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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전문인 선교학 49 과정

한국 교회의 선교사 수용, 파송과 발전, 타문화권 사례

선교 역사 및 전략

받은 불꽃, 전하는 횃불: 한국 교회의 선교 수용, 파송, 그리고 세계를 향한 여정

서론: 변방에서 중심으로, 기적의 선교 역사
세계 선교 역사에서 한국 교회의 이야기는 가히 기적에 가깝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복음의 빛이 닿지 않았던 '은둔의 왕국', 서구 선교사들의 헌신과 순교의 피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던 변방의 작은 땅이, 이제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의 심장부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수혜자에서 공여자로, 선교의 대상에서 선교의 주체로의 이 극적인 전환은 단순히 양적인 성장을 넘어, 고난의 역사 속에서 복음의 본질을 체화하고 그것을 다시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강렬한 사명감으로 승화된 한국 교회만의 독특한 영적 DNA를 증거한다.

이 역사는 결코 단선적이거나 영광으로만 점철된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복음을 수용하기까지의 숱한 저항과 순교의 역사였고, 민족의 수난이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며, 폭발적인 성장 이면에 드리워진 성과주의와 문화적 오만에 대한 아픈 성찰의 과정이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 선교는 세계 기독교 지형의 급격한 변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본 강의안은 이 경이롭고도 복잡다단한 한국 선교의 대장정을 세 개의 주요 시기로 나누어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첫째, '받는 선교'의 시대: 선교사의 수용과 한국 교회의 형성기이다. 굳게 닫혔던 조선의 문을 열고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의 '총체적 접근' 방식이 어떻게 한국 사회의 마음을 얻었으며, 1907년 평양 대부흥을 통해 복음이 어떻게 한국인의 심장에 뿌리내리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둘째, '보내는 선교'의 시대: 한국 교회의 파송과 발전기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시련이 어떻게 역설적으로 한국 교회의 선교적 열정을 벼려냈으며, 1970년대 이후의 폭발적인 부흥이 어떻게 세계를 향한 선교사 파송의 동력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 선교의 강점과 약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셋째, '더불어 하는 선교'의 시대: 현대 타문화권 선교의 사례와 과제이다. 필리핀의 도시 빈민 사역, 중앙아시아의 비즈니스 선교(BAM), 그리고 탈기독교화된 유럽을 향한 선교 등, 구체적인 타문화권 사례를 통해 오늘날 한국 선교가 어떻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나아가, 선교의 패러다임이 '서구에서 나머지 세계로'가 아닌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전환된 21세기 속에서, 한국 선교가 '선교 강국'이라는 자만심을 넘어 진정한 '동반자적 선교'로 성숙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과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역사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한국 교회의 선교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살아있는 이야기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받은 불꽃을 이제 온 세상을 밝히는 횃불로 들어야 할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는 신학적, 역사적 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다.

제1부 받는 선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다 (c. 1884-1945)
19세기 말, 조선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쇄국 정책으로 인해 서구 세계에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의 기억이 생생했던 이 땅에 개신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피와 초기 선교사들의 지혜롭고 희생적인 헌신이 있었다.

1.1. 문을 열기 위한 핏자국: 초기 접촉과 순교
한국 개신교 선교의 공식적인 시작은 1884년과 1885년으로 기록되지만, 그 이전부터 복음의 문을 열기 위한 눈물겨운 시도들이 있었다. 1832년 독일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충청도 해안에 잠시 머물며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전했고, 1866년에는 영국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다 배가 불타자, 강가로 헤엄쳐 나와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다 순교했다. 특히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 직전 성경을 건넨 박춘권이라는 소년이 훗날 평양 지역의 중요한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 성경을 찢어 벽지로 사용했던 박영식의 집이 훗날 평양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인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고 교회의 씨앗이 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1.2. 의료와 교육: 마음의 문을 연 총체적 선교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수교 조약을 맺으면서 마침내 선교의 문이 열렸지만, 여전히 서양 종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던 상황에서 초기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복음 전파 대신 의료와 교육이라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조선인의 마음을 얻는 지혜로운 전략을 택했다.

의료 선교: 몸을 고쳐 마음을 열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이 칼에 찔려 죽어가던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살려낸 사건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감명받은 고종 황제는 서양식 병원 설립을 허가했고, 1885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으로 개칭)이 탄생했다. 알렌을 비롯한 에비슨, 스크랜턴 등의 의료 선교사들은 전염병 퇴치와 공중위생 개선에 헌신하며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특히 1895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에비슨 선교사는 '쥐 귀신' 때문이라 믿던 백성들에게 위생의 중요성을 알리고 소금물 요법과 같은 획기적인 치료법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이러한 헌신적인 의료 사역은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적대감을 허물고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을 여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였다.   

교육 선교: 민족의 미래를 열다: 의료와 함께 교육은 초기 선교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이었다.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는 고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여 훗날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된 경신학교를 세웠고, 같은 해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의 문을 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여성 교육에 대한 선교사들의 공헌이다.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기던 유교 사회에서,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선교사는 1886년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이화학당을 시작하여, 한국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잠재력을 일깨우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학교들은 단순히 서구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성경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며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어주었고,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남녀평등 사상을 고취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은 영혼 구원과 인간의 삶을 분리하지 않는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를 실천했다. 그들은 병원과 학교를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삶으로 증명했고, 이는 한국 교회가 초기부터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갖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3. 네비우스 선교 정책: 자립하는 교회의 DNA를 심다
초기 한국 교회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일찍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 중 하나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Plan)의 채택에 있다. 1890년, 한국을 방문한 중국 선교사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는 선교사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재정을 지원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현지 교회의 의존성을 키우고 자립을 막는다고 비판하며, '3자 원리'(Three-Self Formula)에 기초한 새로운 선교 정책을 제안했다.

자립(Self-support): 교회는 처음부터 재정적으로 선교부에 의존하지 않고, 신자들 자신의 헌금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자치(Self-government): 교회는 선교사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지도자(조사, 장로)들에 의해 스스로 다스려져야 한다.

자전(Self-propagation): 복음 전파는 선교사의 주된 과업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이다. 모든 신자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비량 전도인'이 되어야 한다.

1893년 한국의 초기 선교사 협의회는 이 네비우스 정책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 결정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는 교회를 직접 다스리는 '목사'가 아니라, 순회하며 지도자들을 훈련하고 격려하는 '조언자'의 역할을 했다. 교회 건축부터 사역자 생활비까지 모든 것을 한국인들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이는 초기에는 더디고 힘든 길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서고, 스스로 성장하며, 스스로 복음을 전파하는 강력하고 자립적인 공동체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모든 신자가 선교사'라는 네비우스 정책의 정신은 훗날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영적 DNA가 되었다.

1.4. 1907년 평양 대부흥: 성령의 불로 거듭나다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과 네비우스 정책이라는 구조 위에 부어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바로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다. 당시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가 왕성하게 성장하던 도시였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남자 사경회 기간 동안, 선교사들의 인도로 시작된 회개 기도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로 이어졌다. 길선주 장로가 수많은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친구의 재산을 가로챈 죄 등)를 눈물로 공개적으로 자백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에 사로잡혀 자신의 죄를 통곡하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도둑질, 간음, 증오 등 숨겨왔던 죄악들이 터져 나왔고, 밤새도록 이어진 회개와 용서의 기도는 평양 시내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부흥의 불길은 평양을 넘어 전국으로, 심지어 만주와 중국에까지 번져나갔다. 평양 대부흥은 몇 가지 중요한 선교적 유산을 남겼다.
첫째,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이 비로소 한국인들의 심장 깊숙이 뿌리내리는 '영적 토착화'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 철저한 회개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의 핵심임을 보여주었다.
셋째, 부흥은 곧 선교적 열정의 폭발로 이어졌다. 부흥을 체험한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고, 이는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넷째, 이 부흥은 나라를 잃어가는(을사늑약 1905년) 민족적 절망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강력한 영적 각성을 가져다주었다.

이처럼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가 단순히 '받는 교회'에서 벗어나, 성령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정결케 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영적 동력을 얻게 된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제2부 보내는 선교: 고난을 넘어 세계로 (c. 1912-1990)
1907년 대부흥을 통해 내적인 동력을 얻은 한국 교회는 곧바로 '보내는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그리고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극심한 고난의 경험이 한국 교회의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벼려냈고, 세계 어느 교회도 갖지 못한 독특한 선교적 열정과 동력의 원천이 되었다.

2.1. 첫걸음: 고난 속에서 피어난 선교의 꽃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는 교회가 안정되고 부유해진 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어두운 시기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선교사 파송: 1907년 한국 장로교 독노회는 제주도 선교를 결의하고 이기풍 목사를 파송했다. 이는 동일 문화권 내에서의 선교였지만, 당시 제주도가 육지와는 매우 다른 문화와 정서를 가진 '오지'였다는 점에서 타문화권 선교의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2년, 한국 장로교 총회는 창립 첫해에 중국 산둥성으로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세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나라를 잃은(1910년 국권 피탈) 식민지 교회가, 자신들을 핍박하는 제국주의 국가보다 더 거대한 나라인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의 순교 신앙: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강요라는 극심한 신앙적 시련에 직면했다.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거부하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했으며,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와 같은 순교자들의 '일사각오' 신앙은 한국 교회에 '고난받는 신앙',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의 유산을 깊이 새겨 넣었다. 이러한 순교 신앙은 훗날 한국 선교사들이 어떤 어려운 선교지에서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영적 자산이 되었다.

6.25 전쟁과 분단의 아픔: 해방의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은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었고 수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를 낳았다. 이 비극적인 경험은 한국 교회에 두 가지 상반된 그러나 강력한 신학적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적대감과 반공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하나는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형성된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이다. 또한,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실존적 불안감은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깝다'는 강력한 종말론적 신앙을 낳았고, 이는 "주님 오시기 전에 속히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의 긴급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2.2. 폭발적 성장과 선교 동력의 축적 (1960-1980년대)
전쟁의 폐허 위에서 한국 사회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한국 교회 역시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대표되는 메가처치(Mega-church) 현상과 '엑스플로 '74', '77 민족복음화대성회'와 같은 대규모 전도 집회로 상징된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의 동력은 여러 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새벽기도와 뜨거운 영성: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모여 부르짖어 기도하는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 특유의 영성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뜨거운 기도와 열정적인 신앙은 교회 성장의 강력한 엔진이었다.

기복신앙과 번영신학: 가난과 고통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메시지는 강력한 호소력을 가졌다. 비록 물질적, 현세적 축복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기복신앙적 요소가 대중을 교회로 이끄는 중요한 동인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강력한 목회 리더십과 평신도 동원: 카리스마 넘치는 목회자의 리더십 아래, 모든 평신도들이 전도와 봉사에 동원되는 '총력전도' 시스템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가속화했다.

이 시기의 폭발적인 교회 성장은 세계 선교를 위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축적하는 과정이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선교사로 헌신했고, 성장한 교회들은 이들을 파송하고 후원할 재정적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한국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를 창립한 것은, 이제 한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세계 선교의 무대에 나서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2.3. 보내는 선교의 특징과 비판적 성찰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 교회의 선교사 파송은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1979년 93명에 불과했던 선교사 수는 1990년 1,645명, 2000년 8,103명, 그리고 2010년대에는 2만 명을 훌쩍 넘어서며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한국 선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강점:

뜨거운 열정과 헌신: 한국 선교사들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력한 기도와 헌신, 그리고 순교를 각오하는 영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공격적인 교회 개척: 한국 교회 성장 모델을 바탕으로,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신자 수를 늘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풍부한 재정 지원: 한국 교회 성도들의 희생적인 헌금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약점과 비판: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 이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과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성과주의와 외형주의: 선교의 성공을 교회 건물 수나 세례 교인 수와 같은 가시적인 숫자로 평가하려는 '성과주의' 경향이 강했다. 이는 장기적인 안목의 제자 훈련이나 지도자 양성보다는 단기적인 결과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개교회주의와 경쟁: 교단이나 선교 단체 간의 협력보다는 개별 교회가 독자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경쟁적으로 사역하는 '개교회주의'가 팽배했다. 이는 자원의 중복과 낭비를 낳고, 선교지에서 한국 선교사들 간의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문화적 둔감성과 일방주의: 한국 교회의 성공 모델(새벽기도, 철야기도, 총력전도 등)을 현지 문화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이식하려는 '일방주의적' 태도가 강했다. 이는 현지인들에게 기독교가 '한국 문화'와 동일시되는 오해를 낳고, 문화적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물량주의와 의존성 심화: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한 '물량주의' 선교는 현지 교회가 재정적으로 한국 교회에 의존하게 만들어, 네비우스 정책의 핵심이었던 '자립' 정신을 훼손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선교계 내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선교는 더 이상 '우리가 그들에게' 베푸는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동반자적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는 한국 선교가 양적 성장의 시대를 지나 질적 성숙의 시대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제3부 더불어 하는 선교: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 (c. 1990-현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선교의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는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도전을 제기했으며, 전통적인 선교사의 입국을 막는 '창의적 접근 지역'이 늘어났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한국 선교 역시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창의적이고 유연하며, 무엇보다 겸손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3.1. 전략의 진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접근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한국 선교는 다양한 전략적 진화를 시도하고 있다.

비즈니스 선교(Business as Mission, BAM): 전통적인 선교사 비자를 받기 어려운 이슬람권이나 공산권과 같은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통해 합법적으로 거주하며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고 복음을 전하는 BAM이 중요한 전략으로 부상했다. 한국 선교사들은 IT, 농업, 요식업, 교육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즈니스를 일으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며,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총체적 선교를 실천하고 있다.   

NGO와 전문인 선교: 의료, 교육, 구호 개발, 환경 등 전문 분야를 통해 사회에 봉사하는 NGO 활동이 중요한 선교의 통로가 되고 있다. 기독교 NGO들은 가난과 질병, 재난으로 고통받는 지역에서 국경을 넘어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치며, 말보다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한다. 또한, 교사, 의사, 엔지니어 등 자신의 전문 직업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전문인 선교사'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디아스포라 선교: 세계화로 인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750만 한인 '디아스포라'는 그 자체로 거대한 선교 자원이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능통한 한인 2세, 3세들은 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현지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또한, 전 세계에 세워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사회를 복음화하고, 나아가 제3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새로운 선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3.2. 타문화권 사역의 구체적 사례들
이러한 전략적 변화는 다양한 타문화권 현장에서 구체적인 열매를 맺고 있다.

사례 1: 필리핀 도시 빈민 사역 - 총체적 공동체 세우기
세계 3대 빈민 지역 중 하나인 필리핀 마닐라의 쓰레기 마을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단순히 교회를 세우는 것을 넘어, 지역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총체적 사역을 펼치고 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은혜 학교'와 같은 교육 시설을 세워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사랑의 집짓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 지역 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직업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교회는 단순히 주일에 예배드리는 장소를 넘어, 지역 사회의 희망의 중심지가 된다. 이는 구원이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공동체 전체의 회복을 포함한다는 '전인적 구원'의 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모델이다.   

사례 2: 중앙아시아 - 비즈니스를 통한 성육신적 접근
이슬람 문화가 강하고 종교 활동에 대한 감시가 심한 중앙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한 한국인 선교사 부부는 카페를 창업했다. 그들은 선교사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양질의 커피와 친절한 서비스, 그리고 편안한 문화 공간을 제공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카페는 점차 젊은이들이 모이는 지역의 명소가 되었고, 선교사 부부는 직원들을 고용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손님들과 자연스럽게 삶을 나누며 신뢰 관계를 쌓아갔다. 이러한 장기적인 관계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삶으로 보여주며,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이는 전통적인 방식의 선교가 불가능한 지역에서, 비즈니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성육신적'으로 현지인들의 삶 속에 들어가 복음의 씨앗을 심는 창의적 선교의 좋은 사례이다.

사례 3: 유럽 - 탈기독교 사회를 향한 문화 선교
과거 기독교의 심장이었지만 지금은 교회가 텅 비어가는 탈기독교화된 서유럽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곳에서 선교는 더 이상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거나 무관심한 것'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현지 대학가에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며 지성인들과 변증적 대화를 나누고, 예술과 음악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표현하며, 지역 사회의 필요를 채우는 봉사 활동을 통해 교회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또한, 유럽에 세워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현지인들을 위한 다문화 예배를 시도하며, 쇠퇴해가는 유럽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3.3. 미래를 향한 과제: 성숙한 동반자 관계를 향하여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우뚝 선 한국 교회는 이제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숙을 추구해야 할 중대한 과제 앞에 서 있다. 21세기 선교는 더 이상 '우리가 그들에게'라는 일방적인 구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동반자적 사역이 되어야 한다.

선교의 탈서구화와 동반자 관계: 기독교의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하면서, 선교는 더 이상 '서구에서 비서구로' 향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향하는 다중심적 운동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한국 선교는 과거 서구 선교가 범했던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선교의 주도권을 현지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과감히 이양하고, 그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존중하며 협력하는 '동반자적 선교'(Partnership Mission)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선교사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재정 지원을 넘어 영적, 인적 자원을 공유하며 함께 성장하는 성숙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자신학화'의 존중과 지원: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지 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서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로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을 정립하는 '자신학화'(Self-theologizing)를 이루도록 돕는 것이다. 한국적 토양에서 한국 신학이 꽃피웠듯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의 교회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신학적 통찰로 세계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국내외적 도전과 선교적 교회의 재정립: 밖으로는 이슬람의 부상, 종교 다원주의의 확산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안으로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탈종교화,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추락, 다음 세대의 이탈과 같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선교가 더 이상 '해외'에만 국한된 특별한 활동이 아님을 일깨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모든 곳이 선교지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라는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로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요구된다. 우리 곁에 와 있는 260만 명의 이주민들을 섬기고, 사회의 불의에 맞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실천하며, 파괴되어 가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모든 삶이 곧 선교가 되어야 한다.   

결론: 미완의 과업, 새로운 부르심
한 세기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한국 교회는 선교의 수혜자에서 세계 선교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여정을 걸어왔다.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사랑과 총체적 접근, 네비우스 정책이 심어준 자립 정신, 그리고 평양 대부흥의 영적 동력은 한국 교회가 고난의 역사를 딛고 일어서는 굳건한 반석이 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어난 뜨거운 기도와 종말론적 열정은 20세기 후반 세계를 향한 선교사 파송의 폭발적인 에너지로 분출되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21세기 한국 선교는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할 수 없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 성과주의와 개교회주의의 낡은 옷을 벗고, 겸손과 섬김, 협력과 동반자 정신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할 때이다. 선교의 목표는 더 이상 우리의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과 방언 가운데 하나님의 총체적인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것이다.   

필리핀의 쓰레기 마을에서, 중앙아시아의 작은 카페에서, 그리고 탈기독교화된 유럽의 거리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이미 이 새로운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 선교의 미래가 더 이상 파송하는 선교사의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깊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육신적으로 살아내는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받은 불꽃을 횃불로 들어 올렸던 지난 세기의 영광을 넘어, 이제는 그 횃불을 나누어 온 세상이 함께 빛을 발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미완의 과업이자 새로운 부르심이다.

한국 선교 역사 및 연구

받은 불꽃, 전하는 횃불: 한국 교회의 선교 수용, 파송, 그리고 세계를 향한 여정

서론: 변방에서 중심으로, 기적의 선교 역사
세계 선교 역사에서 한국 교회의 이야기는 가히 기적에 가깝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복음의 빛이 닿지 않았던 '은둔의 왕국', 서구 선교사들의 헌신과 순교의 피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던 변방의 작은 땅이, 이제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의 심장부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수혜자에서 공여자로, 선교의 대상에서 선교의 주체로의 이 극적인 전환은 단순히 양적인 성장을 넘어, 고난의 역사 속에서 복음의 본질을 체화하고 그것을 다시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강렬한 사명감으로 승화된 한국 교회만의 독특한 영적 DNA를 증거한다.

이 역사는 결코 단선적이거나 영광으로만 점철된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복음을 수용하기까지의 숱한 저항과 순교의 역사였고, 민족의 수난이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며, 폭발적인 성장 이면에 드리워진 성과주의와 문화적 오만에 대한 아픈 성찰의 과정이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 선교는 세계 기독교 지형의 급격한 변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또 한 번의 거대한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본 강의안은 이 경이롭고도 복잡다단한 한국 선교의 대장정을 세 개의 주요 시기로 나누어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첫째, '받는 선교'의 시대: 선교사의 수용과 한국 교회의 형성기이다. 굳게 닫혔던 조선의 문을 열고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의 '총체적 접근' 방식이 어떻게 한국 사회의 마음을 얻었으며, 1907년 평양 대부흥을 통해 복음이 어떻게 한국인의 심장에 뿌리내리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둘째, '보내는 선교'의 시대: 한국 교회의 파송과 발전기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시련이 어떻게 역설적으로 한국 교회의 선교적 열정을 벼려냈으며, 1970년대 이후의 폭발적인 부흥이 어떻게 세계를 향한 선교사 파송의 동력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 선교의 강점과 약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셋째, '더불어 하는 선교'의 시대: 현대 타문화권 선교의 사례와 과제이다. 필리핀의 도시 빈민 사역, 중앙아시아의 비즈니스 선교(BAM), 그리고 탈기독교화된 유럽을 향한 선교 등, 구체적인 타문화권 사례를 통해 오늘날 한국 선교가 어떻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나아가, 선교의 패러다임이 '서구에서 나머지 세계로'가 아닌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전환된 21세기 속에서, 한국 선교가 '선교 강국'이라는 자만심을 넘어 진정한 '동반자적 선교'로 성숙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과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역사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한국 교회의 선교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살아있는 이야기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받은 불꽃을 이제 온 세상을 밝히는 횃불로 들어야 할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는 신학적, 역사적 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다.

제1부 받는 선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다 (c. 1884-1945)
19세기 말, 조선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쇄국 정책으로 인해 서구 세계에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의 기억이 생생했던 이 땅에 개신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피와 초기 선교사들의 지혜롭고 희생적인 헌신이 있었다.

1.1. 문을 열기 위한 핏자국: 초기 접촉과 순교
한국 개신교 선교의 공식적인 시작은 1884년과 1885년으로 기록되지만, 그 이전부터 복음의 문을 열기 위한 눈물겨운 시도들이 있었다. 1832년 독일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충청도 해안에 잠시 머물며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전했고, 1866년에는 영국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다 배가 불타자, 강가로 헤엄쳐 나와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다 순교했다. 특히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 직전 성경을 건넨 박춘권이라는 소년이 훗날 평양 지역의 중요한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 성경을 찢어 벽지로 사용했던 박영식의 집이 훗날 평양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인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고 교회의 씨앗이 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1.2. 의료와 교육: 마음의 문을 연 총체적 선교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수교 조약을 맺으면서 마침내 선교의 문이 열렸지만, 여전히 서양 종교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던 상황에서 초기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복음 전파 대신 의료와 교육이라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조선인의 마음을 얻는 지혜로운 전략을 택했다.

의료 선교: 몸을 고쳐 마음을 열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이 칼에 찔려 죽어가던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살려낸 사건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감명받은 고종 황제는 서양식 병원 설립을 허가했고, 1885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으로 개칭)이 탄생했다. 알렌을 비롯한 에비슨, 스크랜턴 등의 의료 선교사들은 전염병 퇴치와 공중위생 개선에 헌신하며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특히 1895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에비슨 선교사는 '쥐 귀신' 때문이라 믿던 백성들에게 위생의 중요성을 알리고 소금물 요법과 같은 획기적인 치료법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이러한 헌신적인 의료 사역은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적대감을 허물고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을 여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였다.  

교육 선교: 민족의 미래를 열다: 의료와 함께 교육은 초기 선교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이었다.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는 고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여 훗날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된 경신학교를 세웠고, 같은 해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의 문을 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여성 교육에 대한 선교사들의 공헌이다.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기던 유교 사회에서,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선교사는 1886년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이화학당을 시작하여, 한국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잠재력을 일깨우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학교들은 단순히 서구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성경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며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어주었고,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남녀평등 사상을 고취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은 영혼 구원과 인간의 삶을 분리하지 않는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를 실천했다. 그들은 병원과 학교를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삶으로 증명했고, 이는 한국 교회가 초기부터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갖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3. 네비우스 선교 정책: 자립하는 교회의 DNA를 심다
초기 한국 교회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일찍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 중 하나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Plan)의 채택에 있다. 1890년, 한국을 방문한 중국 선교사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는 선교사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재정을 지원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현지 교회의 의존성을 키우고 자립을 막는다고 비판하며, '3자 원리'(Three-Self Formula)에 기초한 새로운 선교 정책을 제안했다.

자립(Self-support): 교회는 처음부터 재정적으로 선교부에 의존하지 않고, 신자들 자신의 헌금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자치(Self-government): 교회는 선교사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지도자(조사, 장로)들에 의해 스스로 다스려져야 한다.

자전(Self-propagation): 복음 전파는 선교사의 주된 과업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이다. 모든 신자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비량 전도인'이 되어야 한다.

1893년 한국의 초기 선교사 협의회는 이 네비우스 정책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 결정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는 교회를 직접 다스리는 '목사'가 아니라, 순회하며 지도자들을 훈련하고 격려하는 '조언자'의 역할을 했다. 교회 건축부터 사역자 생활비까지 모든 것을 한국인들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이는 초기에는 더디고 힘든 길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서고, 스스로 성장하며, 스스로 복음을 전파하는 강력하고 자립적인 공동체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모든 신자가 선교사'라는 네비우스 정책의 정신은 훗날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영적 DNA가 되었다.

1.4. 1907년 평양 대부흥: 성령의 불로 거듭나다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과 네비우스 정책이라는 구조 위에 부어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바로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다. 당시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가 왕성하게 성장하던 도시였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남자 사경회 기간 동안, 선교사들의 인도로 시작된 회개 기도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로 이어졌다. 길선주 장로가 수많은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친구의 재산을 가로챈 죄 등)를 눈물로 공개적으로 자백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에 사로잡혀 자신의 죄를 통곡하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도둑질, 간음, 증오 등 숨겨왔던 죄악들이 터져 나왔고, 밤새도록 이어진 회개와 용서의 기도는 평양 시내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부흥의 불길은 평양을 넘어 전국으로, 심지어 만주와 중국에까지 번져나갔다. 평양 대부흥은 몇 가지 중요한 선교적 유산을 남겼다.
첫째,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이 비로소 한국인들의 심장 깊숙이 뿌리내리는 '영적 토착화'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 철저한 회개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의 핵심임을 보여주었다.
셋째, 부흥은 곧 선교적 열정의 폭발로 이어졌다. 부흥을 체험한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고, 이는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넷째, 이 부흥은 나라를 잃어가는(을사늑약 1905년) 민족적 절망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강력한 영적 각성을 가져다주었다.

이처럼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가 단순히 '받는 교회'에서 벗어나, 성령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정결케 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영적 동력을 얻게 된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제2부 보내는 선교: 고난을 넘어 세계로 (c. 1912-1990)
1907년 대부흥을 통해 내적인 동력을 얻은 한국 교회는 곧바로 '보내는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그리고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극심한 고난의 경험이 한국 교회의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벼려냈고, 세계 어느 교회도 갖지 못한 독특한 선교적 열정과 동력의 원천이 되었다.

2.1. 첫걸음: 고난 속에서 피어난 선교의 꽃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는 교회가 안정되고 부유해진 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어두운 시기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선교사 파송: 1907년 한국 장로교 독노회는 제주도 선교를 결의하고 이기풍 목사를 파송했다. 이는 동일 문화권 내에서의 선교였지만, 당시 제주도가 육지와는 매우 다른 문화와 정서를 가진 '오지'였다는 점에서 타문화권 선교의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2년, 한국 장로교 총회는 창립 첫해에 중국 산둥성으로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세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나라를 잃은(1910년 국권 피탈) 식민지 교회가, 자신들을 핍박하는 제국주의 국가보다 더 거대한 나라인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의 순교 신앙: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 강요라는 극심한 신앙적 시련에 직면했다.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거부하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했으며,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와 같은 순교자들의 '일사각오' 신앙은 한국 교회에 '고난받는 신앙',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의 유산을 깊이 새겨 넣었다. 이러한 순교 신앙은 훗날 한국 선교사들이 어떤 어려운 선교지에서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영적 자산이 되었다.

6.25 전쟁과 분단의 아픔: 해방의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은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었고 수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를 낳았다. 이 비극적인 경험은 한국 교회에 두 가지 상반된 그러나 강력한 신학적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적대감과 반공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하나는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형성된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이다. 또한,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실존적 불안감은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깝다'는 강력한 종말론적 신앙을 낳았고, 이는 "주님 오시기 전에 속히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의 긴급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2.2. 폭발적 성장과 선교 동력의 축적 (1960-1980년대)
전쟁의 폐허 위에서 한국 사회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한국 교회 역시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대표되는 메가처치(Mega-church) 현상과 '엑스플로 '74', '77 민족복음화대성회'와 같은 대규모 전도 집회로 상징된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의 동력은 여러 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새벽기도와 뜨거운 영성: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모여 부르짖어 기도하는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 특유의 영성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뜨거운 기도와 열정적인 신앙은 교회 성장의 강력한 엔진이었다.

기복신앙과 번영신학: 가난과 고통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메시지는 강력한 호소력을 가졌다. 비록 물질적, 현세적 축복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기복신앙적 요소가 대중을 교회로 이끄는 중요한 동인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강력한 목회 리더십과 평신도 동원: 카리스마 넘치는 목회자의 리더십 아래, 모든 평신도들이 전도와 봉사에 동원되는 '총력전도' 시스템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가속화했다.

이 시기의 폭발적인 교회 성장은 세계 선교를 위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축적하는 과정이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선교사로 헌신했고, 성장한 교회들은 이들을 파송하고 후원할 재정적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한국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를 창립한 것은, 이제 한국 교회가 본격적으로 세계 선교의 무대에 나서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2.3. 보내는 선교의 특징과 비판적 성찰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 교회의 선교사 파송은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1979년 93명에 불과했던 선교사 수는 1990년 1,645명, 2000년 8,103명, 그리고 2010년대에는 2만 명을 훌쩍 넘어서며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한국 선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강점:

뜨거운 열정과 헌신: 한국 선교사들은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력한 기도와 헌신, 그리고 순교를 각오하는 영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공격적인 교회 개척: 한국 교회 성장 모델을 바탕으로,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신자 수를 늘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풍부한 재정 지원: 한국 교회 성도들의 희생적인 헌금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약점과 비판: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 이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과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성과주의와 외형주의: 선교의 성공을 교회 건물 수나 세례 교인 수와 같은 가시적인 숫자로 평가하려는 '성과주의' 경향이 강했다. 이는 장기적인 안목의 제자 훈련이나 지도자 양성보다는 단기적인 결과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개교회주의와 경쟁: 교단이나 선교 단체 간의 협력보다는 개별 교회가 독자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경쟁적으로 사역하는 '개교회주의'가 팽배했다. 이는 자원의 중복과 낭비를 낳고, 선교지에서 한국 선교사들 간의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문화적 둔감성과 일방주의: 한국 교회의 성공 모델(새벽기도, 철야기도, 총력전도 등)을 현지 문화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이식하려는 '일방주의적' 태도가 강했다. 이는 현지인들에게 기독교가 '한국 문화'와 동일시되는 오해를 낳고, 문화적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물량주의와 의존성 심화: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한 '물량주의' 선교는 현지 교회가 재정적으로 한국 교회에 의존하게 만들어, 네비우스 정책의 핵심이었던 '자립' 정신을 훼손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선교계 내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선교는 더 이상 '우리가 그들에게' 베푸는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동반자적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는 한국 선교가 양적 성장의 시대를 지나 질적 성숙의 시대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제3부 더불어 하는 선교: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 (c. 1990-현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선교의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기독교의 중심이 서구에서 남반구로 이동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는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도전을 제기했으며, 전통적인 선교사의 입국을 막는 '창의적 접근 지역'이 늘어났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한국 선교 역시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창의적이고 유연하며, 무엇보다 겸손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3.1. 전략의 진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접근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한국 선교는 다양한 전략적 진화를 시도하고 있다.

비즈니스 선교(Business as Mission, BAM): 전통적인 선교사 비자를 받기 어려운 이슬람권이나 공산권과 같은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통해 합법적으로 거주하며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고 복음을 전하는 BAM이 중요한 전략으로 부상했다. 한국 선교사들은 IT, 농업, 요식업, 교육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즈니스를 일으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며,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총체적 선교를 실천하고 있다.  

NGO와 전문인 선교: 의료, 교육, 구호 개발, 환경 등 전문 분야를 통해 사회에 봉사하는 NGO 활동이 중요한 선교의 통로가 되고 있다. 기독교 NGO들은 가난과 질병, 재난으로 고통받는 지역에서 국경을 넘어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치며, 말보다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한다. 또한, 교사, 의사, 엔지니어 등 자신의 전문 직업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전문인 선교사'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디아스포라 선교: 세계화로 인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750만 한인 '디아스포라'는 그 자체로 거대한 선교 자원이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능통한 한인 2세, 3세들은 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현지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또한, 전 세계에 세워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사회를 복음화하고, 나아가 제3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새로운 선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3.2. 타문화권 사역의 구체적 사례들
이러한 전략적 변화는 다양한 타문화권 현장에서 구체적인 열매를 맺고 있다.

사례 1: 필리핀 도시 빈민 사역 - 총체적 공동체 세우기
세계 3대 빈민 지역 중 하나인 필리핀 마닐라의 쓰레기 마을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단순히 교회를 세우는 것을 넘어, 지역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총체적 사역을 펼치고 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은혜 학교'와 같은 교육 시설을 세워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사랑의 집짓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 지역 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직업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교회는 단순히 주일에 예배드리는 장소를 넘어, 지역 사회의 희망의 중심지가 된다. 이는 구원이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공동체 전체의 회복을 포함한다는 '전인적 구원'의 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모델이다.  

사례 2: 중앙아시아 - 비즈니스를 통한 성육신적 접근
이슬람 문화가 강하고 종교 활동에 대한 감시가 심한 중앙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한 한국인 선교사 부부는 카페를 창업했다. 그들은 선교사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양질의 커피와 친절한 서비스, 그리고 편안한 문화 공간을 제공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카페는 점차 젊은이들이 모이는 지역의 명소가 되었고, 선교사 부부는 직원들을 고용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손님들과 자연스럽게 삶을 나누며 신뢰 관계를 쌓아갔다. 이러한 장기적인 관계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삶으로 보여주며,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이는 전통적인 방식의 선교가 불가능한 지역에서, 비즈니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성육신적'으로 현지인들의 삶 속에 들어가 복음의 씨앗을 심는 창의적 선교의 좋은 사례이다.

사례 3: 유럽 - 탈기독교 사회를 향한 문화 선교
과거 기독교의 심장이었지만 지금은 교회가 텅 비어가는 탈기독교화된 서유럽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곳에서 선교는 더 이상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거나 무관심한 것'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현지 대학가에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며 지성인들과 변증적 대화를 나누고, 예술과 음악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표현하며, 지역 사회의 필요를 채우는 봉사 활동을 통해 교회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또한, 유럽에 세워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현지인들을 위한 다문화 예배를 시도하며, 쇠퇴해가는 유럽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3.3. 미래를 향한 과제: 성숙한 동반자 관계를 향하여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우뚝 선 한국 교회는 이제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숙을 추구해야 할 중대한 과제 앞에 서 있다. 21세기 선교는 더 이상 '우리가 그들에게'라는 일방적인 구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동반자적 사역이 되어야 한다.

선교의 탈서구화와 동반자 관계: 기독교의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하면서, 선교는 더 이상 '서구에서 비서구로' 향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향하는 다중심적 운동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한국 선교는 과거 서구 선교가 범했던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선교의 주도권을 현지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과감히 이양하고, 그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존중하며 협력하는 '동반자적 선교'(Partnership Mission)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선교사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재정 지원을 넘어 영적, 인적 자원을 공유하며 함께 성장하는 성숙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자신학화'의 존중과 지원: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지 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서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로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을 정립하는 '자신학화'(Self-theologizing)를 이루도록 돕는 것이다. 한국적 토양에서 한국 신학이 꽃피웠듯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의 교회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신학적 통찰로 세계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국내외적 도전과 선교적 교회의 재정립: 밖으로는 이슬람의 부상, 종교 다원주의의 확산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안으로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탈종교화,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추락, 다음 세대의 이탈과 같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선교가 더 이상 '해외'에만 국한된 특별한 활동이 아님을 일깨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모든 곳이 선교지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라는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로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요구된다. 우리 곁에 와 있는 260만 명의 이주민들을 섬기고, 사회의 불의에 맞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실천하며, 파괴되어 가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모든 삶이 곧 선교가 되어야 한다.  

결론: 미완의 과업, 새로운 부르심
한 세기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한국 교회는 선교의 수혜자에서 세계 선교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여정을 걸어왔다.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사랑과 총체적 접근, 네비우스 정책이 심어준 자립 정신, 그리고 평양 대부흥의 영적 동력은 한국 교회가 고난의 역사를 딛고 일어서는 굳건한 반석이 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어난 뜨거운 기도와 종말론적 열정은 20세기 후반 세계를 향한 선교사 파송의 폭발적인 에너지로 분출되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21세기 한국 선교는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할 수 없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 성과주의와 개교회주의의 낡은 옷을 벗고, 겸손과 섬김, 협력과 동반자 정신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할 때이다. 선교의 목표는 더 이상 우리의 교회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과 방언 가운데 하나님의 총체적인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것이다.  

필리핀의 쓰레기 마을에서, 중앙아시아의 작은 카페에서, 그리고 탈기독교화된 유럽의 거리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이미 이 새로운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 선교의 미래가 더 이상 파송하는 선교사의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깊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육신적으로 살아내는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받은 불꽃을 횃불로 들어 올렸던 지난 세기의 영광을 넘어, 이제는 그 횃불을 나누어 온 세상이 함께 빛을 발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미완의 과업이자 새로운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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