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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전문인 선교학 49 과정

전도의 정의, 목적, 방법론, 성령의 역할

전도론 및 교회 개척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전도와 선교의 신학적 탐구

I. 서론: 모든 선교의 원천, 미시오 데이 (Missio Dei)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를 논함에 있어, 그 논의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는가는 전체 담론의 방향과 깊이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만약 전도와 선교를 교회의 성장이나 교세 확장을 위한 인간적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면, 그 방법론은 효율성과 가시적 성과에 치중하게 될 것이며, 그 목적은 조직의 유지와 확장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전도와 선교를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 이유로 이해한다면, 그 논의는 훨씬 더 깊은 신학적 수원(水源)에 닿아야만 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 선교학에 가장 심오하고 혁명적인 영향을 미친 개념은 바로 '하나님의 선교', 즉 '미시오 데이'(Missio Dei)이다. 이 개념은 전도와 선교의 주체, 기원, 그리고 궁극적 목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선교는 '교회의 선교'(Missio Ecclesiae)라는 틀 안에서 이해되었다. 이는 교회가 선교의 주체로서,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과업을 수행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교회의 적극적인 활동과 헌신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동시에 선교를 교회가 수행하는 여러 기능 중 하나로 축소시키거나, 인간의 전략과 자원, 성공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선교관은 때로 문화 제국주의적 과오를 범하거나, 가시적인 결과에 집착하여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52년 독일 빌링엔(Willingen)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를 기점으로 칼 바르트(Karl Barth), 게오르크 비체돔(Georg Vicedom)과 같은 신학자들을 통해 Missio Dei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Missio Dei는 '하나님의 보내심' 또는 '하나님의 파송'을 의미하는 라틴어로서,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선언하는 신학적 명제이다. 즉, 선교는 교회가 시작한 활동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세상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보내시는(self-sending)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역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교회의 선교는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라, 이미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발견되고, 부름받아,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의 '무엇'과 '어떻게'를 논하기 이전에, 선교가 '왜'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Missio Dei의 신학적 구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인 파송 관계 속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성경은 성부께서 독생자이신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증언한다(요 3:16; 갈 4:4). 성자의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을 교회에, 그리고 세상에 보내셨다(요 14:26, 15:26). 이제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보내신다(행 1:8). 이처럼 성부로부터 시작되어 성자를 통해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적용되며 교회를 통해 확장되는 이 거대한 파송의 흐름이야말로 선교의 본질이다. 이러한 이해는 선교를 인간 중심의 성과주의적 활동에서 하나님 중심의 존재론적 참여로 전환시킨다. 교회의 역할은 새로운 선교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일에 겸손히 '동참'하는 것이다. 이 통찰은 선교 현장에서의 공격적인 정복이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닌, 겸손한 경청, 섬김,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민감성을 핵심적인 선교적 덕목으로 부각시킨다.

따라서 본 보고서는 이 Missio Dei라는 광대하고 근원적인 신학적 틀 위에서 전도와 선교를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전도'와 '선교'라는 용어의 성경적, 신학적 의미를 해부하고, 대위임령을 비롯한 성경적 기초를 재조명할 것이다. 이어서, 선교의 궁극적 목적이 단순히 영혼 구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음을 논증할 것이다. 다음으로,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며 전개되어 온 선교의 방법론들을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현대적 접근법들을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선교의 과정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할을 심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전도와 선교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는 신적 사역임을 밝힐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본 보고서는 전도와 선교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드라마에 참여하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특권이자 본질적인 정체성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II. 본질과 성경적 기초: '전도'와 '선교'의 정의
전도와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것을 지칭하는 용어들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분석에서 시작된다. '전도'와 '선교'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그 어원과 신학적 함의, 그리고 성경적 용례를 깊이 탐구할 때 우리는 그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신약성경의 핵심 용어들을 분석하여 전도와 선교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전도'와 '선교'의 관계를 규명한 후, 이 모든 활동의 근거가 되는 성경적 위임, 특히 대위임령과 사도행전의 동력을 다각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A. 용어의 해부: 어원과 신학적 함의
신약성경은 복음 전파와 관련된 활동을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지 않고, 다양한 용어를 통해 그 다채로운 측면들을 드러낸다. 이 용어들은 각각 전도와 선교의 내용, 행위, 성격, 그리고 목표를 보여주는 중요한 창이다.

첫째, '유앙겔리온'(ϵυαγγϵλιoν)은 '복음' 또는 '기쁜 소식'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핵심 메시지, 즉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이 기쁜 소식은 추상적인 교리나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선포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 장사된 지 사흘 만의 부활, 승천, 그리고 만물의 왕으로 다시 오실 재림을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소식이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명확히 요약하듯,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다. 따라서 모든 전도와 선교는 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유앙겔리온'을 그 내용으로 삼지 않는 한, 그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둘째, '케리그마'(κηρυγμα)는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단어의 동사형인 '케륏소'(κηρυσσω)는 고대 사회에서 왕의 명령이나 중요한 소식을 대중에게 공적으로, 권위 있게 외치는 전령(herald)의 행위에서 유래했다. 이는 복음 선포가 개인적인 의견이나 철학적 사색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구원 칙령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공적인 행위임을 시사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는 '케리그마'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들은 군중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며 회개와 믿음을 촉구했다. 따라서 전도는 본질적으로 이 '케리그마'적 차원, 즉 복음의 내용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셋째, '마르튀리아'(μαρτυρια)는 '증거' 또는 '증언'을 의미하며, 전도와 선교의 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 단어는 법정에서 증인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에 대해 증언하는 모습에서 파생되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마르튀리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한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나누는 행위였다. 이는 단순히 교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복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로 증언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법적 증인이자, 그 능력의 체험적 증인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 순교자를 의미하는 'martyr'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궁극적인 증언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임을 보여준다.

넷째, '마테튜오'(μαθητϵυω)는 '제자를 삼다'라는 뜻으로, 전도와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단지 회심자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 인격적으로 따르는 제자를 양육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지식 전달 중심의 '교육'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전인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의 대위임령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명령함으로써, 선교의 핵심 과업이 바로 이 '마테튜오'임을 명확히 한다. 이는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성경적 용어들을 바탕으로 한국어 '전도(傳道)'와 '선교(宣敎)'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 '전도'는 문자 그대로 '도를 전한다'는 의미로, 주로 지역적, 개인적 차원에서 복음의 내용('유앙겔리온')을 선포하고('케리그마'), 간증하는('마르튀리아')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선교'는 '가르침을 편다'는 의미로,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즉 '제자를 삼는'('마테튜오') 포괄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전도와 선교는 Missio Dei라는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스펙트럼이다. 모든 선교 활동은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전도를 핵심 요소로 포함하며, 모든 개인적 전도는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선교적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

B. 성경적 위임: 대위임령과 사도행전의 동력
교회의 전도와 선교 사명은 인간의 열정이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명백하고도 권위 있는 위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복음서의 말미와 사도행전의 서두에 기록된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은 교회가 왜 선교적 공동체여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제공한다.

대위임령은 흔히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말씀으로 대표되지만, 사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각각 다른 각도에서 이 위대한 사명을 조명하며 풍성한 의미를 드러낸다. 마태복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 선포로 시작한다. 이는 교회의 선교가 연약한 인간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시고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세에 힘입어 수행되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권세를 바탕으로 교회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업의 끝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임재의 약속이 주어진다. 즉, 마태복음의 대위임령은 그리스도의 '권세'에 근거하여, '제자 삼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의 임재'를 약속받는 선교의 총체적 그림을 제시한다.

누가복음과 그 후편인 사도행전은 선교의 구속사적 맥락과 동력을 강조한다. 누가복음 24장 46-49절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필연적 사건임을 밝히고, 이 사건에 근거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사도행전 1장 8절은 이 과업이 어떻게 수행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는 선교의 동력이 인간의 계획이나 조직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뒤나미스)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라는 지리적 확장의 순서는 선교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 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20장 21절은 선교의 본질을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내는 구절 중 하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말씀은 교회의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히 그의 성육신(incarnation)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자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죄 많은 인간 세상 속으로 들어와 그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듯이, 교회 역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공동체'로서 세상의 언어와 삶의 방식으로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는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를 제시한다.

이처럼 대위임령은 단순히 교회가 수행해야 할 여러 '과제 목록' 중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권 선포에 기반한 '권능의 위임'이자, 교회의 '정체성 부여'이다. 교회는 선교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상 '선교적 존재'(The Church is missionary by its very nature)이다. 교회는 '보냄 받은 공동체'이며, 선교는 교회가 하는 여러 활동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 그 자체이다. 이러한 이해는 선교의 책임을 특정 부서(선교 위원회)나 특정인(선교사)에게만 국한시키는 편협한 교회론을 극복하게 한다. 목회, 교육, 예배, 구제, 친교 등 교회의 모든 사역은 본질적으로 선교적 차원을 가져야 하며,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보냄 받은 자', 즉 선교사로 부름받았다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비전으로 나아가게 한다.

사도행전은 이 대위임령이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선교 교과서'이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한 교회의 탄생, 스데반의 순교와 이어진 박해를 통한 복음의 지리적 확산,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베드로의 고넬료 회심을 통한 이방인 선교의 문 개방,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계획적이고 전략적인 타문화권 선교 여행 등은 선교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선교가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하심 아래, 수많은 장애물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의 드라마임을 증거한다.

III. 궁극적 지향점: 선교의 목적과 목표
모든 의미 있는 활동은 그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의해 그 가치와 방향이 결정된다.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선교의 목적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선교의 동기, 방법, 평가 기준이 달라진다. 만약 선교의 목적을 단순히 교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나 특정 교파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축소시킨다면, 선교는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경쟁의 논리에 빠지기 쉽다. 성경이 제시하는 선교의 목적은 그보다 훨씬 더 광대하고 심오하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나라를 확장하며, 깨어진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우주적 차원을 포함한다.

A.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Soli Deo Gloria)
선교의 가장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목적은 모든 민족과 족속, 방언과 백성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으로 '독솔로지(Doxology, 송영)'적 동기라고 불린다. 시편 기자는 "그의 영광을 모든 민족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시 96:3)라고 노래했으며,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했다(롬 15:9-11).

현대의 신학자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 개념을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다. 예배가 궁극적 목적이다.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통찰력 있는 말로 요약했다. 이 말의 의미는, 선교 활동 자체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 온 열방이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예배하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것이다. 현재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수많은 민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 또한 참된 예배자의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하는 활동, 즉 선교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선교의 성공은 얼마나 많은 교회를 개척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로 세워졌느냐로 측정되어야 한다. 이 관점은 선교사에게 단기적인 성과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영원하고 변치 않는 목표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더 나아가, 선교는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가운데서 더럽혀지고 모독당하는 현실을 바로잡고, 그의 거룩하심과 주권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이다. 구약의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 상태에서 구원하시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낌이라"(겔 36:22-23)고 선언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주된 동기는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회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의 선교는 죄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는 거룩한 사역이다.

B. 화해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궁극적 목적 아래, 선교는 몇 가지 구체적이고 중요한 목표들을 추구한다. 그 핵심에는 '화해'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선교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고 말한다. 이것이 '수직적 화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었다. 전도는 바로 이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초청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화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화해는 필연적으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세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수평적 화해'로 이어진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선교는 인종, 민족, 계급, 성별의 장벽을 넘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화해의 공동체,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은 복음 전도와 분리된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화해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본질적인 선교 활동이다.

둘째, 선교는 '하나님 나라'(βασιλϵια τoυ Θϵoυ)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나라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핵심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사후에 가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임하는 모든 영역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치유와 축사,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행동을 통해 그 나라가 이미 이 땅에 현재적으로 임했음을 보여주셨다. 선교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교회를 통해 그 나라의 가치, 즉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을 부분적으로나마 세상에 보여주는 예표(sign)이자 도구(agent)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선교의 범위를 개인의 영혼 구원을 넘어 사회적,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선교의 목적이 단순히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에만 국한된다면, 사회 구조적인 악이나 경제적 불평등, 환경 파괴와 같은 문제에 무관심해지기 쉽다. 그러나 선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의 모든 영역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환경 등 모든 분야가 선교의 대상이 된다. 이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하거나 대립시키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의 강력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병원을 세워 병든 자를 고치고, 학교를 지어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며, 독재에 저항하여 인권을 수호하고, 파괴된 자연을 회복시키는 행위는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이나 '미끼'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본질적인 선교 활동이다. 1974년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은 이러한 통합적 이해를 "복음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우리 기독교적 의무의 두 부분"이라고 명시하며 현대 복음주의 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셋째, 선교의 중요한 중간 목표는 각 문화권 안에 지속 가능한 지역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선교는 흩뿌려지는 씨앗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나무,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워져야 한다. 교회는 선교의 열매인 동시에, 그 지역에서 새로운 선교를 감당하는 전초기지(base)가 된다. 따라서 선교는 단순히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을 넘어, 그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양육받으며, 서로를 돌보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는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교는 종말론적(Eschatological) 중요성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셨다. 이는 교회의 선교가 역사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계획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날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구원이 있도다"(계 7:9-10)라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선교는 바로 이 종말론적 예배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IV.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실천: 선교의 방법론
선교의 본질과 목적이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론은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선교 방법론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교회가 복음과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자기 이해의 변화를 추적하는 과정이다. 이 장에서는 역사적 변천을 통해 선교 패러다임의 변화를 살펴보고, 현대 선교의 주요 접근법과 그 신학적 원리를 분석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선교 방법론이 직면하는 상황화와 윤리적 성찰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A. 역사적 변천으로 본 선교 패러다임
선교 방법론의 역사는 복음이 어떻게 다양한 문화와 만나고 상호작용하며 확장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파노라마이다.

초대교회 시대(Apostolic Era, 약 30-400년)의 선교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이나 전문적인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의 자발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증거(martyria)를 통해 이루어졌다. 상인, 군인, 노예 등 다양한 계층의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웃에게 복음을 나누고,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강력한 선교 방법이었다. 로마 제국의 잘 닦인 도로망과 공용어(코이네 헬라어)는 복음 확산의 물리적 기반이 되었지만, 그 확산의 동력은 제도나 전략이 아닌, 공동체의 진정성 있는 삶과 성령의 능력이었다. 특히, 박해는 교회를 위축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흩어지는 성도들을 통해 복음이 새로운 지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시대의 선교는 교회가 '유기적 공동체'로서 존재 그 자체로 복음을 증거했음을 보여준다.

중세 시대(Medieval Period, 약 400-1500년)에 접어들면서 선교는 두 가지 상반된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Monastic Missions)을 중심으로 한 성육신적 접근이다. 패트릭(Patrick)과 같은 켈트 선교사들은 아일랜드의 토착 문화와 언어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복음을 전했으며, 수도원을 학문과 영성, 그리고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반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 서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Christendom)로 자리 잡으면서, 국가 권력과 결합된 강제적인 선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샤를마뉴 대제의 군사적 정복과 강제 개종,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폭력성은 선교가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정치적, 군사적 팽창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이다. 이는 교회가 스스로를 '제도적 권력'으로 이해할 때 발생하는 선교의 왜곡을 명확히 보여준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만인제사장설 등을 통해 모든 성도의 선교적 책임을 일깨울 신학적 잠재력을 가졌으나, 초기 개혁가들은 주로 유럽 내부의 개혁에 집중하여 해외 선교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는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으며, 1792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가 "이방인의 회심을 위해 그리스도인이 사용할 수단에 대한 탐구"라는 책을 출판하고 선교회를 조직하면서 '근대 선교의 시대'가 열렸다.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구호 아래, 성경 번역, 교육, 의료, 사회 개혁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포괄적인 선교를 주창했다. 이후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중국내지선교회와 같이 수많은 자발적인 선교 단체(parachurch organizations)가 등장하여 전 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선교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과 시기적으로 맞물리면서, 선교가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전파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복음을 '문명화의 빛'으로 이해하는 계몽주의적 시각이 투영된 결과로, 선교의 순수한 동기가 시대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20세기 이후,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식민지들의 독립을 거치면서 선교 패러다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과거 '선교지'로 여겨졌던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 남반구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선교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선교는 '서구(the West)에서 나머지(the Rest)로' 향하는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from everyone to everywhere)' 향하는 다방향적인 흐름이 되었다. 한국, 브라질, 나이지리아와 같은 비서구 국가들이 새로운 선교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선교의 주도권과 중심이 서구에서 비서구 교회로 이동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이는 선교가 특정 문화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편적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다.

B. 현대적 접근과 신학적 원리
이러한 역사적 성찰과 변화된 상황 속에서 현대 선교는 다양한 접근법들을 발전시켜왔다. 이 방법론들은 과거의 오류를 극복하고, 보다 성경적이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신학적 고민의 산물이다.

첫째, '성육신적 선교(Incarnational Miss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선교의 궁극적인 모델로 삼는 접근법이다. 이는 선교사가 자신의 문화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선교지의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동참하면서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을 강조한다. 단순히 외부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방문객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진정한 관계를 맺고 섬기는 것을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과거 제국주의적 선교가 가졌던 '위에서 아래로(top-down)'의 접근을 비판하고, 겸손과 섬김을 바탕으로 한 '아래로부터(bottom-up)'의 선교를 지향한다.

둘째, '총체적 선교(Holistic/Integral Mission)'는 복음 선포(proclamation)와 사회적 섬김(social action)을 분리할 수 없는 복음의 양 날개로 이해하는 접근법이다. 이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분화하는 헬라적 사고를 극복하고, 인간의 영적, 육체적, 사회적, 정서적 필요를 모두 아우르는 전인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히브리적 사고에 기반한다. 총체적 선교는 가난, 질병, 불의, 억압과 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맞서 싸우는 것을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본질적인 선교 활동으로 간주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통합적인 증거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셋째, '교회 개척 운동(Church Planting Movements, CPM)'은 특정 지역이나 종족 집단 내에서 빠른 속도로 자생하고 자가 번식하는 토착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적 접근이다. 이 방법론은 외부 선교사의 역할이 교회를 직접 세우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 지도자를 발굴하고 훈련시켜 그들이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고 또 다른 지도자를 양육하도록 돕는 촉매(catalyst) 역할에 있음을 강조한다. 단순하고 재생산 가능한 제자훈련 모델을 통해, 외부의 재정적, 인적 자원에 대한 의존성을 최소화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형태로 복음이 자생적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넷째, '디지털 선교(Digital/Online Mission)'는 21세기의 새로운 상황에 부응하는 선교 방식이다. 인터넷, 소셜 미디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온라인 게임 등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하여 지리적, 정치적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하고, 온라인 공동체를 형성하며, 제자훈련을 실시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특히 복음 전도가 법적으로 금지된 창의적 접근 지역(Creative Access Nations)에서 디지털 선교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온라인 공간의 중요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디지털 선교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으며, 가상 공간에서의 성육신적 현존(incarnational presence)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미래의 선교 방법론을 논의할 때, 단순히 더 '효과적인' 기술이나 전략을 찾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각 시대의 방법론은 그 시대 교회가 복음, 교회,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믿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방법론은 항상 신학의 시녀여야 하며, 신학적 성찰이 결여된 방법론은 복음을 왜곡하고 선교의 본질을 훼손할 위험이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C. 상황화와 윤리적 성찰
모든 선교 방법론은 복음이라는 초월적 진리와 그것이 선포되는 구체적인 문화적 상황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긴장 관계를 신학적으로 다루는 개념이 바로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다.

상황화는 복음의 핵심 진리는 불변하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와 방식은 각 문화의 언어, 사상, 가치관, 세계관에 맞게 번역되고 표현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를 번역하는 것을 넘어, 복음이 수용자의 문화 속에서 의미 있게 이해되고, 그들의 삶의 질문에 답하며, 궁극적으로 그 문화에 깊이 '뿌리 내리도록' 돕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성공적인 상황화는 복음이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니라 '자신들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부족 문화 속에서는 '조상'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를 '모든 조상의 으뜸'으로 설명하거나, 동양의 공동체주의 문화 속에서는 개인의 결단뿐만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상황화의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상황화는 매우 신중한 신학적 분별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상황화가 도를 넘어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유일성,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역사성 등을 해당 문화의 비기독교적 세계관과 타협하거나 혼합시켜 변질시키는 위험이 있는데, 이를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한다. 예를 들어, 조상 숭배 문화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조상 중 한 명으로 받아들이거나, 다신론적 문화에서 예수를 여러 신들 중 가장 높은 신으로 섬기는 것은 혼합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는 복음의 초월성과 문화의 특수성 사이에서 창조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성경의 권위 아래 모든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변혁시키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방법론은 반드시 윤리적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가 범했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복음을 서구 문화와 동일시하여, 피선교지의 문화를 미개하고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며 파괴했던 문화적 제국주의였다. 또한, 물질적 원조나 사회적 지위를 미끼로 개종을 유도하거나, 기만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타 종교에 대한 비방과 공격을 통해 개종을 강요하는 행위는 복음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비윤리적인 '개종 강요(Proselytism)'이다. 진정한 기독교 선교는 타 종교와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을 바탕으로, 강압이 아닌 사랑과 섬김, 그리고 진실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사는 가르치는 자의 위치가 아니라 배우는 자의 자세로, 겸손하게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과거의 과오에 대한 진솔한 회개와 성찰 없이는, 미래의 선교는 그 진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V. 선교의 주체이신 성령: 역동적 능력의 근원
선교의 정의, 목적, 방법론에 대한 모든 신학적 논의는, 만약 선교의 실제적인 동력이신 성령의 역할을 간과한다면 공허한 이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Missio Dei의 관점에서 선교는 성부로부터 시작되어 성자를 통해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세상 속에서 구현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과정에서 성령은 단순한 조력자나 보조 동력이 아니라, 선교의 모든 국면을 주도하고 가능하게 하는 주권적인 행위자(Divine Agent)이시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증인을 무장시키는 성령의 능력, 마음을 열어 회심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사역, 그리고 교회를 세우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A. 증인을 무장시키는 능력 (Empowerment for Witness)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약속은 군대나 재물이 아닌, 바로 성령의 권능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구절은 선교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이 인간의 자격, 학식, 재능, 혹은 훈련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 부여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권능'으로 번역된 헬라어 '뒤나미스'(δυναμις)는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어원이 된 단어로, 폭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은 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두려움에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후에는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변화했다. 베드로는 수천 명의 유대인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외쳤다. 이 담대함은 인간적인 용기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의 결과였다. 또한 성령의 권능은 기적과 표적을 통해 복음의 진실성을 가시적으로 증명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병든 자를 고치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사도들의 사역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주었다.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성공적인 사역이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기인했음을 반복해서 고백한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고 밝혔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수사학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는 선교의 열매가 인간의 설득력이나 논리적 탁월함에 달려 있지 않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며, 그 약함 속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다. 이는 오늘날의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선교사의 가장 큰 자산은 유창한 언어 구사 능력이나 탁월한 전략 기획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고 그분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성이다.

B. 마음을 여는 사역 (The Work of Conversion)
선교사가 아무리 유창하게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할지라도,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다. 죄로 인해 어두워지고 완고해진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11)고 약속하셨다. '책망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엘렝코'(ϵλϵγχω)는 법정에서 검사가 증거를 제시하여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는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이 선포될 때,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의의 길임을 보게 하며,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하여 회개로 이끄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선교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역할을 할 뿐, 그 씨앗이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 즉 성령이심을 신뢰해야 한다(고전 3:6-7).

더 나아가, 성령은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중생(Regeneration)'의 사역을 통해 인간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부여하신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8)고 말씀하셨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어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믿을 수 없다.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그의 영을 거듭나게 하실 때에야 비로소 그는 복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엡 2:8). 이 진리는 선교사에게 큰 위로와 자유를 준다. 선교의 결과는 선교사의 능력이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고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 달려 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고 기록된 자주 옷감 장수 루디아의 회심은 이 원리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C. 교회를 세우고 인도하시는 성령 (Guidance and Ecclesial Formation)
성령의 역할은 개인의 회심에서 그치지 않는다. 성령은 회심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우시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지휘관의 역할을 하신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어떻게 선교의 방향과 전략을 직접 인도하시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고 그들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했다(행 13:2-4).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에는, 그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애썼으나 "성령이 허락하지 아니하셨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행 16:6-7). 결국 바울은 밤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계획을 넘어서는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따라서 효과적인 선교 전략은 인간의 시장 조사나 데이터 분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분별하고 순종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성령은 각 신자에게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복음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다양한 은사(카리스마타, χαρισματα)를 주신다. 가르치는 은사, 섬기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 등 다양한 은사들은 교회를 유기적으로 세우고, 각 지체가 자신의 역할에 맞게 선교적 사명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고전 12:4-11; 롬 12:6-8). 선교지에서 새로운 교회가 세워질 때, 성령은 외부의 도움 없이도 교회가 자립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토착 리더십을 세우고 각 지체에게 필요한 은사를 공급하신다. 선교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현지 성도들이 성령께서 주신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교회를 섬기도록 돕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교회가 복음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도록 보호하시고, 새로운 문화적 도전에 직면했을 때 진리를 분별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는 '진리의 영'이시다(요 16:13). 특히 복음을 다른 문화에 번역하고 적용하는 상황화의 과정에서, 무엇이 복음의 본질이고 무엇이 문화적 형태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때 성령께서는 공동체적 분별 과정(예: 예루살렘 공의회, 행 15장)을 통해 교회가 혼합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진리 안에서 하나 되도록 인도하신다.

이처럼 선교의 전 과정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강력한 성령론(Pneumatology)은 선교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불안과 조급함, 그리고 인간 중심적 성과주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신학적 해독제이다. 선교의 주도권이 '나'나 '우리 단체'가 아닌 성령께 있음을 깊이 내면화할 때, 선교사는 결과에 대한 과도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과정의 신실함에 집중할 수 있다. 성공은 나의 공이 아니며, 실패도 나의 책임만은 아니다. 나의 역할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신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 의존적인 영성은 선교를 고된 '프로젝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로 변화시키며, 선교사의 장기적인 영적 건강과 사역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VI. 결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
지금까지 본 보고서는 전도와 선교의 정의, 목적, 방법론, 그리고 성령의 역할이라는 네 가지 핵심 주제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거대한 신학적 틀 안에서 탐구하였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전도와 선교가 교회의 여러 선택 과업 중 하나가 아니라, 창세 전부터 시작되어 역사를 관통하며 종말에 완성될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사역에 교회가 부름받아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이자 본질적인 정체성임을 확인하였다.

결론적으로, 본 보고서의 핵심 논지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선교의 기원과 동력은 교회의 필요나 인간의 열정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보내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자기 파송적 사랑에 있다. 교회의 선교는 이 하나님의 선교로부터 파생되며, 그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 둘째, 전도와 선교는 복음('유앙겔리온')을 내용으로 하여, 그것을 공적으로 선포하고('케리그마'), 삶으로 증언하며('마르튀리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를 세우는('마테튜오') 통합적인 활동이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과 임재의 약속에 근거한 대위임령을 통해 교회에 부여된 존재 이유 그 자체이다. 셋째,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구원을 넘어, 온 열방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예배의 회복에 있다. 이 큰 목적 아래, 선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화해와 인간 및 피조세계와의 수평적 화해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선포하고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넷째, 선교의 방법론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해왔으며, 각 시대의 방법론은 그 시대 교회의 신학적 자기 이해를 반영한다. 현대 선교는 과거 제국주의적 과오를 반성하며, 성육신적, 총체적, 상황화된 접근을 통해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할 윤리적 책임을 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정의, 목적, 방법론은 선교의 주체이신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 안에서만 생명을 얻는다. 성령은 증인을 무장시키고, 완고한 마음을 열어 회심케 하시며, 교회를 세우고 선교의 전 과정을 인도하시는 역동적인 동력이시다.

이 네 가지 차원은 Missio Dei라는 중심축을 통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올바른 정의(하나님의 선교에의 참여)는 올바른 목적(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을 낳는다. 올바른 목적은 올바른 방법론(겸손한 성육신과 총체적 섬김)을 이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과 인도하심에 의존할 때에만 가능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소통 방식의 급변, 그리고 전 지구적 이주와 난민 문제 등 21세기의 복잡하고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Missio Dei와 성령 중심의 선교 패러다임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 과거와 같이 힘과 권위, 조직의 논리로 접근하는 선교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세상은 거대한 담론이나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삶과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을 보기 원한다.

따라서 미래의 선교는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답을 가진 자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 속에서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순례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미래의 선교는 더욱 진정성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말과 삶이 일치하는 총체적 증거를 통해 복음의 신뢰성을 회복해야 한다. 미래의 선교는 더욱 대화적이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선포하기에 앞서, 타문화와 타종교의 이야기에 깊이 경청하며 그들의 필요와 질문 속에서 복음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의 선교는 더욱 기도에 의존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전략과 계획을 내려놓고,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구하는 깊은 영성 없이는 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전도와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짐스러운 과제가 아니라, 창조주께서 그의 피조 세계를 회복하시는 위대한 드라마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사명이다.

성경적 전도 원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전도와 선교의 신학적 탐구

I. 서론: 모든 선교의 원천, 미시오 데이 (Missio Dei)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를 논함에 있어, 그 논의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는가는 전체 담론의 방향과 깊이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만약 전도와 선교를 교회의 성장이나 교세 확장을 위한 인간적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면, 그 방법론은 효율성과 가시적 성과에 치중하게 될 것이며, 그 목적은 조직의 유지와 확장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전도와 선교를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 이유로 이해한다면, 그 논의는 훨씬 더 깊은 신학적 수원(水源)에 닿아야만 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 선교학에 가장 심오하고 혁명적인 영향을 미친 개념은 바로 '하나님의 선교', 즉 '미시오 데이'(Missio Dei)이다. 이 개념은 전도와 선교의 주체, 기원, 그리고 궁극적 목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선교는 '교회의 선교'(Missio Ecclesiae)라는 틀 안에서 이해되었다. 이는 교회가 선교의 주체로서,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과업을 수행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교회의 적극적인 활동과 헌신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동시에 선교를 교회가 수행하는 여러 기능 중 하나로 축소시키거나, 인간의 전략과 자원, 성공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선교관은 때로 문화 제국주의적 과오를 범하거나, 가시적인 결과에 집착하여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52년 독일 빌링엔(Willingen)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를 기점으로 칼 바르트(Karl Barth), 게오르크 비체돔(Georg Vicedom)과 같은 신학자들을 통해 Missio Dei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Missio Dei는 '하나님의 보내심' 또는 '하나님의 파송'을 의미하는 라틴어로서,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선언하는 신학적 명제이다. 즉, 선교는 교회가 시작한 활동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세상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보내시는(self-sending)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역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교회의 선교는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라, 이미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발견되고, 부름받아,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의 '무엇'과 '어떻게'를 논하기 이전에, 선교가 '왜'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Missio Dei의 신학적 구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인 파송 관계 속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성경은 성부께서 독생자이신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증언한다(요 3:16; 갈 4:4). 성자의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을 교회에, 그리고 세상에 보내셨다(요 14:26, 15:26). 이제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보내신다(행 1:8). 이처럼 성부로부터 시작되어 성자를 통해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적용되며 교회를 통해 확장되는 이 거대한 파송의 흐름이야말로 선교의 본질이다. 이러한 이해는 선교를 인간 중심의 성과주의적 활동에서 하나님 중심의 존재론적 참여로 전환시킨다. 교회의 역할은 새로운 선교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일에 겸손히 '동참'하는 것이다. 이 통찰은 선교 현장에서의 공격적인 정복이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닌, 겸손한 경청, 섬김,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민감성을 핵심적인 선교적 덕목으로 부각시킨다.

따라서 본 보고서는 이 Missio Dei라는 광대하고 근원적인 신학적 틀 위에서 전도와 선교를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전도'와 '선교'라는 용어의 성경적, 신학적 의미를 해부하고, 대위임령을 비롯한 성경적 기초를 재조명할 것이다. 이어서, 선교의 궁극적 목적이 단순히 영혼 구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음을 논증할 것이다. 다음으로,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며 전개되어 온 선교의 방법론들을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현대적 접근법들을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선교의 과정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할을 심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전도와 선교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는 신적 사역임을 밝힐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본 보고서는 전도와 선교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드라마에 참여하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특권이자 본질적인 정체성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II. 본질과 성경적 기초: '전도'와 '선교'의 정의
전도와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것을 지칭하는 용어들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분석에서 시작된다. '전도'와 '선교'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그 어원과 신학적 함의, 그리고 성경적 용례를 깊이 탐구할 때 우리는 그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신약성경의 핵심 용어들을 분석하여 전도와 선교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전도'와 '선교'의 관계를 규명한 후, 이 모든 활동의 근거가 되는 성경적 위임, 특히 대위임령과 사도행전의 동력을 다각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A. 용어의 해부: 어원과 신학적 함의
신약성경은 복음 전파와 관련된 활동을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지 않고, 다양한 용어를 통해 그 다채로운 측면들을 드러낸다. 이 용어들은 각각 전도와 선교의 내용, 행위, 성격, 그리고 목표를 보여주는 중요한 창이다.

첫째, '유앙겔리온'(ϵυαγγϵλιoν)은 '복음' 또는 '기쁜 소식'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핵심 메시지, 즉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이 기쁜 소식은 추상적인 교리나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선포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 장사된 지 사흘 만의 부활, 승천, 그리고 만물의 왕으로 다시 오실 재림을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소식이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명확히 요약하듯,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다. 따라서 모든 전도와 선교는 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유앙겔리온'을 그 내용으로 삼지 않는 한, 그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둘째, '케리그마'(κηρυγμα)는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단어의 동사형인 '케륏소'(κηρυσσω)는 고대 사회에서 왕의 명령이나 중요한 소식을 대중에게 공적으로, 권위 있게 외치는 전령(herald)의 행위에서 유래했다. 이는 복음 선포가 개인적인 의견이나 철학적 사색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구원 칙령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공적인 행위임을 시사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는 '케리그마'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들은 군중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며 회개와 믿음을 촉구했다. 따라서 전도는 본질적으로 이 '케리그마'적 차원, 즉 복음의 내용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셋째, '마르튀리아'(μαρτυρια)는 '증거' 또는 '증언'을 의미하며, 전도와 선교의 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 단어는 법정에서 증인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에 대해 증언하는 모습에서 파생되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마르튀리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한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나누는 행위였다. 이는 단순히 교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복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로 증언하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법적 증인이자, 그 능력의 체험적 증인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 순교자를 의미하는 'martyr'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궁극적인 증언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임을 보여준다.

넷째, '마테튜오'(μαθητϵυω)는 '제자를 삼다'라는 뜻으로, 전도와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단지 회심자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 인격적으로 따르는 제자를 양육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지식 전달 중심의 '교육'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전인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의 대위임령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명령함으로써, 선교의 핵심 과업이 바로 이 '마테튜오'임을 명확히 한다. 이는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성경적 용어들을 바탕으로 한국어 '전도(傳道)'와 '선교(宣敎)'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 '전도'는 문자 그대로 '도를 전한다'는 의미로, 주로 지역적, 개인적 차원에서 복음의 내용('유앙겔리온')을 선포하고('케리그마'), 간증하는('마르튀리아')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선교'는 '가르침을 편다'는 의미로,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즉 '제자를 삼는'('마테튜오') 포괄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전도와 선교는 Missio Dei라는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스펙트럼이다. 모든 선교 활동은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전도를 핵심 요소로 포함하며, 모든 개인적 전도는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선교적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

B. 성경적 위임: 대위임령과 사도행전의 동력
교회의 전도와 선교 사명은 인간의 열정이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명백하고도 권위 있는 위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복음서의 말미와 사도행전의 서두에 기록된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은 교회가 왜 선교적 공동체여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제공한다.

대위임령은 흔히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말씀으로 대표되지만, 사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각각 다른 각도에서 이 위대한 사명을 조명하며 풍성한 의미를 드러낸다. 마태복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 선포로 시작한다. 이는 교회의 선교가 연약한 인간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시고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세에 힘입어 수행되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권세를 바탕으로 교회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업의 끝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임재의 약속이 주어진다. 즉, 마태복음의 대위임령은 그리스도의 '권세'에 근거하여, '제자 삼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의 임재'를 약속받는 선교의 총체적 그림을 제시한다.

누가복음과 그 후편인 사도행전은 선교의 구속사적 맥락과 동력을 강조한다. 누가복음 24장 46-49절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필연적 사건임을 밝히고, 이 사건에 근거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사도행전 1장 8절은 이 과업이 어떻게 수행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는 선교의 동력이 인간의 계획이나 조직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뒤나미스)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라는 지리적 확장의 순서는 선교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 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20장 21절은 선교의 본질을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내는 구절 중 하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말씀은 교회의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히 그의 성육신(incarnation)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자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죄 많은 인간 세상 속으로 들어와 그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듯이, 교회 역시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공동체'로서 세상의 언어와 삶의 방식으로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는 성육신적 선교의 원리를 제시한다.

이처럼 대위임령은 단순히 교회가 수행해야 할 여러 '과제 목록' 중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권 선포에 기반한 '권능의 위임'이자, 교회의 '정체성 부여'이다. 교회는 선교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상 '선교적 존재'(The Church is missionary by its very nature)이다. 교회는 '보냄 받은 공동체'이며, 선교는 교회가 하는 여러 활동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 그 자체이다. 이러한 이해는 선교의 책임을 특정 부서(선교 위원회)나 특정인(선교사)에게만 국한시키는 편협한 교회론을 극복하게 한다. 목회, 교육, 예배, 구제, 친교 등 교회의 모든 사역은 본질적으로 선교적 차원을 가져야 하며,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보냄 받은 자', 즉 선교사로 부름받았다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비전으로 나아가게 한다.

사도행전은 이 대위임령이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선교 교과서'이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한 교회의 탄생, 스데반의 순교와 이어진 박해를 통한 복음의 지리적 확산,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베드로의 고넬료 회심을 통한 이방인 선교의 문 개방,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계획적이고 전략적인 타문화권 선교 여행 등은 선교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선교가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하심 아래, 수많은 장애물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의 드라마임을 증거한다.

III. 궁극적 지향점: 선교의 목적과 목표
모든 의미 있는 활동은 그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의해 그 가치와 방향이 결정된다.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선교의 목적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선교의 동기, 방법, 평가 기준이 달라진다. 만약 선교의 목적을 단순히 교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나 특정 교파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축소시킨다면, 선교는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경쟁의 논리에 빠지기 쉽다. 성경이 제시하는 선교의 목적은 그보다 훨씬 더 광대하고 심오하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나라를 확장하며, 깨어진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우주적 차원을 포함한다.

A.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Soli Deo Gloria)
선교의 가장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목적은 모든 민족과 족속, 방언과 백성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으로 '독솔로지(Doxology, 송영)'적 동기라고 불린다. 시편 기자는 "그의 영광을 모든 민족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시 96:3)라고 노래했으며,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했다(롬 15:9-11).

현대의 신학자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 개념을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다. 예배가 궁극적 목적이다.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통찰력 있는 말로 요약했다. 이 말의 의미는, 선교 활동 자체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 온 열방이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예배하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것이다. 현재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수많은 민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 또한 참된 예배자의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하는 활동, 즉 선교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선교의 성공은 얼마나 많은 교회를 개척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로 세워졌느냐로 측정되어야 한다. 이 관점은 선교사에게 단기적인 성과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영원하고 변치 않는 목표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더 나아가, 선교는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가운데서 더럽혀지고 모독당하는 현실을 바로잡고, 그의 거룩하심과 주권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이다. 구약의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 상태에서 구원하시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낌이라"(겔 36:22-23)고 선언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주된 동기는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회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의 선교는 죄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는 거룩한 사역이다.

B. 화해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궁극적 목적 아래, 선교는 몇 가지 구체적이고 중요한 목표들을 추구한다. 그 핵심에는 '화해'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선교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고 말한다. 이것이 '수직적 화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었다. 전도는 바로 이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초청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화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화해는 필연적으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세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수평적 화해'로 이어진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선교는 인종, 민족, 계급, 성별의 장벽을 넘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화해의 공동체,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은 복음 전도와 분리된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화해의 복음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본질적인 선교 활동이다.

둘째, 선교는 '하나님 나라'(βασιλϵια τoυ Θϵoυ)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나라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핵심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사후에 가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임하는 모든 영역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치유와 축사,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행동을 통해 그 나라가 이미 이 땅에 현재적으로 임했음을 보여주셨다. 선교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교회를 통해 그 나라의 가치, 즉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을 부분적으로나마 세상에 보여주는 예표(sign)이자 도구(agent)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선교의 범위를 개인의 영혼 구원을 넘어 사회적,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선교의 목적이 단순히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에만 국한된다면, 사회 구조적인 악이나 경제적 불평등, 환경 파괴와 같은 문제에 무관심해지기 쉽다. 그러나 선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의 모든 영역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환경 등 모든 분야가 선교의 대상이 된다. 이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하거나 대립시키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의 강력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병원을 세워 병든 자를 고치고, 학교를 지어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며, 독재에 저항하여 인권을 수호하고, 파괴된 자연을 회복시키는 행위는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이나 '미끼'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본질적인 선교 활동이다. 1974년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은 이러한 통합적 이해를 "복음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우리 기독교적 의무의 두 부분"이라고 명시하며 현대 복음주의 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셋째, 선교의 중요한 중간 목표는 각 문화권 안에 지속 가능한 지역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선교는 흩뿌려지는 씨앗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나무,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워져야 한다. 교회는 선교의 열매인 동시에, 그 지역에서 새로운 선교를 감당하는 전초기지(base)가 된다. 따라서 선교는 단순히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을 넘어, 그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양육받으며, 서로를 돌보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는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교는 종말론적(Eschatological) 중요성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셨다. 이는 교회의 선교가 역사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계획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날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구원이 있도다"(계 7:9-10)라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선교는 바로 이 종말론적 예배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IV.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실천: 선교의 방법론
선교의 본질과 목적이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론은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선교 방법론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교회가 복음과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자기 이해의 변화를 추적하는 과정이다. 이 장에서는 역사적 변천을 통해 선교 패러다임의 변화를 살펴보고, 현대 선교의 주요 접근법과 그 신학적 원리를 분석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선교 방법론이 직면하는 상황화와 윤리적 성찰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룰 것이다.

A. 역사적 변천으로 본 선교 패러다임
선교 방법론의 역사는 복음이 어떻게 다양한 문화와 만나고 상호작용하며 확장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파노라마이다.

초대교회 시대(Apostolic Era, 약 30-400년)의 선교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이나 전문적인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의 자발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증거(martyria)를 통해 이루어졌다. 상인, 군인, 노예 등 다양한 계층의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웃에게 복음을 나누고,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강력한 선교 방법이었다. 로마 제국의 잘 닦인 도로망과 공용어(코이네 헬라어)는 복음 확산의 물리적 기반이 되었지만, 그 확산의 동력은 제도나 전략이 아닌, 공동체의 진정성 있는 삶과 성령의 능력이었다. 특히, 박해는 교회를 위축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흩어지는 성도들을 통해 복음이 새로운 지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시대의 선교는 교회가 '유기적 공동체'로서 존재 그 자체로 복음을 증거했음을 보여준다.

중세 시대(Medieval Period, 약 400-1500년)에 접어들면서 선교는 두 가지 상반된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Monastic Missions)을 중심으로 한 성육신적 접근이다. 패트릭(Patrick)과 같은 켈트 선교사들은 아일랜드의 토착 문화와 언어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복음을 전했으며, 수도원을 학문과 영성, 그리고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반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 서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Christendom)로 자리 잡으면서, 국가 권력과 결합된 강제적인 선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샤를마뉴 대제의 군사적 정복과 강제 개종,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폭력성은 선교가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정치적, 군사적 팽창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이다. 이는 교회가 스스로를 '제도적 권력'으로 이해할 때 발생하는 선교의 왜곡을 명확히 보여준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만인제사장설 등을 통해 모든 성도의 선교적 책임을 일깨울 신학적 잠재력을 가졌으나, 초기 개혁가들은 주로 유럽 내부의 개혁에 집중하여 해외 선교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는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으며, 1792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가 "이방인의 회심을 위해 그리스도인이 사용할 수단에 대한 탐구"라는 책을 출판하고 선교회를 조직하면서 '근대 선교의 시대'가 열렸다.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구호 아래, 성경 번역, 교육, 의료, 사회 개혁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포괄적인 선교를 주창했다. 이후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중국내지선교회와 같이 수많은 자발적인 선교 단체(parachurch organizations)가 등장하여 전 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선교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과 시기적으로 맞물리면서, 선교가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전파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복음을 '문명화의 빛'으로 이해하는 계몽주의적 시각이 투영된 결과로, 선교의 순수한 동기가 시대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20세기 이후,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식민지들의 독립을 거치면서 선교 패러다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과거 '선교지'로 여겨졌던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 남반구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선교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선교는 '서구(the West)에서 나머지(the Rest)로' 향하는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from everyone to everywhere)' 향하는 다방향적인 흐름이 되었다. 한국, 브라질, 나이지리아와 같은 비서구 국가들이 새로운 선교 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선교의 주도권과 중심이 서구에서 비서구 교회로 이동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이는 선교가 특정 문화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편적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다.

B. 현대적 접근과 신학적 원리
이러한 역사적 성찰과 변화된 상황 속에서 현대 선교는 다양한 접근법들을 발전시켜왔다. 이 방법론들은 과거의 오류를 극복하고, 보다 성경적이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신학적 고민의 산물이다.

첫째, '성육신적 선교(Incarnational Miss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선교의 궁극적인 모델로 삼는 접근법이다. 이는 선교사가 자신의 문화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선교지의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동참하면서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을 강조한다. 단순히 외부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방문객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진정한 관계를 맺고 섬기는 것을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과거 제국주의적 선교가 가졌던 '위에서 아래로(top-down)'의 접근을 비판하고, 겸손과 섬김을 바탕으로 한 '아래로부터(bottom-up)'의 선교를 지향한다.

둘째, '총체적 선교(Holistic/Integral Mission)'는 복음 선포(proclamation)와 사회적 섬김(social action)을 분리할 수 없는 복음의 양 날개로 이해하는 접근법이다. 이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분화하는 헬라적 사고를 극복하고, 인간의 영적, 육체적, 사회적, 정서적 필요를 모두 아우르는 전인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히브리적 사고에 기반한다. 총체적 선교는 가난, 질병, 불의, 억압과 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맞서 싸우는 것을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본질적인 선교 활동으로 간주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통합적인 증거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셋째, '교회 개척 운동(Church Planting Movements, CPM)'은 특정 지역이나 종족 집단 내에서 빠른 속도로 자생하고 자가 번식하는 토착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적 접근이다. 이 방법론은 외부 선교사의 역할이 교회를 직접 세우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 지도자를 발굴하고 훈련시켜 그들이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고 또 다른 지도자를 양육하도록 돕는 촉매(catalyst) 역할에 있음을 강조한다. 단순하고 재생산 가능한 제자훈련 모델을 통해, 외부의 재정적, 인적 자원에 대한 의존성을 최소화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형태로 복음이 자생적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넷째, '디지털 선교(Digital/Online Mission)'는 21세기의 새로운 상황에 부응하는 선교 방식이다. 인터넷, 소셜 미디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온라인 게임 등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하여 지리적, 정치적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하고, 온라인 공동체를 형성하며, 제자훈련을 실시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특히 복음 전도가 법적으로 금지된 창의적 접근 지역(Creative Access Nations)에서 디지털 선교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온라인 공간의 중요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디지털 선교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으며, 가상 공간에서의 성육신적 현존(incarnational presence)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미래의 선교 방법론을 논의할 때, 단순히 더 '효과적인' 기술이나 전략을 찾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각 시대의 방법론은 그 시대 교회가 복음, 교회,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믿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방법론은 항상 신학의 시녀여야 하며, 신학적 성찰이 결여된 방법론은 복음을 왜곡하고 선교의 본질을 훼손할 위험이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C. 상황화와 윤리적 성찰
모든 선교 방법론은 복음이라는 초월적 진리와 그것이 선포되는 구체적인 문화적 상황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긴장 관계를 신학적으로 다루는 개념이 바로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다.

상황화는 복음의 핵심 진리는 불변하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와 방식은 각 문화의 언어, 사상, 가치관, 세계관에 맞게 번역되고 표현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를 번역하는 것을 넘어, 복음이 수용자의 문화 속에서 의미 있게 이해되고, 그들의 삶의 질문에 답하며, 궁극적으로 그 문화에 깊이 '뿌리 내리도록' 돕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성공적인 상황화는 복음이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니라 '자신들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부족 문화 속에서는 '조상'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를 '모든 조상의 으뜸'으로 설명하거나, 동양의 공동체주의 문화 속에서는 개인의 결단뿐만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상황화의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상황화는 매우 신중한 신학적 분별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상황화가 도를 넘어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유일성,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역사성 등을 해당 문화의 비기독교적 세계관과 타협하거나 혼합시켜 변질시키는 위험이 있는데, 이를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한다. 예를 들어, 조상 숭배 문화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조상 중 한 명으로 받아들이거나, 다신론적 문화에서 예수를 여러 신들 중 가장 높은 신으로 섬기는 것은 혼합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는 복음의 초월성과 문화의 특수성 사이에서 창조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성경의 권위 아래 모든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변혁시키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교의 방법론은 반드시 윤리적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가 범했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복음을 서구 문화와 동일시하여, 피선교지의 문화를 미개하고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며 파괴했던 문화적 제국주의였다. 또한, 물질적 원조나 사회적 지위를 미끼로 개종을 유도하거나, 기만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타 종교에 대한 비방과 공격을 통해 개종을 강요하는 행위는 복음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비윤리적인 '개종 강요(Proselytism)'이다. 진정한 기독교 선교는 타 종교와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을 바탕으로, 강압이 아닌 사랑과 섬김, 그리고 진실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사는 가르치는 자의 위치가 아니라 배우는 자의 자세로, 겸손하게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과거의 과오에 대한 진솔한 회개와 성찰 없이는, 미래의 선교는 그 진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V. 선교의 주체이신 성령: 역동적 능력의 근원
선교의 정의, 목적, 방법론에 대한 모든 신학적 논의는, 만약 선교의 실제적인 동력이신 성령의 역할을 간과한다면 공허한 이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Missio Dei의 관점에서 선교는 성부로부터 시작되어 성자를 통해 성취되고, 성령을 통해 세상 속에서 구현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과정에서 성령은 단순한 조력자나 보조 동력이 아니라, 선교의 모든 국면을 주도하고 가능하게 하는 주권적인 행위자(Divine Agent)이시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증인을 무장시키는 성령의 능력, 마음을 열어 회심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사역, 그리고 교회를 세우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A. 증인을 무장시키는 능력 (Empowerment for Witness)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약속은 군대나 재물이 아닌, 바로 성령의 권능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구절은 선교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이 인간의 자격, 학식, 재능, 혹은 훈련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 부여임을 선언한다. 여기서 '권능'으로 번역된 헬라어 '뒤나미스'(δυναμις)는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어원이 된 단어로, 폭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은 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두려움에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후에는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변화했다. 베드로는 수천 명의 유대인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외쳤다. 이 담대함은 인간적인 용기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의 결과였다. 또한 성령의 권능은 기적과 표적을 통해 복음의 진실성을 가시적으로 증명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병든 자를 고치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사도들의 사역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주었다.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성공적인 사역이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기인했음을 반복해서 고백한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고 밝혔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수사학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는 선교의 열매가 인간의 설득력이나 논리적 탁월함에 달려 있지 않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며, 그 약함 속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다. 이는 오늘날의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선교사의 가장 큰 자산은 유창한 언어 구사 능력이나 탁월한 전략 기획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고 그분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성이다.

B. 마음을 여는 사역 (The Work of Conversion)
선교사가 아무리 유창하게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할지라도,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다. 죄로 인해 어두워지고 완고해진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11)고 약속하셨다. '책망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엘렝코'(ϵλϵγχω)는 법정에서 검사가 증거를 제시하여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는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이 선포될 때,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의의 길임을 보게 하며,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하여 회개로 이끄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선교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역할을 할 뿐, 그 씨앗이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 즉 성령이심을 신뢰해야 한다(고전 3:6-7).

더 나아가, 성령은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중생(Regeneration)'의 사역을 통해 인간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부여하신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8)고 말씀하셨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어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믿을 수 없다.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그의 영을 거듭나게 하실 때에야 비로소 그는 복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엡 2:8). 이 진리는 선교사에게 큰 위로와 자유를 준다. 선교의 결과는 선교사의 능력이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고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 달려 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고 기록된 자주 옷감 장수 루디아의 회심은 이 원리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C. 교회를 세우고 인도하시는 성령 (Guidance and Ecclesial Formation)
성령의 역할은 개인의 회심에서 그치지 않는다. 성령은 회심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우시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지휘관의 역할을 하신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어떻게 선교의 방향과 전략을 직접 인도하시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고 그들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했다(행 13:2-4).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에는, 그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애썼으나 "성령이 허락하지 아니하셨고",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행 16:6-7). 결국 바울은 밤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계획을 넘어서는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따라서 효과적인 선교 전략은 인간의 시장 조사나 데이터 분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분별하고 순종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성령은 각 신자에게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복음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다양한 은사(카리스마타, χαρισματα)를 주신다. 가르치는 은사, 섬기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 등 다양한 은사들은 교회를 유기적으로 세우고, 각 지체가 자신의 역할에 맞게 선교적 사명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고전 12:4-11; 롬 12:6-8). 선교지에서 새로운 교회가 세워질 때, 성령은 외부의 도움 없이도 교회가 자립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토착 리더십을 세우고 각 지체에게 필요한 은사를 공급하신다. 선교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현지 성도들이 성령께서 주신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교회를 섬기도록 돕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교회가 복음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도록 보호하시고, 새로운 문화적 도전에 직면했을 때 진리를 분별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는 '진리의 영'이시다(요 16:13). 특히 복음을 다른 문화에 번역하고 적용하는 상황화의 과정에서, 무엇이 복음의 본질이고 무엇이 문화적 형태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때 성령께서는 공동체적 분별 과정(예: 예루살렘 공의회, 행 15장)을 통해 교회가 혼합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진리 안에서 하나 되도록 인도하신다.

이처럼 선교의 전 과정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강력한 성령론(Pneumatology)은 선교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불안과 조급함, 그리고 인간 중심적 성과주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신학적 해독제이다. 선교의 주도권이 '나'나 '우리 단체'가 아닌 성령께 있음을 깊이 내면화할 때, 선교사는 결과에 대한 과도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과정의 신실함에 집중할 수 있다. 성공은 나의 공이 아니며, 실패도 나의 책임만은 아니다. 나의 역할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신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 의존적인 영성은 선교를 고된 '프로젝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로 변화시키며, 선교사의 장기적인 영적 건강과 사역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VI. 결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
지금까지 본 보고서는 전도와 선교의 정의, 목적, 방법론, 그리고 성령의 역할이라는 네 가지 핵심 주제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거대한 신학적 틀 안에서 탐구하였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전도와 선교가 교회의 여러 선택 과업 중 하나가 아니라, 창세 전부터 시작되어 역사를 관통하며 종말에 완성될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사역에 교회가 부름받아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이자 본질적인 정체성임을 확인하였다.

결론적으로, 본 보고서의 핵심 논지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선교의 기원과 동력은 교회의 필요나 인간의 열정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보내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자기 파송적 사랑에 있다. 교회의 선교는 이 하나님의 선교로부터 파생되며, 그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 둘째, 전도와 선교는 복음('유앙겔리온')을 내용으로 하여, 그것을 공적으로 선포하고('케리그마'), 삶으로 증언하며('마르튀리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를 세우는('마테튜오') 통합적인 활동이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과 임재의 약속에 근거한 대위임령을 통해 교회에 부여된 존재 이유 그 자체이다. 셋째,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구원을 넘어, 온 열방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예배의 회복에 있다. 이 큰 목적 아래, 선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화해와 인간 및 피조세계와의 수평적 화해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선포하고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넷째, 선교의 방법론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해왔으며, 각 시대의 방법론은 그 시대 교회의 신학적 자기 이해를 반영한다. 현대 선교는 과거 제국주의적 과오를 반성하며, 성육신적, 총체적, 상황화된 접근을 통해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할 윤리적 책임을 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정의, 목적, 방법론은 선교의 주체이신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 안에서만 생명을 얻는다. 성령은 증인을 무장시키고, 완고한 마음을 열어 회심케 하시며, 교회를 세우고 선교의 전 과정을 인도하시는 역동적인 동력이시다.

이 네 가지 차원은 Missio Dei라는 중심축을 통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올바른 정의(하나님의 선교에의 참여)는 올바른 목적(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을 낳는다. 올바른 목적은 올바른 방법론(겸손한 성육신과 총체적 섬김)을 이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과 인도하심에 의존할 때에만 가능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소통 방식의 급변, 그리고 전 지구적 이주와 난민 문제 등 21세기의 복잡하고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Missio Dei와 성령 중심의 선교 패러다임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 과거와 같이 힘과 권위, 조직의 논리로 접근하는 선교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세상은 거대한 담론이나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삶과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을 보기 원한다.

따라서 미래의 선교는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답을 가진 자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 속에서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순례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미래의 선교는 더욱 진정성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말과 삶이 일치하는 총체적 증거를 통해 복음의 신뢰성을 회복해야 한다. 미래의 선교는 더욱 대화적이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선포하기에 앞서, 타문화와 타종교의 이야기에 깊이 경청하며 그들의 필요와 질문 속에서 복음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의 선교는 더욱 기도에 의존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전략과 계획을 내려놓고,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구하는 깊은 영성 없이는 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전도와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짐스러운 과제가 아니라, 창조주께서 그의 피조 세계를 회복하시는 위대한 드라마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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