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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200인

레몽 룰 (Ramon Llull)

이슬람권 선교의 선구자로, 아랍어와 이슬람 문화 연구를 통해 대화적 선교를 시도했습니다.

레몽 룰(Ramon Llull): 그리스도의 바보, 이슬람을 향한 지성의 사도
서론: 칼 대신 펜을 든 십자군
중세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을 향해 칼을 들고 '거룩한 전쟁'을 외치던 시대, 한 남자가 홀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십자군 갑옷 대신 순례자의 옷을 입었고, 무거운 검 대신 논리와 사랑이라는 무기를 손에 들었다. 그는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이슬람의 언어와 철학을 파고들었으며, 폭력이 아닌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명하고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의 이름은 레몽 룰, 스스로를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a fool for Christ)'라 칭했던 마요르카의 기인이자 천재였다.

레몽 룰은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시대를 앞서간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언어학자, 철학자,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단순히 성경을 낭독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를 합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보편적 논리 체계, 즉 '위대한 술법(Ars Magna)'을 창안하는 데 수십 년을 바쳤다. 그의 목표는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공유하는 신의 속성(선하심, 위대하심 등)을 출발점으로 삼아, 삼위일체와 성육신 같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결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님을 논증하는 것이었다.

그의 삶은 급진적인 회심, 광적인 학문 탐구, 꺾이지 않는 선교 열정, 그리고 순교로 점철된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는 교황과 왕들을 찾아다니며 선교사 양성을 위한 언어 학교 설립을 끈질기게 청원했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홀로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인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토론을 벌였다.

본 글은 '계몽 박사(Doctor Illuminatus)'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 독특한 인물의 삶과 사상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화려한 궁정 시인이었던 그가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바보'가 되었는지 그 극적인 회심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폭력적인 십자군에 대한 대안으로 그가 제시한 '위대한 술법'의 내용과 그 선교적 전략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끈질긴 교육 청원과 실제적인 선교 여정, 그리고 그의 순교가 후대 기독교와 세계사에 어떤 깊은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궁정 시인에서 '그리스도의 바보'로
레몽 룰의 위대한 사명은 화려하고 방탕했던 세속적 삶의 잿더미 위에서 피어났다. 그의 완전한 변화는 그의 모든 사역의 출발점이자 동력이었다.

마요르카의 음유시인
레몽 룰은 1232년경, 이슬람으로부터 막 재정복된 스페인의 마요르카(Majorca) 섬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요르카는 기독교, 이슬람, 유대 문화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역동적인 곳이었고, 이러한 환경은 훗날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젊은 시절의 그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마요르카 왕궁의 궁정 관리이자, 사랑과 기사도를 노래하는 재능 있는 음유시인(troubadour)이었다. 그는 스스로 고백했듯이, 호화로운 옷을 즐겨 입고 유부녀를 포함한 여러 여인들과의 연애를 즐기는 등 쾌락적이고 세속적인 삶에 깊이 빠져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환상
그의 삶을 180도 바꾼 사건은 그가 30세쯤 되었을 때 찾아왔다. 어느 날 밤, 한 여인을 향한 음탕한 사랑 노래를 짓고 있을 때, 그의 눈앞에 홀연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이 나타났다. 피 흘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작시를 멈췄지만, 며칠 후 다시 펜을 들자 똑같은 환상이 나타났다. 이 환상은 다섯 번이나 반복되었고, 마침내 레몽 룰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자신의 죄악된 삶과, 자신을 위해 고통받으신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 사이의 거대한 간극 앞에서 깊이 통회했다. 그는 이 환상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며칠간의 고뇌 끝에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고, 세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

순교의 각오: 이슬람교도(당시 그가 사용한 용어로는 '사라센')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죽는다.

최고의 책 저술: 그들의 오류를 논파하고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증명할 수 있는 '이 세상 최고의 책'을 쓴다.

선교사 양성: 교황과 왕들을 설득하여, 선교사들이 아랍어와 다른 이교도들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수도원(선교 대학)을 설립한다.

이 세 가지 목표는 이후 40년이 넘는 그의 남은 생애를 이끌어가는 흔들리지 않는 별이 되었다. 그는 즉시 궁정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을 떠나 긴 순례길에 오르며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본론 2: 검이 아닌 논리로: '위대한 술법(Ars Magna)'의 탄생
레몽 룰의 선교 방식은 당대에는 혁명적이었다. 그는 십자군의 실패를 목격하며, 강제적인 개종이나 무력에 의한 정복이 결코 진정한 신앙을 낳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검이 아닌 이성(reason)과 논리를 통해 이슬람 세계와 대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랍어와 이슬람 철학에 대한 9년간의 탐구
자신의 두 번째 목표, 즉 '최고의 책'을 쓰기 위해 레몽 룰은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요르카에서 무슬림 노예 한 명을 사서, 그에게 9년 동안 아랍어와 이슬람 철학 및 신학을 배웠다. 이는 당시 기독교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는 코란과 알가잘리, 이븐 시나(아비켄나)와 같은 위대한 이슬람 사상가들의 저작을 원어로 깊이 탐구했다.

이 고독한 학문 탐구의 시기는 그에게 이슬람 사상의 정교함과 깊이를 깨닫게 해주었고, 동시에 그들의 논리 체계 안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했다.

Ars Magna: 보편적 진리를 향한 논리 기계
9년간의 연구 끝에, 란다(Randa) 산 정상에서의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레몽 룰은 마침내 자신의 독창적인 논증 체계인 '위대한 술법(Ars Magna)'을 완성했다. 이는 일종의 '논리 기계' 또는 '사고의 기술'로, 기하학적 다이어그램과 회전하는 원반, 그리고 알파벳 기호들의 조합을 통해 모든 진리를 연역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술법'의 핵심 아이디어는 모든 피조물 속에 신적인 속성들의 흔적이 있다는 신플라톤주의적 사상에 기반한다. 레몽 룰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이 공통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9가지 절대적인 신의 속성(선함, 위대함, 영원함, 능력, 지혜, 의지, 덕, 진리, 영광)을 기본 원리로 설정했다. 그는 이 원리들을 알파벳(B, C, D, E...)으로 기호화하고, 이 기호들이 적힌 여러 개의 동심원을 회전시켜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선하심(B)은 그의 위대하심(C)과 일치하는가?" 또는 "그의 영원함(D)은 그의 능력(E)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체계적으로 생성하고 답할 수 있었다. 그의 최종 목표는 이 보편적 원리들의 논리적 귀결로서, 삼위일체(각 위격이 선함, 위대함 등을 공유하며 구별됨)와 성육신(신의 무한한 선함과 능력이 인간이 되심으로 나타남) 같은 기독교의 고유한 교리들이 결코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신의 속성들에 대한 가장 완벽한 표현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의 '술법'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한계가 명확하지만, 그 시도는 혁명적이었다. 그는 종교 간의 대화가 서로의 경전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성의 원리' 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믿었던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본론 3: 꺾이지 않는 열정: 선교, 교육, 그리고 순교
'위대한 술법'이라는 지적 무기를 완성한 레몽 룰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첫 번째와 세 번째 목표, 즉 선교와 교육에 쏟아부었다.

선교 대학 설립을 위한 평생의 청원
레몽 룰은 개별적인 선교사의 헌신만으로는 부족하며,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선교사 양성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교황들과 프랑스, 아라곤, 시칠리아의 왕들, 그리고 파리 대학을 찾아다니며 아랍어와 히브리어, 칼데아어 등을 가르치는 선교 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끈질기게 청원했다.

대부분의 시도는 냉대와 무관심 속에 좌절되었지만,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은 마침내 1311년 비엔 공의회(Council of Vienne)에서 부분적인 결실을 보았다. 공의회는 로마, 파리, 옥스퍼드, 볼로냐, 살라망카의 주요 대학에 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 강좌를 개설하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비록 이 결정이 완전히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이는 타문화권 선교를 위한 언어 교육의 중요성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로서, 레몽 룰의 선구적인 비전이 거둔 중요한 승리였다.

북아프리카에서의 담대한 도전과 순교
레몽 룰은 이론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직접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북아프리카로 선교 여행을 떠났다.

1293년, 60세가 넘은 나이에 그는 튀니스(Tunis)로 가서 이슬람 학자들에게 공개적으로 토론을 신청했다. 그는 이슬람이 진리라면 자신은 기꺼이 개종하겠노라 선언하며, 만약 기독교가 더 이성적임이 증명된다면 그들도 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담대함에 놀란 당국은 그를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했으나, 한 학자의 중재로 추방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1307년, 75세의 나이에 그는 다시 북아프리카의 베자이아(Bugia, 현재 알제리)로 가서 시장 한복판에서 아랍어로 설교하다가 성난 군중에게 돌을 맞고 투옥되었다. 수개월간의 감옥 생활 끝에 그는 다시 추방당했다.

그의 마지막 여정은 1314년, 82세의 나이에 다시 베자이아로 돌아가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숨어서 이전의 개종자들을 격려하며 사역하다가, 결국 다시 공개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전승에 따르면, 1315년 분노한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를 구출한 제노바 상인들의 배 위에서 마요르카를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그가 평생 소원했던 순교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결론: 시대를 초월한 선구자, '그리스도의 바보'
레몽 룰은 그의 시대에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고독한 천재였다. 그의 '위대한 술법'은 너무나 복잡하고 기이하게 여겨졌고, 이슬람과의 대화를 추구한 그의 선교 방식은 너무나 이상주의적으로 보였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종종 괴짜나 '바보'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가 되었다.

그의 유산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첫째, 그는 현대적 의미의 타문화권 선교의 아버지이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상대방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의 접근 방식은 훗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나 마테오 리치 같은 위대한 선교사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둘째, 그는 종교 간 대화의 선구자였다. 폭력과 정복이 유일한 해법처럼 보였던 시대에, 그는 이성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평화적인 대화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오늘날 종교 갈등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의 비전은 여전히 유효하고 절실하다.

레몽 룰의 삶은 하나의 거대한 역설이었다. 그는 가장 이성적인 방법으로 가장 비이성적인 사랑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가장 논리적인 체계를 통해 가장 신비로운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다. 궁정의 음유시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마지막 노래를 북아프리카의 낯선 땅에서 피로써 완성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이란 안락한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사랑할 수 없는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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