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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보딜 비요른 (Bodil Biørn)

노르웨이 출신 선교사로,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의 참상을 목격하고 수많은 고아와 난민을 돌보았습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증인, 보딜 비요른: 사진기로 역사의 진실을 기록한 간호사
서론: 카메라를 든 간호사, 역사의 증인이 되다
역사의 거대한 비극 앞에서 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제1차 세계대전의 광기 속에서, 오스만 제국이 자행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끔찍한 '인류에 대한 범죄'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외면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옥의 한복판에서, 한 노르웨이 출신의 선교사 간호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생명을 구하고,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보딜 비요른. 그녀의 무기는 의약품과 붕대, 그리고 한 대의 카메라였다.

그녀는 전통적인 의미의 복음 전도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상처를 싸매는 치유자였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어머니였으며, 무엇보다 아무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 학살의 진실을 자신의 사진과 일기 속에 낱낱이 기록한 '역사의 증인'이었다. 그녀가 남긴 흑백 사진들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역사 부정론자들의 거짓을 꿰뚫는, 소리 없는 그러나 가장 강력한 고발장이다.

그녀의 삶은 안락한 신앙이 아니라,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행동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본 글은 이처럼 '아르메니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보딜 비요른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녀가 어떻게 머나먼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섬기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1915년 대학살의 현장에서 그녀가 목격하고 기록한 참상과 구호 활동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증언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녀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노르웨이의 간호사, 아르메니아의 부름에 답하다
보딜 비요른은 1871년 노르웨이에서 부유한 선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독일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1905년 노르웨이의 '여성 선교 연합(Women's Missionary Organization)'의 파송을 받아, 당시 오스만 제국 동부에 살고 있던 기독교 소수민족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녀의 첫 사역지는 오스만 제국 동부의 무쉬(Muş) 지역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독일 선교회가 운영하던 병원과 고아원에서 일하며, 이미 차별과 억압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간호사였을 뿐만 아니라, 사진 기술을 배워 현지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카메라는 이국적인 땅의 아름다움을 담는 도구였다.

본론 2: 1915년, 지옥의 목격자가 되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젊은 투르크당'이 이끄는 오스만 제국 정부는 제국 내의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을 '제거'하려는 체계적인 학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것이 바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Armenian Genocide)'의 시작이었다.

학살의 현장에서
보딜 비요른이 있던 무쉬는 대학살의 가장 참혹한 현장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도시의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들이 처형당하고, 남자들이 학살당하며, 여자와 아이들이 시리아 사막을 향한 '죽음의 행진'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그녀가 돌보던 병원은 부상자들로 가득 찼고, 고아원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터키인들이 우리 고아원을 불태웠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길거리에는 시체들이 즐비했고, 피 냄새가 진동했다. 이것은 지옥이다."

카메라, 진실을 기록하는 무기가 되다
이 끔찍한 혼돈 속에서, 보딜 비요른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카메라를 들었다. 그녀의 카메라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담지 않았다. 그녀는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아들의 텅 빈 눈, 학살당한 시신들,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하나하나 필름에 담았다.

그녀의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양심을 향한 고발이자, 잊혀질 진실을 향한 투쟁이었다. 그녀는 이 사진들을 몰래 외부 세계로 보내,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녀의 사진들은 훗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실체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하고 반박할 수 없는 증거 자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단지 기록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학살의 현장에서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들을 자신의 품으로 거두어,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 그들의 어머니가 되어주었다.

본론 3: 끝나지 않은 사명 -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삶
오스만 제국에서 간신히 탈출한 후에도, 보딜 비요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남은 생애는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온전히 바쳐졌다.

시리아와 아르메니아의 어머니
그녀는 시리아의 알레포(Aleppo)와 아르메니아의 알렉산드로폴(Alexandropol) 등지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수천 명의 전쟁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며 교육했다. 그녀는 아이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보듬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심어주는 영적인 어머니였다.

그녀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강연과 사진 전시회를 통해 아르메니아의 비극을 알리고, 구호 기금을 모금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결론: 잊혀지지 않는 빛
보딜 비요른은 1960년 88세의 나이로 노르웨이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많은 사람을 '개종'시킨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사랑'과 '정의'를 자신의 삶으로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위대한 신앙의 증인이었다.

그녀의 유산은 영원하다.

그녀는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한 인도주의자였다. 그녀의 헌신이 없었다면, 수많은 아르메니아 고아들이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역사의 증인'이었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남긴 사진과 일기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의 진실을 밝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아르메니아 민족의 의인: 그녀의 이름은 오늘날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 있는 대학살 추모관에, 아르메니아 민족을 구한 '의인'으로서 덴마크의 선교사 카렌 예페 등과 함께 영원히 새겨져 있다.

보딜 비요른은 간호사로서 병든 몸을 치유하기 위해 아르메니아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 민족 전체가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침묵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구원했고, 자신의 카메라로 죽은 자들을 위한 진실을 구원했다. 그녀의 삶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한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이 얼마나 밝은 빛을 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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