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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에는 봉사하지만, 평일에는 이웃에게 무관심하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지만, 평일에는 바로 옆집 이웃에게도 무관심한 모습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자주 겪는 또 다른 이중성의 단면입니다. 이는 신앙의 본질인 **'사랑'**과 **'실천'**이 교회라는 특정 공간에만 국한될 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왜 나타나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봉사와 사랑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구체적 양상
교회 안에서의 봉사: 주일 아침 일찍 나와 교회 식당에서 식사 봉사를 하거나, 주보를 만들고, 주차 안내를 하는 등 교회 공동체를 위한 다양한 봉사에 헌신합니다. 이러한 봉사에는 시간과 노력, 물질이 아낌없이 투입됩니다.
평일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 그러나 정작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일상생활에서는,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의 어려움에는 눈을 감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겪는 고통에는 무관심하며, 주변의 작은 필요에도 인색해집니다.
이러한 모순은 '봉사'와 '사랑'의 의미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봉사와 사랑의 이중성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
'교회 봉사'와 '하나님 사랑'의 등치화: 많은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의 봉사 활동을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봉사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지만, 이것이 신앙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 안에서의 봉사'가 '삶의 현장에서의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태도가 이중적인 삶을 낳습니다.
보상 심리와 인정 욕구: 교회 안에서의 봉사는 눈에 띄기 쉽고, 다른 성도들과 목회자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기 좋습니다. 이러한 봉사에는 **'수고했다', '참 귀하다', '저분은 믿음이 참 좋다'**라는 긍정적인 피드백이 따릅니다. 반면에, 이웃을 향한 사랑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익명의 봉사일 때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사랑 실천이 가지는 가치보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의 인정 욕구가 더 클 때 이중성이 나타납니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협소한 이해: '이웃'이라는 개념을 '교회 성도'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인종, 종교, 국적, 심지어 원수까지 포함하는 보편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안의 사람들, 즉 **'우리 편'**만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배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봉사와 사랑의 이중성이 가져오는 심각한 결과
신앙의 본질 상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될 때 우리의 신앙은 본질을 잃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로 전락합니다. 봉사를 많이 하더라도, 그 봉사 안에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복음의 증거 능력 상실: 교회 봉사를 통해 교회가 잘 운영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효율적인 운영을 보고 감동받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통해 복음을 경험합니다. 교회가 헌금으로 지은 큰 건물보다, 한 성도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베푼 작은 친절과 사랑이 복음의 증거로서 더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봉사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행위로 보일 수 있지만, 이웃 사랑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내면의 갈등과 괴리: 교회에서는 사랑을 외치지만, 삶에서는 무관심한 자신의 모습에 성도들은 죄책감과 괴리를 느낍니다. "나는 왜 교회 안에서만 사랑이 많을까?"라는 고민은 결국 신앙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봉사가 사랑의 외적 표현이라면, 이웃 사랑은 그 사랑의 내적 본질입니다. 교회 봉사는 중요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교회 문밖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가족과 직장 동료, 그리고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흘러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신앙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