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선교사 열전 200인

제이콥 드셰이저 (Jacob DeShazer)

2차 대전 당시 일본 본토 공습에 참여했던 미군이었으나, 전쟁 후 일본 선교사가 되어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진주만 공습의 복수자, 일본의 용서를 구한 선교사: 제이콥 드셰이저의 기적 같은 삶
서론: 폭탄을 떨어뜨린 곳에, 복음을 심다
1942년 4월, 일본 본토를 향해 B-25 폭격기 한 대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조종석 아래 폭탄 투하수 자리에 앉은 젊은 하사 제이콥 드셰이저의 마음은 진주만 공습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일본 땅에 폭탄을 떨어뜨려 응징하는 것을 영웅적인 임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8년 후 자신이 바로 그 폭탄을 떨어뜨렸던 땅, 일본에 다시 돌아와 "일본인들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겠다"고 눈물로 기도하는 선교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이콥 드셰이저의 삶은 20세기 기독교가 낳은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이다. 그는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적을 향한 증오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일본군 포로수용소의 어둠 속에서 깨달았다. 그는 그곳에서 한 권의 성경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를 만났고, 자신의 가장 큰 원수였던 일본인들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회심과 용서의 간증은, 진주만 공습을 지휘했던 일본군 전투기 조종사 미쓰오 후치다(Mitsuo Fuchida)를 회심시키는 기적의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적이었던 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것이다. 본 글은 이처럼 전쟁의 증오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온몸으로 증거한 제이콥 드셰이저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를 복수의 화신으로 만들었던 둘리틀 특공대 작전과 그의 포로 생활을 살펴보고, 성경 한 권이 어떻게 그의 삶을 바꾸었는지, 그리고 일본 선교사로서 그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사역을 추적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둘리틀 특공대원, 증오의 포로가 되다
제이콥 드셰이저는 1912년 오리건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젊은이였던 그의 삶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진주만을 향한 복수심
진주만 공습 소식에 미국 전역이 분노에 휩싸였고, 드셰이저 역시 불타는 적개심과 애국심으로 미 육군 항공대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1942년 4월, 진주만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본토의 심장부 도쿄를 폭격하는 극비 작전, '둘리틀 특공대(Doolittle Raid)'의 B-25 폭격기 '성난 벌(Bat Out of Hell)' 호의 폭탄 투하수로 선발되었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하여 일본을 폭격하고 중국으로 탈출한다는, 거의 자살에 가까운 임무였다.

그는 성공적으로 나고야에 폭탄을 투하했지만, 연료 부족으로 중국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적진 한복판에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그는 곧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끔찍한 포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40개월의 지옥, 그리고 한 권의 성경
드셰이저가 겪은 40개월(3년 4개월)의 포로 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는 굶주림과 고문, 질병, 그리고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일본인들을 향한 증오심만이 들끓었다.

그의 삶에 변화의 빛이 찾아온 것은 1944년, 포로 생활 25개월째 되던 때였다. 그는 간수에게 책을 한 권 구해달라고 간청했고, 3주 후에야 간신히 성경 한 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성경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는 3주 동안 허겁지겁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일본인들과, 바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사이에서 깊은 갈등을 겪었다. 마침내 그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깨닫고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일본인들을 향한 증오심을 내려놓고 그들을 용서하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이 끝나면 일본으로 돌아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놀라운 서원을 했다.

본론 2: 용서의 사도, 일본으로 돌아오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고 기적적으로 석방된 드셰이저는 영웅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새로운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의 포로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시애틀 퍼시픽 대학에 입학하여 목회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48년, 그는 아내 플로렌스와 어린 아들과 함께, 자신이 불과 몇 년 전 폭탄을 떨어뜨렸던 땅, 일본에 선교사로 도착했다.

그는 일본 전역을 다니며 집회를 인도했다. 그의 간증은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간증 전단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일본의 포로였다(I Was a Prisoner of Japan)." 자신들을 증오해야 마땅할 미군 폭격기 승무원이, 이제는 자신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사실 앞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의 삶 자체가, 그가 전하는 용서의 복음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는 자신이 폭격했던 바로 그 도시 나고야에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일본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진주만 공습의 지휘관을 변화시키다
드셰이저의 용서의 이야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기적은, 진주만 공습 당시 공습 편대의 총지휘관이었던 미쓰오 후치다(Mitsuo Fuchida)의 회심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공허함에 시달리던 후치다는, 우연히 드셰이저의 간증이 담긴 전도지를 읽게 되었다. 그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은 드셰이저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0년, 후치다 역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진주만 공습의 두 원수, 즉 폭탄을 떨어뜨린 미군 폭탄 투하수와, 공습을 지휘했던 일본군 지휘관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어, 함께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가 된 것이다. 후치다는 이후 목사가 되어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신의 간증을 전했고, 그의 삶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평화의 메시지가 되었다.

결론: 증오의 사슬을 끊는 사랑의 능력
제이콥 드셰이저는 30년이 넘는 일본 선교 사역을 마친 후 고향 오리건으로 돌아와, 2008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이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하는 사랑 안에서 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실화이다.

그의 유산은 명확하다.

그는 용서의 능력을 증명했다. 그는 포로수용소의 어둠 속에서 원수를 용서하는 법을 배웠고, 그 용서를 자신의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한 나라 전체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화해의 다리를 놓았다. 전쟁의 원수였던 두 사람, 드셰이저와 후치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이야기는, 복음이 정치적, 민족적 적대감을 넘어 인류를 하나로 묶는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다.

제이콥 드셰이저는 복수심에 불타는 전쟁 영웅으로 시작했지만, 그의 진짜 영웅적인 삶은 그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단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의 삶에도 용서하지 못하는 '일본'은 없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증오의 감옥에서 걸어 나와, 용서와 자유의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드셰이저의 삶은 그 길 끝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화해와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원한 증거이다.

강의 읽음 등록
mainlogo.png

SWIM 세계인터넷선교협의회는 (KWMA소속단체) 1996년 창립한 선교단체로, 인터넷과 IT를 활용하여 30여 년간 세계선교에 기여해 왔습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