다가, 살아있는 이누이트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15년간의 끈질긴 헌신을 통해 얼어붙었던 땅에 복음의 첫 씨앗을 심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실패하고 길이 막히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진짜 사명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한스 에게데는 잊혀진 땅을 기억하고 그곳을 향해 나아갔던 사람이었고, 그 결과 그 자신이 그 땅의 잊혀지지 않는 등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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