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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사무엘 마펫 (Samuel A. Moffett)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숭실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하고,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습니다.

평양의 사도, 사무엘 마펫: 동방의 예루살렘을 세운 개척자
서론: 무너진 성문 위에서의 기도
1890년, 한 젊은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평양 땅을 밟았다. 당시 평양은 30여 년 전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해 있던, 선교사에게는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였다.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쫓겨나, 무너진 대동문 문루에 올라가 밤을 지새우며 기도했다. "하나님, 이 어둡고 완고한 도시를 당신께 바칩니다. 이곳을 동방의 위대한 영적 중심지로 만들어 주옵소서."

이 기도의 주인공이 바로, 훗날 '평양의 사도'로 불리며 한국 북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초석을 놓은 사무엘 오스틴 마펫, 한국명 마포삼열(馬布三悅)이다. 그의 기도는 놀랍게도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가 눈물로 기도했던 바로 그 도시 평양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수많은 교회와 신학교가 세워지고, 1907년 대부흥 운동의 진원지가 되면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마펫은 호러스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개신교 역사의 1세대를 이끈 거인이다. 특히 그는 척박하고 배타적이었던 북한 지역, 특히 평안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강력한 순회 전도와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한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일구어냈다. 그는 숭실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한 위대한 교육가였으며, 한국인 지도자를 키워 교회를 이양하고자 했던 선구적인 선교 전략가였다. 본 글은 이처럼 '평양의 개척자'였던 사무엘 마펫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가장 위험한 땅이었던 평양을 자신의 사명지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그의 역동적인 순회 전도와 교육 사역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양 대부흥의 산파 역할을 한 그의 사역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어떤 깊은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가장 완고한 땅, 평양을 향하여
사무엘 마펫은 1864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태어나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 재학 시절, 학생자원운동(SVM)의 영향을 받아 해외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한 미지의 땅, 한국이었다.

"내가 평양으로 가겠소"
1890년 1월,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도착한 그는, 먼저 서울에서 언더우드와 함께 활동하며 한국어를 익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서울에 안주하는 대신, 아직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미개척지를 향하고 있었다.

당시 평양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사건 이후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이 가장 강한 도시로, 누구도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마펫은 바로 그 위험한 도시야말로 자신이 가야 할 곳이라고 믿었다. 그는 "가장 완고하고 어려운 곳이기에, 바로 그곳에 복음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893년, 그는 마침내 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한국 북부 지역 전체를 책임지는 선교사로서 평양에 첫 상주 선교 기지를 세웠다.

순회 전도와 '사랑방 사역'
마펫의 선교 전략의 핵심은 '끊임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평양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평안도와 황해도의 수많은 마을과 시장을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Itinerant Evangelism)**에 힘썼다. 그는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외쳤고, 마을의 사랑방에 사람들을 모아 밤늦도록 성경을 가르쳤다.

그의 접근 방식은 매우 인격적이었다. 그는 한국인의 관습을 존중하며 그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의 진심 어린 사랑과 헌신에, 서양인이라면 무조건 돌을 던지려 했던 평양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끈질긴 '사랑방 사역'을 통해, 의주, 강계 등 북한 지역 곳곳에 작은 교회 공동체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본론 2: 교육을 통한 지도자 양성
마펫은 교회의 미래가 잘 훈련된 현지인 지도자들에게 달려 있음을 깊이 인식했다. 그는 순회 전도와 함께, 미래의 지도자들을 길러낼 교육 기관 설립에 전념했다.

숭실학당과 평양신학교
1897년, 마펫은 자신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작은 학교를 시작했다. 이 작은 학교가 바로 훗날 숭실대학교의 모태가 된 '숭실학당(崇實學堂)'이다. 숭실학당은 평양 최초의 근대 중등 교육 기관으로서, 성경뿐만 아니라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며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그의 교육 사역의 정점은 1901년,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 신학교(훗날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그는 윌리엄 베어드(배위량) 선교사와 함께 이 신학교의 초대 교장이자 교수로 섬겼다. 그의 목표는 외국인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한국인 목회자들을 직접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에 목회자를 속성으로 길러내는 대신, 높은 학문적, 영적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신학교육과 함께, 학생들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방학 중에는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전도하는 '자립 전도 신학'을 강조했다. 1907년, 평양신학교는 마침내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되어 한국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본론 3: 평양 대부흥의 산파
사무엘 마펫의 끈질긴 기도와 헌신은 1907년, 한국 교회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건인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열매 맺었다.

부흥의 진원지, 평양
1900년대 초, 평양의 기독교 공동체는 놀랍게 성장하고 있었다. 마펫과 동료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들은 부흥하고 있었지만, 그는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린 교인들 간의 시기와 갈등, 그리고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며 영적 부흥을 간절히 갈망했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남자 사경회 기간 동안, 부흥의 불길이 터져 나왔다. 길선주 장로가 회중 앞에서 자신의 숨겨왔던 죄를 눈물로 공개적으로 회개하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있던 수백 명의 성도들이 마치 성령의 강력한 임재에 압도된 듯, 저마다 자신의 죄를 부르짖으며 통회 자복하기 시작했다. 회개의 물결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고, 교회는 거대한 눈물의 강을 이루었다.

이 부흥의 불길은 평양을 넘어 한국 전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 '평양 대부흥 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윤리적, 영적 각성을 통해 내적으로 성숙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사무엘 마펫은 이 부흥 운동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그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영적 토양을 15년간 눈물과 기도로 갈아온 '산파(産婆)'였다. 그가 세운 평양신학교의 학생들이 부흥의 중심에 있었고,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부흥의 불길을 전국으로 옮기는 주역이 되었다. 무너진 대동문 위에서 드렸던 그의 첫 기도가, 마침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영광스러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결론: 평양에 묻힌 사도의 유산
사무엘 마펫은 1936년, 46년간의 한국 사역을 마치고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갔고, 1939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한국 사랑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사무엘 H. 마펫(마삼락)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자이자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했다.

사무엘 마펫의 유산은 한국 교회의 DNA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는 한국 북부 기독교의 아버지였다. 그가 뿌린 씨앗 위에,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역동적인 교회 공동체가 세워졌다.

그는 한국 장로교 신학 교육의 창시자였다. 그가 세운 평양신학교의 정신은 오늘날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신학교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는 평양 대부흥의 영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끈질긴 인내와 기도는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부흥을 경험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사무엘 마펫은 가장 완고하고 위험했던 땅을 선택하여, 그곳을 가장 뜨거운 부흥의 중심지로 변화시킨 위대한 개척자였다. 그가 처음 평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외로운 이방인이었지만, 그가 떠날 때 그는 수많은 영적 자녀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평양의 사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과 헌신은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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