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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멜빌 콕스 (Melville Cox)

'천 명의 일꾼이 아프리카에서 쓰러질지라도, 아프리카를 포기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라이베리아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입니다.

아프리카에 묻힌 첫 씨앗, 멜빌 콕스: 죽음으로 선교의 문을 연 순교자
서론: "아프리카를 포기하지 말라"
"Let a thousand fall, but let not Africa be given up." (천 명이 쓰러질지라도, 아프리카를 포기하지는 말라.)

이 한 문장은 19세기 미국 선교의 심장을 뒤흔든 강력한 외침이었다. 이 말은 화려한 성공을 거둔 선교사의 승전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인의 무덤'이라 불리던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 땅에 도착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치명적인 열병에 쓰러져가던 한 선교사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의 이름은 멜빌 콕스, 미국 감리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해외 선교사였다.

그의 선교 사역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완전한 실패였다. 그는 교회를 세우지도, 단 한 명의 개종자를 얻지도 못했다. 그가 남긴 것은 아프리카의 낯선 땅에 묻힌 그의 외로운 무덤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마지막 유언은 오히려 잠자고 있던 미국 교회의 양심을 깨웠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아프리카를 향한 불을 지피는 순교의 피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아프리카 선교의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연 것이다.

본 글은 이처럼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멜빌 콕스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질병과 개인적인 슬픔 속에서도 아프리카를 향한 소명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라이베리아에서의 그의 짧고 고통스러웠던 사역과 그의 죽음을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죽음이 어떻게 실패가 아닌, 미국 감리교 세계 선교의 초석이 되었는지 그 역설적인 유산의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고난으로 단련된 소명
멜빌 콕스의 아프리카를 향한 소명은, 그 자신이 겪었던 깊은 고난의 터널 속에서 형성되었다.

질병, 상실, 그리고 새로운 부르심
1799년 미국 메인주에서 태어난 멜빌 콕스는 젊고 유망한 감리교 목회자였다. 그는 열정적인 설교와 따뜻한 인품으로 교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일찍부터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당시 불치병이었던 결핵 진단을 받았고, 이로 인해 목회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보내는 깊은 슬픔을 겪었다.

건강과 아내, 그리고 사역을 모두 잃고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새로운 부르심이 찾아왔다. 1820년대, 미국 식민 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는 해방된 흑인 노예들을 아프리카로 이주시켜 '라이베리아(Liberia, 자유의 땅)'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 감리교회는 이 라이베리아에 첫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멜빌 콕스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아프리카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의 건강 상태는 아프리카의 치명적인 기후를 견디기에는 너무나 위태로웠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결정을 '자살 행위'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생명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의 연약한 건강 상태가 아프리카로 가는 것을 막는 이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나는 그저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는 길에 나의 뼈를 묻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다른 선교사들을 깨우는 계기가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론 2: 라이베리아에서의 마지막 141일
1832년 11월, 멜빌 콕스는 마침내 라이베리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선교를 위한 거창한 계획 대신, 자신의 관(棺)을 짤 목재가 들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짧지만 불꽃같았던 사역
1833년 3월 8일, 그는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Monrovia)에 도착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141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명이 하루하루 소진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마치 10년처럼 일했다.

교회 재건: 그는 이미 존재했으나 무너져가던 감리교 예배당을 재건하고, 흩어졌던 성도들을 다시 모아 예배를 시작했다.

교육의 씨앗: 그는 주일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고, 훗날 라이베리아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이 될 학교의 설립 계획을 세웠다.

선교의 기초 설계: 그는 병상에 누워서까지 동료들에게 편지를 쓰며, 라이베리아를 넘어 아프리카 내륙으로 향하는 미래 선교의 청사진을 그렸다.

"천 명이 쓰러질지라도..." - 위대한 유언
아프리카의 가혹한 기후는 그의 결핵을 빠르게 악화시켰다. 그는 '검은 물 열병'이라 불리는 치명적인 말라리아에 걸려 쓰러졌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그는, 미국에 있는 감리교 선교 책임자에게 자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구술했다. 이 편지의 마지막에 담긴 것이 바로 그의 불멸의 유언이었다.

"Let a thousand fall, but let not Africa be given up." (천 명이 쓰러질지라도, 아프리카를 포기하지는 말라.)

1833년 7월 21일, 멜빌 콕스는 라이베리아에 도착한 지 4개월여 만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소원대로, 그의 뼈는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는 첫 주춧돌이 되어 그 땅에 묻혔다.

본론 3: 하나의 밀알, 위대한 부흥을 낳다
멜빌 콕스의 죽음은 표면적으로는 비극적인 실패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가 살아서 했던 그 어떤 사역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잠자는 교회를 깨운 죽음
그의 죽음과 마지막 유언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 감리교회 전체는 큰 충격과 도전에 휩싸였다. 한 젊은 선교사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아프리카의 문을 열고자 했다는 소식은, 이전까지 해외 선교에 무관심했던 수많은 교인들의 양심을 일깨웠다.

그의 유언 "천 명이 쓰러질지라도..."는 곧 미국 감리교 선교 운동의 가장 강력한 슬로건이자 전투의 함성이 되었다. 그의 죽음은 아프리카 선교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수많은 젊은이들이 "콕스가 쓰러진 저 땅으로 우리가 가겠다"며 아프리카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가 죽은 지 3년 만에, 2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라이베리아로 파송되었고, 이후 미국 감리교 선교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거대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실패가 아닌, 가장 위대한 씨앗
멜빌 콕스의 삶은 '한 알의 밀알'의 신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열매를 보지 못했다. 그는 단지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라는 씨앗은, 이후 수백, 수천 배의 풍성한 열매를 셔츠는 위대한 희생이었다.

그의 유산은 그가 세운 건물이나 기관에 있지 않다. 그의 유산은 그의 죽음을 통해 다음 세대의 가슴속에 심어진 '아프리카를 향한 꺾이지 않는 사랑' 그 자체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단순한 끝이 아니라, 더 위대한 시작을 위한 과정임을 믿었고, 역사는 그의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결론: 죽음으로 승리한 선교사
멜빌 콕스의 묘비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 그의 불멸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그는 선교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사역한 선교사 중 한 명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가장 깊고 오래 지속된 것 중 하나이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성공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진정한 성공은 오랜 기간 많은 업적을 남기는 것인가, 아니면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인가? 멜빌 콕스는 후자의 삶을 택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아프리카 선교 제단의 첫 번제물로 기꺼이 바쳤고, 그 희생의 향기는 대서양을 건너 한 세대의 영혼을 깨우는 능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생명보다 더 위대한 사명이 있음을 증거했다. 그의 짧고 비극적인 삶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당신은 무엇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грозном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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