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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전문인 선교학 49 과정

타문화권에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고 설명하는 것.

종교신학 (Theology of Religion)

다리 놓기: 타문화권 변증과 상황화 신학의 원리
서론: 변하지 않는 복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과의 대화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영원불변의 복음은 결코 문화적 진공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특정한 역사와 언어, 그리고 가치관으로 짜인 '문화'라는 그릇에 담겨 전달되고 이해된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선포된 복음과 21세기 서울의 직장인에게 다가오는 복음은 그 핵심 메시지는 동일할지라도, 그것을 담아내는 언어와 상징, 그리고 삶의 적용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교의 가장 중요하고도 섬세한 과제인 **'타문화권 변증'(Cross-Cultural Apologetics)**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는 단순히 서구 신학이 정립한 교리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넘어,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가진 고유한 세계관과 실존적 질문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언어와 논리로 기독교 진리의 타당성과 아름다움을 변호하고 설명하는 지적, 영적 대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대화의 기술과 신학적 원리를 집약한 개념이 바로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다.

상황화란, 복음의 핵심 진리를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특정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람들이 가장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복음을 표현하고 적용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선교사가 해외에서 행하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문화 속에서 신앙을 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는 신학적 작업이다.

본 보고서는 이처럼 선교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개념인 '타문화권 변증'과 '상황화'를 다각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상황화의 신학적 정의를 명확히 하고, 그것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종교 혼합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그 경계를 설정할 것이다. 이어서, 성육신과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상황화의 성경적 근거와 원형을 살펴보고, 신학자들이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리처드 니버의 고전적 모델을 통해 분석한다. 나아가, 선교 인류학자 폴 히버트가 제시한 '비판적 상황화'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과 성경적 진리에 대한 충실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 실천적 지혜를 모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현대적 사례들을 통해 상황화가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창의적으로 적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변호하고 설명하기 위한 우리의 과제를 성찰하고자 한다.

제1부 상황화란 무엇인가: 정의와 경계 설정
상황화는 오늘날 선교학 분야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 중 하나이다. 그만큼 다양한 정의와 논쟁이 존재하지만, 핵심은 복음이 특정 문화 속 사람들에게 의미 있고 적실성 있게 전달되도록 하는 신학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1.1. 상황화의 정의와 필요성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용어는 1970년대 이후 선교학계에서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용어를 대체하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토착화가 주로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고 교회의 자립을 이루는 구조적인 측면에 집중했다면, 상황화는 그 범위를 넘어 복음 메시지 자체가 문화의 깊은 차원, 즉 세계관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다루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선교학자 딘 플레밍은 상황화를 "복음이 구체적인 역사적 혹은 문화적 상황 속에 성육신되는 역동적이면서 포괄적인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복음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새로운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고, 그 토양의 자양분을 흡수하여 새로운 형태의 열매를 맺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상황화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언어와 표현의 적응: 복음의 메시지를 해당 문화의 언어와 상징, 이야기, 속담 등을 사용해 사람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필요에 대한 응답: 그 문화가 직면한 구체적인 질문과 고통, 필요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한다.

문화 형태의 적용: 예배의 형식, 찬양의 음악 스타일, 교회의 리더십 구조 등을 해당 문화에 친숙하고 의미 있는 형태로 조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상황화가 필요한 이유는, 복음은 결코 문화와 분리된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복음은 이미 특정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 선교사가 자신의 문화적 표현 방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타문화에 그대로 이식하려 할 때, 복음은 불필요한 문화적 장벽에 부딪혀 거부당하게 된다. 따라서 상황화는 선택이 아닌,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1.2. 상황화와 혼합주의: 넘지 말아야 할 선
상황화를 논할 때 가장 큰 우려와 비판은 그것이 '종교 혼합주의'(Syncretism)로 변질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혼합주의는 복음의 핵심 진리가 비기독교적인 종교나 문화 요소와 뒤섞여 그 본질이 왜곡되거나 상실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건강한 상황화와 위험한 혼합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성경의 최종적인 권위를 인정하는가에 있다.

건강한 상황화: 성경의 무오하고 충분한 권위를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는다. 문화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지만, 그 그릇의 모양이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려 할 때,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여 문화를 비판하고 변화시킨다. 즉, 복음이 문화 속으로 들어가되, 그 문화의 세계관을 복음의 진리로 변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위험한 혼합주의: 성경의 권위보다 문화의 가치나 사람들의 수용성을 더 우선시한다.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예: 그리스도의 유일성,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역사성 등)을 문화적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제거하거나 상대화한다. 이는 결국 복음이 문화에 동화되어 그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진정한 상황화는 복음과 문화 사이의 끊임없는 비판적 대화 과정이다. 복음은 문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 문화를 심판하고 새롭게 하는 변혁의 주체로 서야 한다. 이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령의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제2부 상황화의 성경적 기초와 원형
상황화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선교 전략이 아니다. 그 원형과 원리는 성경 자체,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 가장 분명하게 발견된다.

2.1. 최고의 모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인간으로 태어나, 아람어를 사용하고,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살아가신 성육신 사건은 상황화의 가장 완벽하고 심오한 모델이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오셨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늘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추상적인 교리가 아닌 일상의 비유(씨 뿌리는 자, 잃어버린 양 등)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치셨다. 그는 사람들의 삶의 정황, 즉 그들의 기쁨과 슬픔, 질병과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이처럼 성육신은 선교가 수신자의 문화와 삶을 존중하며 그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성육신적 접근'을 해야 함을 가르친다. 선교사는 자신의 편안한 문화적 공간을 떠나, 불편하고 낯선 타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언어와 세계관을 배우는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2.2. 최고의 실천가: 사도 바울의 선교
신약성경에서 상황화의 원리를 가장 의식적이고 탁월하게 실천한 인물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다. 헬라, 로마, 유대 문화에 모두 정통했던 그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연하고 창의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그의 상황화 원칙은 고린도전서 9장 19-23절에 명확히 나타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복음의 본질(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철저히 수신자 중심의 자세를 취했다.

아테네에서의 설교(행 17장):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철학자들에게 설교할 때, 그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대신 그들이 존경하는 시인의 글을 인용하고, 그들이 세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삼았다.

문화적 권리의 포기: 그는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된다면, 고기를 먹을 자신의 합법적인 권리조차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고전 8장). 이는 복음의 진전을 위해 자신의 문화적 편안함과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상황화의 중요한 자세임을 보여준다.

바울의 선교는 복음의 초문화적(supracultural) 진리와 그것을 담아내는 문화적 형태를 구별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그는 복음이 특정 문화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문화 속에서 의미 있게 뿌리내릴 수 있음을 삶으로 증명했다.

제3부 복음과 문화의 관계: 신학적 모델들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상황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이다. 20세기 신학자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그의 명저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다섯 가지 대표적인 유형을 제시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상황화의 다양한 접근 방식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Christ against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적대적 관계로 본다. 문화는 죄의 산물이며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 문화를 거부하고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 안으로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대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 재세례파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입장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장점이 있지만, 세상을 향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문화 변혁의 책임을 외면할 위험이 있다.

문화의 그리스도 (Christ of Culture): 첫 번째 유형과 정반대로,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와 조화가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를 인류 문화의 위대한 성취자요 완성자로 이해하며, 시대의 문화적 흐름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고대의 영지주의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입장은 세상과의 소통에 강점을 가지지만, 복음의 독특성과 예언자적 비판 정신을 상실하고 문화에 동화되어 혼합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문화 위의 그리스도 (Christ above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모두 긍정하지만, 둘 사이에 위계질서를 둔다. 문화(자연, 이성)는 그 자체로 선하지만 불완전하며, 그리스도(은혜, 계시)를 통해 완성된다고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스콜라 신학이 이 종합적인 모델에 해당한다. 이 입장은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신앙의 우위를 지키려 하지만, 교회가 문화를 지배하려는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긴장과 이중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라는 두 왕국의 시민으로서, 두 영역 모두에 충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 두 영역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사도 바울과 마르틴 루터가 이 유형의 대표자로 꼽힌다. 이 입장은 죄의 현실과 은혜의 역설을 깊이 통찰하지만, 사회 변혁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이 유형은 문화를 타락했지만 구속 가능한 대상으로 본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세상에 순응하는 대신,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복음의 능력으로 문화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 장 칼뱅 등이 이 변혁적 모델에 속한다. 이 입장은 가장 성경적인 선교 모델로 평가받으며, 상황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문화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문화를 복음으로 변혁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제4부 비판적 상황화: 균형을 향한 실천적 지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혼합주의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문화 변혁적인 상황화를 실천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방법론 중 하나가 선교 인류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가 제시한 '비판적 상황화'(Critical Contextualization) 모델이다.

히버트는 과거 선교사들이 범했던 두 가지 극단적인 오류를 지적한다. 하나는 현지 문화를 무조건 악한 것으로 정죄하고 서구 문화를 강요하는 '비상황화'(자문화중심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혼합주의에 빠지는 '무비판적 상황화'이다. '비판적 상황화'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성경적 진리와 문화적 형태를 분별하며 나아가는 네 단계의 과정이다.

1단계: 현지 문화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선교사는 판단을 유보하고, 먼저 현지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문화적 신념과 관습(예: 조상 제사)을 깊이 연구하고 이해한다. 그 관습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와 기능을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2단계: 관련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학적 연구: 선교사와 현지 신자들이 함께 모여, 연구된 문화적 관습과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예: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등)을 깊이 연구한다.

3단계: 성경의 빛 아래서 문화에 대한 비판적 평가: 공동체는 성경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자신들의 전통적인 문화 관습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 관습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들 중 무엇이 성경적인 원리와 부합하고, 무엇이 비성경적인 세계관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분별한다.

4단계: 새로운 상황화된 실천의 개발: 마지막으로, 공동체는 과거의 관습을 무조건 폐지하거나 그대로 수용하는 대신, 성경적인 의미를 담은 새로운 문화적 형태를 창조한다. 예를 들어, 조상 숭배의 의미가 담긴 제사 대신,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추도 예배'라는 새로운 기독교적 의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의 핵심은 선교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신자들 스스로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성경을 연구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성경적이면서도 문화적으로 적실성 있는 새로운 신앙의 형태를 만들어가도록 돕는 것이다.

제5부 타문화권 변증의 실제 사례들
타문화권 변증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선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창의적인 형태로 실천되어 왔다.

역사적 사례: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 16세기 말 중국에서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상황화의 선구적인 모델을 보여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불교 승려복을 입었으나, 중국 사회에서 더 존경받는 계층이 유학자임을 깨닫고 유학자의 복장을 하고 그들의 언어와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중국 고전의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했고, 조상에게 절하는 유교의 의례를 우상숭배가 아닌 사회적 존경의 표현으로 해석하여 허용하고자 했다. 비록 그의 방식은 훗날 교황청에 의해 '혼합주의'로 비판받고 금지되었지만, 타문화를 깊이 존중하고 그들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변역하려 했던 그의 성육신적 노력은 오늘날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

현대적 사례: 무슬림 상황화 스펙트럼 (C-스펙트럼): 이슬람권 선교 전문가인 존 트라비스(John Travis)는 무슬림 배경 신자(MBB) 공동체가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를 C1에서 C6까지의 스펙트럼으로 분류했다. 이 스펙트럼은 전통적인 서구식 교회(C1)부터, 이슬람 문화 형태를 사용하며 자신을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으로 정체화하는 공동체(C5)에 이르기까지, 상황화가 단일한 모델이 아니라 각 상황의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압력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C4, C5와 같은 급진적인 상황화 모델은 혼합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격렬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현대적 사례: '평화의 사람' 찾기: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눅 10:5-6)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 전략이다. 이는 타문화권에 들어갔을 때,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고 지역 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운 '평화의 사람'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이 사람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그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 복음이 자연스럽게 전파되도록 하는 통로로 삼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교사보다 앞서 이미 그 문화 속에서 일하고 계시며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신뢰에 바탕을 둔 관계 중심적 접근이다.   

결론: 변증을 넘어 문화의 변혁으로
타문화권 상황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고 설명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를 변화하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하는 선교의 핵심 과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술을 넘어, 하나님의 성육신적 사랑을 본받아 타자를 깊이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겸손의 영성이다.

성경은 상황화의 원리와 모델을 분명히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가 따라야 할 최고의 원형이며, 사도 바울의 사역은 복음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문화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리처드 니버의 유형론은 우리가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얼마나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폴 히버트의 비판적 상황화는 혼합주의의 위험을 피해 성경적 충실성과 문화적 적실성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안내한다.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고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상황화의 과제는 더욱 복잡하고 중요해졌다. 우리는 과거 선교사들이 범했던 문화적 오만과 일방주의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문화적 상대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복음의 절대적 진리를 타협하려는 유혹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결국, 성공적인 타문화권 변증은 정교한 이론이나 기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우리가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문화를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에 달려 있다. 복음의 씨앗이 낯선 문화의 토양 속에서 열매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인내와 기도가 필요하다. 이 느리고 더딘 과정을 기꺼이 감수하며, 복음이 그들 자신의 언어와 노래,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을 보는 기쁨이야말로, 이 힘겨운 여정을 걷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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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변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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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선교의 가장 중요하고도 섬세한 과제인 **'타문화권 변증'(Cross-Cultural Apologetics)**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는 단순히 서구 신학이 정립한 교리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넘어,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가진 고유한 세계관과 실존적 질문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언어와 논리로 기독교 진리의 타당성과 아름다움을 변호하고 설명하는 지적, 영적 대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대화의 기술과 신학적 원리를 집약한 개념이 바로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다.

상황화란, 복음의 핵심 진리를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특정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람들이 가장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복음을 표현하고 적용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선교사가 해외에서 행하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문화 속에서 신앙을 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는 신학적 작업이다.

본 보고서는 이처럼 선교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개념인 '타문화권 변증'과 '상황화'를 다각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상황화의 신학적 정의를 명확히 하고, 그것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종교 혼합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그 경계를 설정할 것이다. 이어서, 성육신과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 상황화의 성경적 근거와 원형을 살펴보고, 신학자들이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리처드 니버의 고전적 모델을 통해 분석한다. 나아가, 선교 인류학자 폴 히버트가 제시한 '비판적 상황화'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과 성경적 진리에 대한 충실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 실천적 지혜를 모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현대적 사례들을 통해 상황화가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창의적으로 적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변호하고 설명하기 위한 우리의 과제를 성찰하고자 한다.

제1부 상황화란 무엇인가: 정의와 경계 설정
상황화는 오늘날 선교학 분야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 중 하나이다. 그만큼 다양한 정의와 논쟁이 존재하지만, 핵심은 복음이 특정 문화 속 사람들에게 의미 있고 적실성 있게 전달되도록 하는 신학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1.1. 상황화의 정의와 필요성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용어는 1970년대 이후 선교학계에서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용어를 대체하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토착화가 주로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고 교회의 자립을 이루는 구조적인 측면에 집중했다면, 상황화는 그 범위를 넘어 복음 메시지 자체가 문화의 깊은 차원, 즉 세계관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다루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선교학자 딘 플레밍은 상황화를 "복음이 구체적인 역사적 혹은 문화적 상황 속에 성육신되는 역동적이면서 포괄적인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복음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새로운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고, 그 토양의 자양분을 흡수하여 새로운 형태의 열매를 맺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상황화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언어와 표현의 적응: 복음의 메시지를 해당 문화의 언어와 상징, 이야기, 속담 등을 사용해 사람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필요에 대한 응답: 그 문화가 직면한 구체적인 질문과 고통, 필요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한다.

문화 형태의 적용: 예배의 형식, 찬양의 음악 스타일, 교회의 리더십 구조 등을 해당 문화에 친숙하고 의미 있는 형태로 조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상황화가 필요한 이유는, 복음은 결코 문화와 분리된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복음은 이미 특정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 선교사가 자신의 문화적 표현 방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타문화에 그대로 이식하려 할 때, 복음은 불필요한 문화적 장벽에 부딪혀 거부당하게 된다. 따라서 상황화는 선택이 아닌, 효과적인 복음 전달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1.2. 상황화와 혼합주의: 넘지 말아야 할 선
상황화를 논할 때 가장 큰 우려와 비판은 그것이 '종교 혼합주의'(Syncretism)로 변질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혼합주의는 복음의 핵심 진리가 비기독교적인 종교나 문화 요소와 뒤섞여 그 본질이 왜곡되거나 상실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건강한 상황화와 위험한 혼합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성경의 최종적인 권위를 인정하는가에 있다.

건강한 상황화: 성경의 무오하고 충분한 권위를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는다. 문화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지만, 그 그릇의 모양이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려 할 때,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여 문화를 비판하고 변화시킨다. 즉, 복음이 문화 속으로 들어가되, 그 문화의 세계관을 복음의 진리로 변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위험한 혼합주의: 성경의 권위보다 문화의 가치나 사람들의 수용성을 더 우선시한다.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예: 그리스도의 유일성,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역사성 등)을 문화적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제거하거나 상대화한다. 이는 결국 복음이 문화에 동화되어 그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진정한 상황화는 복음과 문화 사이의 끊임없는 비판적 대화 과정이다. 복음은 문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 문화를 심판하고 새롭게 하는 변혁의 주체로 서야 한다. 이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령의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제2부 상황화의 성경적 기초와 원형
상황화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선교 전략이 아니다. 그 원형과 원리는 성경 자체,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 가장 분명하게 발견된다.

2.1. 최고의 모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인간으로 태어나, 아람어를 사용하고,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살아가신 성육신 사건은 상황화의 가장 완벽하고 심오한 모델이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오셨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늘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고, 추상적인 교리가 아닌 일상의 비유(씨 뿌리는 자, 잃어버린 양 등)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치셨다. 그는 사람들의 삶의 정황, 즉 그들의 기쁨과 슬픔, 질병과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이처럼 성육신은 선교가 수신자의 문화와 삶을 존중하며 그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성육신적 접근'을 해야 함을 가르친다. 선교사는 자신의 편안한 문화적 공간을 떠나, 불편하고 낯선 타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언어와 세계관을 배우는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2.2. 최고의 실천가: 사도 바울의 선교
신약성경에서 상황화의 원리를 가장 의식적이고 탁월하게 실천한 인물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다. 헬라, 로마, 유대 문화에 모두 정통했던 그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연하고 창의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

그의 상황화 원칙은 고린도전서 9장 19-23절에 명확히 나타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복음의 본질(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철저히 수신자 중심의 자세를 취했다.

아테네에서의 설교(행 17장):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철학자들에게 설교할 때, 그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대신 그들이 존경하는 시인의 글을 인용하고, 그들이 세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삼았다.

문화적 권리의 포기: 그는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된다면, 고기를 먹을 자신의 합법적인 권리조차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고전 8장). 이는 복음의 진전을 위해 자신의 문화적 편안함과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상황화의 중요한 자세임을 보여준다.

바울의 선교는 복음의 초문화적(supracultural) 진리와 그것을 담아내는 문화적 형태를 구별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그는 복음이 특정 문화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문화 속에서 의미 있게 뿌리내릴 수 있음을 삶으로 증명했다.

제3부 복음과 문화의 관계: 신학적 모델들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상황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이다. 20세기 신학자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그의 명저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다섯 가지 대표적인 유형을 제시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상황화의 다양한 접근 방식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Christ against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적대적 관계로 본다. 문화는 죄의 산물이며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 문화를 거부하고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 안으로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대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 재세례파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입장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장점이 있지만, 세상을 향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문화 변혁의 책임을 외면할 위험이 있다.

문화의 그리스도 (Christ of Culture): 첫 번째 유형과 정반대로,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와 조화가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를 인류 문화의 위대한 성취자요 완성자로 이해하며, 시대의 문화적 흐름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고대의 영지주의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입장은 세상과의 소통에 강점을 가지지만, 복음의 독특성과 예언자적 비판 정신을 상실하고 문화에 동화되어 혼합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문화 위의 그리스도 (Christ above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모두 긍정하지만, 둘 사이에 위계질서를 둔다. 문화(자연, 이성)는 그 자체로 선하지만 불완전하며, 그리스도(은혜, 계시)를 통해 완성된다고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스콜라 신학이 이 종합적인 모델에 해당한다. 이 입장은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신앙의 우위를 지키려 하지만, 교회가 문화를 지배하려는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긴장과 이중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라는 두 왕국의 시민으로서, 두 영역 모두에 충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 두 영역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사도 바울과 마르틴 루터가 이 유형의 대표자로 꼽힌다. 이 입장은 죄의 현실과 은혜의 역설을 깊이 통찰하지만, 사회 변혁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이 유형은 문화를 타락했지만 구속 가능한 대상으로 본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세상에 순응하는 대신,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복음의 능력으로 문화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 장 칼뱅 등이 이 변혁적 모델에 속한다. 이 입장은 가장 성경적인 선교 모델로 평가받으며, 상황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문화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문화를 복음으로 변혁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제4부 비판적 상황화: 균형을 향한 실천적 지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혼합주의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문화 변혁적인 상황화를 실천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방법론 중 하나가 선교 인류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가 제시한 '비판적 상황화'(Critical Contextualization) 모델이다.

히버트는 과거 선교사들이 범했던 두 가지 극단적인 오류를 지적한다. 하나는 현지 문화를 무조건 악한 것으로 정죄하고 서구 문화를 강요하는 '비상황화'(자문화중심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혼합주의에 빠지는 '무비판적 상황화'이다. '비판적 상황화'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성경적 진리와 문화적 형태를 분별하며 나아가는 네 단계의 과정이다.

1단계: 현지 문화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선교사는 판단을 유보하고, 먼저 현지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문화적 신념과 관습(예: 조상 제사)을 깊이 연구하고 이해한다. 그 관습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와 기능을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2단계: 관련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학적 연구: 선교사와 현지 신자들이 함께 모여, 연구된 문화적 관습과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예: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등)을 깊이 연구한다.

3단계: 성경의 빛 아래서 문화에 대한 비판적 평가: 공동체는 성경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자신들의 전통적인 문화 관습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 관습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들 중 무엇이 성경적인 원리와 부합하고, 무엇이 비성경적인 세계관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분별한다.

4단계: 새로운 상황화된 실천의 개발: 마지막으로, 공동체는 과거의 관습을 무조건 폐지하거나 그대로 수용하는 대신, 성경적인 의미를 담은 새로운 문화적 형태를 창조한다. 예를 들어, 조상 숭배의 의미가 담긴 제사 대신,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추도 예배'라는 새로운 기독교적 의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의 핵심은 선교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신자들 스스로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성경을 연구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성경적이면서도 문화적으로 적실성 있는 새로운 신앙의 형태를 만들어가도록 돕는 것이다.

제5부 타문화권 변증의 실제 사례들
타문화권 변증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선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창의적인 형태로 실천되어 왔다.

역사적 사례: 마테오 리치의 중국 선교: 16세기 말 중국에서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상황화의 선구적인 모델을 보여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불교 승려복을 입었으나, 중국 사회에서 더 존경받는 계층이 유학자임을 깨닫고 유학자의 복장을 하고 그들의 언어와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중국 고전의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했고, 조상에게 절하는 유교의 의례를 우상숭배가 아닌 사회적 존경의 표현으로 해석하여 허용하고자 했다. 비록 그의 방식은 훗날 교황청에 의해 '혼합주의'로 비판받고 금지되었지만, 타문화를 깊이 존중하고 그들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변역하려 했던 그의 성육신적 노력은 오늘날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

현대적 사례: 무슬림 상황화 스펙트럼 (C-스펙트럼): 이슬람권 선교 전문가인 존 트라비스(John Travis)는 무슬림 배경 신자(MBB) 공동체가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를 C1에서 C6까지의 스펙트럼으로 분류했다. 이 스펙트럼은 전통적인 서구식 교회(C1)부터, 이슬람 문화 형태를 사용하며 자신을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으로 정체화하는 공동체(C5)에 이르기까지, 상황화가 단일한 모델이 아니라 각 상황의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압력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C4, C5와 같은 급진적인 상황화 모델은 혼합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격렬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현대적 사례: '평화의 사람' 찾기: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눅 10:5-6)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 전략이다. 이는 타문화권에 들어갔을 때,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고 지역 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운 '평화의 사람'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이 사람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그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 복음이 자연스럽게 전파되도록 하는 통로로 삼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교사보다 앞서 이미 그 문화 속에서 일하고 계시며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신뢰에 바탕을 둔 관계 중심적 접근이다.  

결론: 변증을 넘어 문화의 변혁으로
타문화권 상황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고 설명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를 변화하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하는 선교의 핵심 과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술을 넘어, 하나님의 성육신적 사랑을 본받아 타자를 깊이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겸손의 영성이다.

성경은 상황화의 원리와 모델을 분명히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가 따라야 할 최고의 원형이며, 사도 바울의 사역은 복음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문화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리처드 니버의 유형론은 우리가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얼마나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폴 히버트의 비판적 상황화는 혼합주의의 위험을 피해 성경적 충실성과 문화적 적실성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안내한다.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고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상황화의 과제는 더욱 복잡하고 중요해졌다. 우리는 과거 선교사들이 범했던 문화적 오만과 일방주의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문화적 상대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복음의 절대적 진리를 타협하려는 유혹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결국, 성공적인 타문화권 변증은 정교한 이론이나 기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우리가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문화를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에 달려 있다. 복음의 씨앗이 낯선 문화의 토양 속에서 열매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인내와 기도가 필요하다. 이 느리고 더딘 과정을 기꺼이 감수하며, 복음이 그들 자신의 언어와 노래,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을 보는 기쁨이야말로, 이 힘겨운 여정을 걷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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