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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Cyril and Methodius)

슬라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으며, 슬라브어 예배를 위해 글라골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성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Saints Cyril and Methodius): 슬라브족의 사도, 문자를 창조한 형제 선교사
서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들 자신의 언어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에는 '말씀(Logos)'이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닿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연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을까? 9세기, 유럽의 광활한 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슬라브 민족은 바로 이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라는 두 거대한 언어의 장벽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읽을 수 없었다.

이 거대한 침묵을 깨고 슬라브 민족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 된 복음을 선물한 이들이 바로 테살로니카 출신의 두 형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였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을 설교한 선교사를 넘어, 하나의 민족에게 글자를 만들어주고, 성경을 번역해주고, 그들의 언어로 예배할 권리를 위해 평생을 투쟁한 문명의 개척자였다. 그들의 사역은 한 민족을 개종시키는 것을 넘어, 슬라브 문화와 문학, 그리고 민족 정체성의 초석을 놓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서유럽의 보니파시오가 도끼를 들고 이교의 상징을 파괴했다면,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펜을 들고 무지(無知)의 장벽을 허물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군사적 정복이나 정치적 강요가 아닌, 문화적 존중과 언어적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 복음이 어떻게 한 민족의 심장부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모범이다. 본 글은 이들 '슬라브족의 사도'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당시 동유럽의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역사적 소명을 받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슬라브 문자의 창조와 성경 번역이라는 그들의 혁명적인 사역을 분석하고, '삼국어 이단'이라는 거센 반대에 맞서 싸운 그들의 신학적 투쟁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사역이 어떻게 동유럽 정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키릴 문자의 뿌리가 되었는지 그 거대한 유산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학자 형제와 시대적 배경
두 형제의 위대한 사역은 당시 유럽을 양분하던 두 거대 제국, 즉 동쪽의 비잔티움 제국과 서쪽의 프랑크 제국 사이의 치열한 세력 다툼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배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테살로니카의 두 아들: 준비된 사명
형 메토디오스(본명 미하일, 815년경 출생)와 동생 키릴로스(본명 콘스탄티노스, 826년경 출생)는 비잔티움 제국의 제2의 도시였던 테살로니카(Thessaloniki)에서 태어났다. 당시 테살로니카는 그리스인과 슬라브인이 함께 거주하는 다문화 도시였고, 두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슬라브어에 매우 능통했다. 이는 훗날 그들의 사역에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다.

두 형제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행정가적 기질이 뛰어났던 형 메토디오스는 제국의 고위 관리로 임명되어 슬라브인 지역의 총독을 지내다가, 세상의 영광을 뒤로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조용한 삶을 살았다. 반면, 동생 키릴로스는 당대 최고의 천재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립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언어학을 공부했으며 '철학자 콘스탄티노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모라비아의 요청과 비잔티움의 응답
9세기 중반, 오늘날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에 위치했던 대모라비아 왕국은 신생 슬라브 국가로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모라비아의 왕 라스티슬라프(Rastislav)는 동쪽의 불가리아와 서쪽의 동프랑크 왕국(게르만족) 사이에 끼어 정치적, 문화적 독립을 지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히 동프랑크에서 파견된 게르만 선교사들은 라틴어로만 예배를 집전하며 모라비아를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라스티슬라프 왕은 862년, 프랑크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는 군사적 원조가 아닌, "우리 백성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가르쳐 줄 주교와 스승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매우 현명한 외교적, 문화적 전략이었다.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는 이 요청의 중요성을 즉시 간파했다. 그들은 이 임무를 수행할 최고의 적임자로 이미 학문적, 외교적 명성이 높고 슬라브어에 능통했던 키릴로스를 선택했다. 키릴로스는 수도원에 있던 형 메토디오스에게 함께할 것을 요청했고, 두 형제는 슬라브 민족의 운명을 바꿀 역사적인 선교의 길에 오르게 된다.

본론 2: 문자의 창조와 복음의 번역
두 형제는 모라비아로 떠나기 전, 선교의 성공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바로 슬라브인들을 위한 고유한 문자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글라골 문자: 슬라브어를 위한 옷
키릴로스는 슬라브어의 복잡하고 독특한 음성 체계를 그리스어나 라틴 문자로는 완벽하게 표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어학적 천재성을 발휘하여, 슬라브어의 모든 소리를 하나하나 표기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알파벳을 창조했다. 이것이 바로 '글라골 문자(Glagolitic alphabet)'이다. 둥글고 복잡한 모양이 특징인 글라골 문자는 슬라브 민족이 역사상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들의 문자였다.

이 문자의 창조는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선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구어(口語)로만 존재하던 슬라브어에 영혼을 불어넣어 기록되고 보존될 수 있는 문어(文語)로 승격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키릴로스는 이 새로운 문자를 가지고 가장 먼저 요한복음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В начале было Слово)..."를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들의 언어로 드리는 예배
863년 모라비아에 도착한 두 형제는 즉시 그들이 만든 문자와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하고, 성경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교회의 핵심적인 예배 의식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처음으로 자신들의 어머니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하며 기도하게 된 슬라브인들의 감격은 엄청났다. 라틴어 미사가 사제들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의식이었던 것과 달리, 슬라브어 예배는 모든 백성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살아있는 예배였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외부에서 이식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과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토착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본론 3: 로마에서의 투쟁과 꺼지지 않는 불꽃
그러나 두 형제의 혁신적인 사역은 곧 게르만 성직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그들에게 슬라브어 예배는 자신들의 기득권과 영향력을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삼국어 이단'과의 논쟁
게르만 주교들은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를 이단으로 비난했다. 그들의 주된 논리는 당시 서방 교회 일부에 퍼져 있던 '삼국어 이단(Trilingual Heresy)' 사상이었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세 가지 언어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썼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오직 이 세 언어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신성한 언어라고 주장하는 편협한 사상이었다.

이러한 비난에 맞서 자신들의 사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두 형제는 867년 로마로 향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 무대가 비잔티움의 영향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 교회의 중심인 로마 교황의 승인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로마에서 그들은 교황 아드리아노 2세(Pope Adrian II)와 로마 성직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했다. 키릴로스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하는 기도"보다 "깨닫는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한 말씀을 인용하며, 모든 민족이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권리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의 탁월한 변증과 두 형제의 경건함에 감명받은 교황은 마침내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교황은 슬라브어 예배를 공식적으로 승인했으며, 두 형제가 번역한 슬라브어 예배서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놓고 축성했다. 이는 '삼국어 이단'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였다.

꺼지지 않는 불꽃, 키릴 문자의 탄생
로마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시련은 계속되었다. 869년, 평생의 과업으로 쇠약해진 동생 키릴로스는 로마의 한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이제 모든 책임은 홀로 남은 형 메토디오스의 어깨에 지워졌다. 교황에 의해 모라비아와 판노니아의 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다시 모라비아로 돌아가 사역을 계속했지만, 게르만 성직자들의 방해는 더욱 악랄해졌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2년 반 동안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메토디오스가 885년에 선종한 후, 그들의 제자들은 결국 모라비아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들의 사역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라비아에서 쫓겨난 제자들은 남쪽의 불가리아 제국으로 피신했고, 그곳의 보리스 1세 왕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슬라브어 예배와 문학의 중심지를 세우도록 지원했다.

바로 이 불가리아에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제자들(대표적으로 오흐리드의 성 클레멘트)은 스승이 만든 복잡한 글라골 문자를 바탕으로, 당시 널리 쓰이던 그리스 문자에 기초하여 훨씬 더 단순하고 쓰기 쉬운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 키릴로스를 기리기 위해 이 새로운 문자에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키릴 문자는 이후 불가리아를 넘어 세르비아, 키예프 루스(오늘날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부 슬라브 세계 전체로 퍼져나가, 동방 정교회와 슬라브 문화의 공식적인 문자가 되었다.

결론: 유럽의 두 폐, 동방의 빛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의 유산은 동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을 전한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에 문자를 선물하고 문학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이 되었다. 그들이 번역한 성경과 예배서는 이후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방 정교회 슬라브권의 표준이 되었고, 그들이 창조한 문자(의 정신을 이은 키릴 문자)는 오늘날에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의 삶은 선교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준다. 진정한 선교는 우월한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각 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성육신'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삼국어 이단'이라는 문화적 제국주의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언어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들려져야 한다는 보편성의 원리를 온몸으로 지켜냈다.

198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네딕토와 더불어 이 두 형제를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는 유럽이 서방의 라틴 전통과 동방의 그리스-슬라브 전통이라는 '두 개의 폐'로 함께 숨 쉴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바로 그 동방의 폐에 생명을 불어넣은 위대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슬라브 민족의 어둠을 밝힌 사도이자, 오늘날까지도 동유럽의 영혼을 형성하고 있는 꺼지지 않는 등불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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