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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윌리엄 부스 (William Booth)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의 창립자로, 런던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 '수프, 비누, 그리고 구원'을 외치며 영적, 육체적 필요를 채웠습니다.

'수프, 비누, 그리고 구원'의 사도, 윌리엄 부스: 구세군 창설과 사회 복음의 실천
서론: 죄악의 바다에 뛰어든 선교사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심장이었던 영국 런던. 그 화려한 번영의 이면에는, 악취와 질병, 가난과 범죄가 들끓는 거대한 빈민가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말쑥한 옷차림의 중산층 교인들만을 환영하며, 이 더럽고 냄새나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외면했다. 바로 이 죄악의 바다 한가운데로, "가장 밑바닥으로 가라(Go for souls, and go for the worst)!"고 외치며 기꺼이 뛰어든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부스, '수프, 비누, 그리고 구원(Soup, Soap, and Salvation)'이라는 구호 아래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을 창설한 위대한 복음 전도자이자 사회 개혁가였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의 방식으로는 런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대 조직과 제복, 그리고 거리의 악단이라는 파격적인 방법을 도입했다. 그의 '군대'는 죄와 싸우는 군대였고, 그들의 '전쟁'은 굶주림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절망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영혼의 구원과 육신의 필요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믿으며, 빵과 복음을 함께 전하는 '총체적 선교'의 가장 위대한 모델 중 하나를 제시했다.

그의 급진적인 방식은 초기에는 수많은 조롱과 핍박을 받았지만, 그의 진정성 있는 헌신은 결국 영국 사회 전체를 움직였고, 구세군은 오늘날 전 세계 130여 개국에서 활동하는 가장 존경받는 구호 및 선교 단체 중 하나가 되었다. 본 글은 이처럼 '죄인들의 친구'였던 윌리엄 부스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기존 교단과 결별하고 구세군을 창설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수프, 비누, 그리고 구원'으로 대표되는 그의 독창적인 사역 방식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삶이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 던지는 도전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감리교 목사에서 '대장'으로
윌리엄 부스는 1829년 노팅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 시절 깊은 회심을 체험하고, 존 웨슬리의 열정적인 정신을 이어받은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
그는 뛰어난 부흥사였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교회 안이 아닌, 교회 밖의 소외된 이들을 향해 있었다. 그는 런던의 이스트엔드(East End) 빈민가를 찾아가, 술주정뱅이, 매춘부, 도둑, 그리고 굶주린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의 뜨거운 설교에 감동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했지만, 그가 그들을 교회로 데려갔을 때 비극이 발생했다. 점잖은 교인들은 이 '더럽고 냄새나는 무리'와 함께 예배드리기를 거부하며 그들을 냉대하고 문전박대했다.

이 경험을 통해 부스는 깊은 갈등에 빠졌다. 그는 "만약 교회가 죄인을 환영하지 않는다면, 나는 죄인들을 위한 나만의 교회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1865년, 그는 아내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와 함께 런던 이스트엔드에 작은 천막을 치고 '기독교 선교회(The Christian Mission)'를 시작했다. 이것이 구세군의 전신이다.

'구세군'의 탄생: 죄와 싸우는 군대
1878년, 부스는 자신의 선교회를 보다 효과적인 조직으로 개편하면서, 군대 조직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스스로를 '대장(General)'이라 칭했고, 사역자들은 '사관(Officer)', 평신도들은 '병사(Soldier)'라 불렸다. 그들은 제복을 입었고, 깃발을 들었으며, 놋쇠 악기 소리가 요란한 군악대를 앞세워 거리로 행진했다.

'구세군'이라는 이름은 "우리는 구원을 위한 자원 봉사 군대다(We are a volunteer army for salvation)"라는 부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이 군대 조직은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통해 가장 필요한 곳에 신속하게 인력과 자원을 투입할 수 있게 해주었고, 제복은 계급과 신분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상징했다. 당시 점잖은 교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이었지만, 이 '군대'는 런던의 가장 어두운 전선(戰線)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본론 2: 수프, 비누, 그리고 구원 - 총체적 사역
윌리엄 부스는 "배고픈 사람의 귀에는 어떤 복음도 들리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다. 그의 사역의 핵심은 영혼의 구원과 육신의 필요를 동시에 채워주는 것이었다.

'암흑의 영국과 그 탈출구'
1890년, 그는 당시 영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책 **『암흑의 영국과 그 탈출구(In Darkest England and the Way Out)』**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런던 빈민가의 끔찍한 실상, 즉 빈곤과 실업, 알코올 중독, 매춘, 주택 문제 등을 상세히 고발했다. 그는 당시 탐험가 헨리 스탠리가 묘사했던 '암흑의 아프리카'에 빗대어,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심장부에 그보다 더 끔찍한 '암흑의 영국'이 존재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고발에만 그치지 않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수프(Soup):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와 자선 숙소(shelter)를 제공한다.

비누(Soap): 일할 의지가 있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노동 작업장),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재활 시설을 운영한다.

구원(Salvation):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들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이끈다.

이 '수프, 비누, 그리고 구원'의 비전 아래, 구세군은 실업자들을 위한 직업소개소, 알코올 중독자 재활원, 미혼모 보호 시설, 실종자 가족 찾기 운동, 빈민 구제 은행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혁신적인 사회 복지 시스템을 구축했다.

여성 사역의 선구자, 캐서린 부스
윌리엄 부스의 사역을 이야기할 때, 그의 아내이자 동역자였던 캐서린 부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구세군의 어머니'라 불리며, 남성 중심의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설교하고 사역할 권리가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실천했던 선구자였다. 구세군이 초기부터 여성 사관들에게 남성 사관과 동등한 리더십의 기회를 부여했던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영향이었다. 그녀는 윌리엄 부스의 가장 위대한 비전 파트너이자, 구세군 영성의 심장이었다.

결론: 가장 낮은 곳을 향한 행진
1912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윌리엄 부스는 한때 조롱받던 이단아에서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런던 시민 15만 명이 거리로 나와 애도했으며, 영국 국왕이 조문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빨간 자선냄비(Red Kettle)'로 상징되는 구세군의 헌신적인 활동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는 교회의 문턱을 없앴다. 그는 교회가 세상의 가장 어둡고 낮은 곳으로 직접 찾아가야 함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는 '사회 복음'의 위대한 실천가였다. 그는 영혼 구원과 사회적 책임을 결코 분리하지 않았으며, 말뿐인 신앙이 아닌 행동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가장 효과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군대라는 파격적인 조직 형태를 통해, 그는 가장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세상의 필요에 응답하는 구호 시스템을 구축했다.

윌리엄 부스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의 교회는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우리의 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의 북소리와 군악대 소리는, 안락한 성벽 안에 안주하려는 모든 교회를 향해,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굶주리고 소외된 이웃의 손을 잡으라고 외치는,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진군의 나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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