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전문인 선교학 49 과정
교회의 본질은 세상으로 보냄 받은 선교임을 강조.
종교신학 (Theology of Religion)

선교적 교회론
교회의 본질: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백성의 선교적 정체성
서론: '교회 건물'이라는 익숙한 감옥을 넘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라는 단어는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아마도 십자가가 높이 솟은 특정 건물,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예배, 비슷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사교 모임, 혹은 다양한 내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종교 기관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지만, 교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역동적인 본질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고 제한적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미지들은 교회를 세상과 분리된 안락한 ‘성채(castle)’ 혹은 신앙인들만의 ‘게토(ghetto)’로 축소시키며,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할 참된 이유를 망각하게 만드는 ‘익숙한 감옥’이 되어버렸다.
현대 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 즉 사회적 신뢰도 하락, 영향력 상실, 다음 세대의 이탈 현상은 단순히 외부 환경의 변화나 세속주의의 도전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가 자신의 존재 이유, 즉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신학적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gathering)’ 공동체로 이해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본래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sent)’ 공동체라는 자신의 DNA를 잃어버렸다. ‘선교’는 교회가 행하는 수많은 사역 프로그램 중 하나(a program of the church)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본질(the essence of the church)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교를 소수의 전문가(선교사)나 특정 위원회에 위임한 채 대부분의 성도들은 선교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사가 증명하는 교회의 참모습은 결코 정적인 기관이나 안락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움직이는 공동체, 즉 ‘운동(movement)’이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냄 받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부와 아들로부터 세상에 보냄 받은 성령의 역동적인 파송(sending)의 흐름 속에서 태어났으며, 바로 그 파송의 사명을 이어가도록 부름받은 ‘사도적(apostolic) 백성’이다.
따라서 본고는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모든 사고와 구조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데 있음을 역설하고자 한다. 즉,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매력적(attractional)’ 모델에서 벗어나, 세상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선교적(missional)’ 모델로의 전환이 시급함을 주장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교회의 선교적 본질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신학적으로 탐구하고, 이 관점이 교회의 정체성, 세상과의 관계, 평신도의 역할, 그리고 교회의 구조를 어떻게 재정의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논증할 것이다. 나아가 이 선교적 비전이 실제 교회의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교회가 다시 한번 ‘세상의 소망’이라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교회 성장 전략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생명의 원리를 회복하려는 신학적, 실천적 여정이 될 것이다.
I. 신학적 뿌리의 재발견: 교회의 존재 이유를 묻다
교회의 본질이 ‘보냄 받은 선교’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을 교회 자신에게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옮겨야 한다. 선교는 교회의 발명품이 아니며, 교회의 위대한 과업도 아니다. 선교는 영원 전부터 시작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이야기이며, 교회는 그 이야기 속으로 초대받은 동역자일 뿐이다.
1. 모든 것의 시작,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20세기 중반, 국제선교협의회(IMC) 빌링겐 대회(1952)를 기점으로 본격화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신학적 개념은 선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이전까지 선교는 주로 ‘교회 중심적(ecclesiocentric)’으로 이해되었다. 즉, 교회가 선교의 주체이며, 교회가 비기독교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 선교의 목표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사상은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선언한다. 선교는 교회의 활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보내시는(sending) 하나님’의 속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보내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성부 하나님은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그의 사랑 때문에 독생자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요 3:16, 요일 4:9-10). 성부와 아들은 교회를 세우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요 14:26, 16:7). 그리고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거대한 파송의 흐름 속으로 교회를 부르시어 세상으로 보내신다(요 20:21). 따라서 선교는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행하는 사역이 아니라, 온 세상 속에서 이미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구속 활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지극히 중대한 함의를 가진다. 이는 “교회는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를 가진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교회는 선교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요, 선교의 목적지가 아니라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이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 본질적인 ‘보냄 받음’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할 때,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 클럽으로 전락하게 된다. 마치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인 것처럼, 교회가 그 ‘보냄 받음’의 사명을 잃으면 세상 속에서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2. 보냄 받은 백성: 사도적 교회의 본질
교회의 선교적 본질은 교회가 ‘사도적(apostolic)’이라는 고백 속에 깊이 담겨 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거룩한 공교회와…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서 ‘사도적’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도(Apostolos)’라는 헬라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교회가 사도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역사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승했다는 의미를 넘어, 교회의 모든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도들처럼 세상 속으로 ‘보냄 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대위임령(마 28:18-20)은 단순히 몇 가지 선교 프로그램을 수행하라는 지침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존재 방식 자체를 규정하는 선언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은, 교회가 특정 장소에 머물러 있는 정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어서 나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역동적인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과 교회의 사명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이 말씀은 교회의 선교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선교에 참여하고 그것을 이어가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그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도록 부름받았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는 순간, 세상 속으로 파송된 선교사가 된다. 목사나 선교사와 같은 특별한 직분자만이 선교사가 아니라, 교사, 의사, 엔지니어, 주부, 학생 등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자리, 즉 가정과 직장, 이웃과 사회 속으로 보냄 받은 하나님의 선교사이다. 이것이 바로 ‘만인 선교사’의 원리이며, 교회의 선교적 본질이 모든 성도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는 방식이다.
3. 선교의 모델과 내용: 성육신과 하나님 나라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선교의 모델과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자체에 계시되어 있다.
선교의 가장 완벽한 모델은 바로 **성육신(Incarnation)**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죄 많은 세상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셨다. 그는 친히 인간의 역사와 문화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는 우리의 언어를 배우고, 우리의 음식을 드셨으며, 우리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적 선교’의 핵심이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섬에 머물며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오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이웃의 필요와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는 세속화나 혼합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의 변하지 않는 진리를 그 문화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고 소통하려는 겸손하고 사랑 가득한 노력, 즉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의미한다.
선교의 궁극적인 내용과 목표는 바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이다. 교회의 선교는 단순히 교회의 교세를 확장하거나 교인 수를 늘리는, 즉 ‘교회 왕국(Church-dom)’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선교는 이 땅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환경 등 삶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임하도록 증거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Proclamation)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정의의 실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적 책임을 모두 포함하는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이다.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미리 맛보고 보여주는 ‘표지(sign)’이자, 그 나라를 확장하는 데 쓰임 받는 ‘도구(instrument)’이며, 장차 완성될 그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선취(foretaste)’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II. 두 개의 패러다임: 매력적 교회와 선교적 교회의 대비
교회의 본질이 ‘보냄 받은 선교’라는 신학적 통찰은 교회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는 기존의 ‘매력적(attractional)’ 교회 모델과는 너무나도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 두 모델의 차이를 교회의 정체성, 세상과의 관계, 평신도의 역할, 그리고 교회의 구조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1. 교회의 정체성: ‘종교 상품 판매점’인가, ‘선교사 파송 기지’인가?
매력적 교회 모델에서 교회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장소(place)’와 ‘이벤트(event)’에 묶여있다. 교회는 영적인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와 만족을 얻고 돌아가는 일종의 ‘종교 상품 및 서비스 공급 센터’와 같다. 이 모델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더 나은 예배(음악, 설교), 더 좋은 프로그램(주일학교, 제자훈련), 더 편리한 시설(주차장, 카페)을 제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건물 안으로 끌어 모으는가에 의해 측정된다. 즉, 교회의 성공은 ‘모이는 숫자(gathering capacity)’로 평가된다.
반면, 선교적 교회 모델에서 교회의 정체성은 ‘보냄 받은 백성(a sent people)’ 그 자체에 있다. 교회는 특정 건물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 모델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교회 건물 밖의 세상으로 의미 있는 사역을 감당하도록 파송하는가에 의해 측정된다. 교회의 주된 관심은 내부 구성원의 만족이 아니라,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와 세상의 변화이다. 따라서 교회의 성공은 ‘파송 능력(sending capacity)’과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평가된다.
2. 세상과의 관계: ‘낚시터’인가, ‘선교지’인가?
매력적 교회는 세상을 잠재적인 교인들을 낚아 올릴 거대한 ‘낚시터’로 바라본다. 세상은 구원의 대상이긴 하지만, 동시에 교회와 성도들을 오염시킬 수 있는 위험하고 세속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이 모델의 전략은 세상 사람들(물고기)을 그들의 본래 서식지(세상)에서 건져내어 안전한 어항(교회) 안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필연적으로 세상과 교회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세상에 대한 방어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인 태도를 낳게 한다.
선교적 교회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시는 ‘선교지(mission field)’로 바라본다. 세상은 교회가 도피해야 할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보내신 바로 그 목적지이다. 이 모델은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이웃의 필요를 채우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성육신적’ 태도를 강조한다. 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는 요새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물과 같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세상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와 섬김의 자세를 낳는다.
3. 평신도의 역할: ‘사역의 조력자’인가, ‘교회의 선교사’인가?
매력적 교회 모델에서 사역의 주체는 주로 담임목사를 비롯한 소수의 ‘프로’ 성직자들이다. 평신도(laity)의 주된 역할은 성직자들의 사역을 돕는 ‘자원봉사자’이다. 그들은 주일 예배에 충실히 참석하고, 헌금을 내며, 교회 내부의 여러 부서(성가대, 주일학교, 주방 봉사 등)에서 봉사함으로써 교회가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돕는다. 사역의 중심 무대는 단연 ‘교회 안’이다.
선교적 교회 모델에서 사역의 주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즉 ‘평신도’이다. 모든 성도가 각자의 삶의 자리로 보냄 받은 ‘교회의 선교사’이다.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 평신도 선교사들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훈련하며, 격려하고, 파송하는 ‘장비 공급자(equipper)’이다. 이 모델에서 사역의 중심 무대는 ‘교회 밖’, 즉 성도들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살아가는 바로 그 삶의 현장이다. 평신도는 더 이상 목회의 대상이 아니라, 목회의 동역자이자 교회의 존재 이유 그 자체가 된다.
4. 교회의 구조와 프로그램: ‘내부 지향적’인가, ‘외부 지향적’인가?
매력적 교회의 구조와 프로그램은 철저히 ‘내부 지향적(inward-focused)’이다. 모든 조직과 활동은 기존 신자들의 신앙 성장과 만족, 그리고 새로운 신자들을 교회 안으로 유인하고 정착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는지로 평가된다. 구조는 담임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선교적 교회의 구조와 프로그램은 근본적으로 ‘외부 지향적(outward-focused)’이다. 교회의 조직은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파송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연령별 부서 조직 대신, 지역 사회의 필요(예: 노인 돌봄, 이주민 지원, 환경 보호)에 따라 유연하게 구성되는 사역팀 중심의 구조를 가질 수 있다. 모든 프로그램은 "이 활동이 우리를 얼마나 더 세상 속으로 보내는 데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의해 평가된다. 구조는 중앙의 통제보다는 각 현장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분산적이고 네트워크적인 형태를 지향한다.
III. 선교적 교회의 구체적 실천: 삶으로 번역되는 신학
선교적 교회의 비전은 단순히 아름다운 신학적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의 모든 활동과 구조, 그리고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된다. 선교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교회의 예배, 리더십, 소그룹, 그리고 전도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구성을 요구한다.
1. 예배의 재구성: 파송을 위한 재충전
매력적 모델에서 예배는 종종 교회의 주된 ‘상품’이자 클라이맥스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감동적인 설교와 세련된 찬양을 통해 영적인 만족과 위로를 얻기 위해 예배에 참석한다. 그러나 선교적 관점에서 예배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파송될 군사들을 재충전하고 무장시키는 ‘작전 기지’이다.
선교적 예배는 ‘모임(gathering)’과 ‘흩어짐(scattering)’이라는 두 가지 리듬을 모두 중요하게 여긴다. 세상 속에 흩어져 살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주간의 삶의 먼지를 씻고, 말씀과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재확인하며, 공동체의 교제 속에서 격려를 얻기 위해 ‘모인다’. 이 모임을 통해 성도들은 자신들이 누구이며,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예배의 마지막은 결코 끝이 아니다. 축도와 파송의 선언은 재충전된 성도들을 다시 각자의 선교지인 세상 속으로 파견하는 ‘커미셔닝(commissioning)’이다. 따라서 선교적 예배의 모든 요소, 즉 찬양의 가사, 공동 기도, 설교의 내용, 그리고 성찬의 의미는 모두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갈 힘과 지혜를 공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2. 리더십의 전환: ‘돌보는 목자’에서 ‘파송하는 목장주’로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은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를 요구한다. 전통적인 목회자상은 주로 양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목자(shepherd)’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의 리더는 양들이 양 우리 밖의 드넓은 초원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며 번성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훈련시키는 ‘목장주(rancher)’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선교적 리더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이 직접 모든 사역을 수행하는 ‘슈퍼스타 플레이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각자의 자리에서 사역의 주체가 되도록 역량을 강화시켜주는 ‘코치’이자 ‘촉매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성도들이 자신의 은사와 소명을 발견하도록 돕고, 그들이 세상 속에서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며, 그들이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적, 실제적 자원을 공급하는 일에 주력한다. 이를 위해 선교적 리더는 강단 위에서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넘어, 성도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의 선교적 여정에 동행하는 ‘멘토’가 되어야 한다.
3. 소그룹의 재발견: ‘안전한 피난처’를 넘어 ‘선교의 전초기지’로
많은 교회에서 소그룹(구역, 셀)은 성도들 간의 친교와 성경공부를 위한 내부적인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물론 이러한 기능은 중요하지만, 여기에만 머물 경우 소그룹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자기들끼리만 만족하는 ‘성스러운 담합(holy huddle)’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선교적 교회에서 소그룹은 교회의 선교적 비전이 구현되는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단위, 즉 ‘선교의 전초기지(missional outpost)’이다. 선교적 소그룹은 내부 구성원들의 필요를 채우는(IN) 활동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UP) 활동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룹의 에너지와 자원을 외부, 즉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OUT) 활동에 사용한다. 이들은 특정 지역이나 네트워크를 자신들의 공동 선교지로 삼고, 그곳의 필요를 파악하며, 함께 기도하고, 구체적인 섬김의 활동을 계획하고 실천한다. 예를 들어, 한 소그룹이 지역의 독거노인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반찬을 만들어 배달하거나, 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위해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은 공동체들을 통해 교회는 거대한 조직으로는 불가능한, 세밀하고 관계적인 방식으로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고 섬기는 성육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
4. 전도의 새로운 이해: ‘프로그램’에서 ‘관계적 증거’로
매력적 모델에서의 전도는 주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한 특정 프로그램(예: 총동원 주일, 전도 축제)이나 기술(예: 사영리)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복음을 상품처럼 판매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거나, 사람들을 숫자로만 취급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 쉽다.
선교적 전도는 근본적으로 ‘삶의 방식(a way of life)’이다. 그것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성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맺고 있는 진실한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의 가치를 살아내고 증거하는 것이다. 동료의 아픔에 함께 울어주고, 이웃의 필요에 기꺼이 손을 내밀며, 직장에서 정직과 성실로 일하는 삶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전도가 된다. 또한, 선교적 전도는 개인의 노력만큼이나 ‘공동체의 매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용서와 화해, 섬김과 환대가 넘치는 대안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줄 때, 세상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신비에 이끌려 "당신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를 말로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된다.
IV. 도전과 미래: 선교적 교회가 나아갈 길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은 단순히 몇 가지 프로그램을 바꾸는 손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교회의 몸에 배어 온 깊은 습관과 문화를 바꾸는, 고통스럽고 더딘 과정이다. 이 길에는 수많은 도전이 놓여 있지만, 동시에 이 길만이 교회가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 직면한 도전들
선교적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아마도 교회의 성공을 양적 성장과 동일시하는 ‘실용주의(pragmatism)’와 ‘소비주의(consumerism)’의 유혹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숫자와 건물 크기로 목회의 성공을 평가하는 문화 속에서,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관계 중심적이고 성육신적인 사역은 비효율적으로 보이기 쉽다. 또한, 신앙을 자신의 영적 만족을 위한 소비 활동으로 여기는 성도들의 태도 역시, 자신을 내어주고 세상을 섬겨야 하는 선교적 삶에 대한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성직주의(clericalism)’와 ‘평신도의 수동성’ 역시 극복해야 할 큰 산이다. 목회자가 모든 권위와 사역을 독점하고, 평신도는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위계적인 문화는 평신도들이 선교의 주체로 서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는 목회자가 기득권을 내려놓기 어려워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평신도들이 책임 있는 제자의 삶을 부담스러워하고 안락한 신앙생활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 뿌리 깊은 **‘이원론(dualism)’**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의 신앙과 월요일의 삶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직업이나 일상을 거룩한 소명이나 선교의 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성(聖)과 속(俗)의 분리’를 극복하고,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무대임을 가르치고 살아내는 것은 선교적 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2. 한국 교회를 향한 제언
한국 교회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매력적 교회’ 모델을 통해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양적 성장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제 그 성장 모델은 한계에 부딪혔으며, 사회적 신뢰를 잃고 정체의 늪에 빠져있다. 한국 교회가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성공 방식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버리고, 교회의 본질인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이제 ‘성장’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성숙’과 ‘건강성’을 추구해야 한다. 더 큰 건물을 짓고 더 많은 사람을 모으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성도라도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상 속의 선교사로 세우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구조를 내려놓고, 평신도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북돋는 유연하고 분산적인 네트워크 구조로 변화해야 한다. 교회 내부의 행사에 쏟아붓던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지역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고 섬기는 일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3. 미래 교회의 소망
선교적 교회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새로운 유행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성경적 DNA로 돌아가려는 본질 회복 운동이다. 탈기독교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가 점점 더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상황 속에서, 거대 기관으로서의 힘을 과시하던 과거의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미래 교회의 소망은 더 이상 거대한 건물이나 잘 짜인 프로그램에 있지 않다. 그 소망은 소금처럼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부패를 막고, 누룩처럼 사회 전체를 조용히 변화시키는 작고 건강한 선교적 공동체들의 네트워크에 있다. 이들은 특정 건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어떤 박해나 위기 속에서도 복음의 생명력을 잃지 않는 회복탄력성을 지닐 것이다. 이 작은 공동체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진정성 있게 살아낼 때, 세상은 그들을 통해 다시 한번 교회를 주목하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결론: 다시, 세상의 소망으로 부름받은 교회
교회의 본질은 모이는 데 있지 않고 흩어지는 데 있다. 교회의 심장은 건물 안에 있지 않고 세상 속에 있다. 교회의 사명은 우리 자신을 위한 생존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자기 내어줌에 있다. 이 모든 것은 교회가 스스로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령을 세상에 보내시며, 마침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대한 선교 이야기의 일부이다.
매력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패러다임에서, 성육신의 사랑으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선교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선택이 아닌, 교회의 생존과 본질이 걸린 문제이다. 이는 단순히 전략의 수정이 아니라, 신학의 근본적인 회심을 요구하는 일이다.
물론 그 길은 익숙하지 않고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의 안전한 성벽을 허물고 세상의 아픔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비로소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공동체가 될 것이다. 더 이상 세상의 조롱과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절망의 땅에 생명을 심는 ‘세상의 소망’이라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이제 교회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보냄 받은 백성들의 작은 공동체로, 살아있는 복음의 편지로, 세상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확실한 증인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