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전문인 선교학 49 과정
일상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의 토착적 신앙 체계.
종교신학 (Theology of Religion)

민간종교의 이해
거대 종교의 그늘 아래, 삶과 함께 숨 쉬는 신앙: 일상 문제 해결을 위한 토착적 신앙 체계와 원리들
서론: 삶의 필요가 신앙을 만날 때
우리가 '종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흔히 장엄한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고요한 사찰의 불상, 혹은 두꺼운 경전의 심오한 교리를 연상한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과 같은 거대 세계 종교들은 구원, 해탈, 영생과 같은 거시적이고 궁극적인 질문에 답하며 인류의 정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 담론의 그늘 아래, 인류의 훨씬 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영역을 지배해 온 또 다른 차원의 신앙 체계가 있다. 그것은 자녀의 갑작스러운 고열에 밤잠을 설치는 어머니의 기도,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밭을 보며 하늘에 비를 비는 농부의 간절함,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행운을 빌거나, 이사를 앞두고 좋지 않은 기운을 떨쳐내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신앙이다. 이것이 바로 민간신앙(Folk Religion), 즉 삶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역의 토착적 신앙 체계이다.
민간신앙은 특정 창시자나 통일된 경전, 체계적인 교리를 갖추지 않는다. 그것은 한 지역의 사람들이 수천 년에 걸쳐 그들의 땅과 기후, 역사와 문화 속에서 삶의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에 맞서 싸우며 축적해 온 생존의 지혜이자 영적인 운영체제(Operating System)이다. 그것의 주된 관심사는 내세의 구원이 아니라 현세의 안녕이며, 추상적인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이다. 많은 경우 민간신앙은 공식적인 거대 종교와 공존하거나 그 속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가장 깊은 무의식과 일상 관습을 지배하는 ‘기층문화’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인류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대 종교의 화려한 건축물뿐만 아니라, 마을 어귀의 낡은 서낭당과 평범한 가정집 부엌에 깃든 소박한 믿음의 세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본고는 바로 이처럼 삶과 가장 밀착하여 숨 쉬는 토착적 신앙 체계, 즉 민간신앙이 어떻게 일상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나름의 원리와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민간신앙의 본질적인 특징을 규명하고, 그 기저에 흐르는 핵심적인 작동 원리들, 즉 애니미즘적 세계관, 조화와 균형의 원리, 그리고 한국적 맥락에서의 ‘한(恨)과 풀이’의 동학을 분석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원리들이 무당, 마을제, 가정신앙과 같은 구체적인 행위자와 의례를 통해 어떻게 실천되는지를 살펴보고, 과학 기술 시대인 오늘날에도 민간신앙이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를 고찰할 것이다. 이 여정은 민간신앙을 단순히 '미신'으로 치부하는 단편적인 시각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불안에 응답하며 공동체의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유대를 지탱해 온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지혜의 한 형태를 이해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I. 민간신앙의 본질적 특징: 삶의 필요에 응답하다
민간신앙은 거대 종교와는 구별되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특징들은 모두 민간신앙이 철학적 사유나 내세의 구원보다는, 당면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용적 목적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1. 현세 중심적이고 기복적인 성격
민간신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관심사가 철저히 **현세(現世)**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계 종교들이 '죄로부터의 구원', '윤회의 고리로부터의 해탈', '알라의 뜻에 대한 복종' 등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반면, 민간신앙의 목표는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것은 가족의 건강, 자녀의 출산과 성장, 농사의 풍요, 사업의 번창, 시험 합격, 그리고 질병이나 사고와 같은 불행을 막는 것이다. 즉, 복을 빌고(기복, 祈福), 재앙을 피하는(벽사, 辟邪) 것이 신앙 행위의 핵심 동기이다.
이러한 기복 신앙은 종종 고등 종교의 관점에서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의 발현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자연환경과 불안정한 사회 구조 속에서 생존 자체가 가장 큰 과제였던 민중의 입장에서, 현세의 안정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은 가장 절실하고 자연스러운 신앙의 형태였다. 그들에게 신앙은 삶과 분리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실제적인 수단이었다. 신들과 영들은 추상적인 경배의 대상이기 이전에,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도움을 주거나 해를 끼칠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자들이었다.
2. 혼합주의적 포용성
민간신앙은 배타적인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나 사상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혼합주의(Syncretism)'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민간신앙은 새로운 종교가 들어왔을 때 그것과 대립하기보다는, 그 종교의 신이나 교리, 의례 중에서 자신들의 현세적인 필요를 채우는 데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요소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토착화시킨다.
한국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민간신앙은 고유의 샤머니즘(무속)을 기반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불교, 도교, 그리고 유교의 요소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풍성하고 복합적인 체계를 형성해왔다. 예를 들어, 무당(샤먼)이 모시는 신들의 목록에는 단군과 같은 민족 시조, 산신이나 용왕과 같은 자연신, 최영 장군과 같은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불교의 칠성신(북두칠성)이나 제석신(환인)이 포함되기도 한다. 사찰의 삼성각에 산신, 칠성, 독성(나반존자)을 함께 모시는 것 역시 불교가 한국의 토착 신앙과 융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혼합주의적 성격은 민간신앙이 교리적 순수성보다는 실용적 효과성을 더 중시하며, 외부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살아남아 온 비결을 보여준다.
3. 비체계적이고 구전적인 전통
민간신앙은 통일된 경전이나 중앙 집권적인 교단 조직, 그리고 체계화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특정 종교의 창시자가 논리적으로 구축한 시스템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의 삶 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고 축적된 신앙 관습의 총체이다. 따라서 그 신념과 의례는 성문화된 텍스트보다는 **구전(口傳)**과 실천을 통해 세대 간에 전승된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통해 도깨비와 귀신의 존재를 배우고, 정월대보름에 달집을 태우고 다리 밟기를 하며 한 해의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는 법을 몸으로 익힌다. 무당은 스승 무당의 굿(의례)을 보고 배우며, 신내림이라는 강렬한 체험을 통해 영적 세계와의 소통 능력을 전수받는다. 이처럼 민간신앙의 지식은 책을 통해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경험되고 체화되는 것이다. 이는 민간신앙이 논리적 일관성이나 체계성은 부족할지라도, 사람들의 감정과 실존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II. 민간신앙의 작동 원리: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교섭
민간신앙이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기저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 즉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보이는 인간 세계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세계관이 깔려 있다. 삶의 문제들은 이 두 세계 사이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발생하며, 해결책은 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다.
1. 만물에 깃든 영적 실재: 애니미즘적 세계관
민간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세계관은 **'애니미즘(Animism)'**이다. 애니미즘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바위, 강, 산, 하늘의 해와 달 등 세상의 모든 사물에 영혼이나 정령(spirit)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이 세계관 안에서 자연은 단순히 인간이 이용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각각의 의지와 감정을 가진 수많은 영적 존재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이 영적 세계는 저 멀리 하늘에 있는 초월적인 공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과 겹쳐 있는 내재적인(immanent) 세계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은 마을 어귀의 서낭나무에 깃들어 있고, 집안의 평안을 관장하는 성주신은 대들보에, 재물을 담당하는 업신은 곳간에, 그리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은 아궁이에 좌정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필연적으로 이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우물을 더럽히면 물의 신이 노하고, 함부로 나무를 베면 산신이 벌을 내리며, 부엌을 불결하게 하면 조왕신이 떠나버린다. 이처럼 민간신앙의 세계에서 삶은 끊임없이 주변의 영적 존재들과 소통하고, 협상하며, 때로는 갈등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2. 조화와 균형의 원리: 관계의 회복
민간신앙에서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적 세계를 정복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평안하고 건강한 상태는 바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영적 존재들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반면, 질병, 재난, 불운과 같은 모든 문제들은 이 조화와 균형이 깨어진 결과로 이해된다.
균형이 깨지는 원인은 다양하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금기를 어기거나(예: 산신제 기간에 산에 오르는 것), 부정한 것(예: 피, 죽음)에 접촉하여 영적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혔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혹은 인간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원혼, 怨魂)이나 악의적인 잡귀들이 인간의 삶에 침범하여 해코지를 할 때도 균형은 깨진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과정은 곧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균형을 되찾는 과정이다. 만약 인간의 잘못이 원인이라면, 제물을 바치고 정중히 사과하여 노한 신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 부정한 것에 의해 문제가 생겼다면, 정화 의식을 통해 부정을 씻어내야 한다. 원혼이나 잡귀가 문제라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원한을 풀어주거나(달램), 혹은 그들을 위협하여 쫓아내야(축출) 한다. 이 모든 과정의 목표는 갈등 상태에 있는 두 세계를 다시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존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3. 한(恨)과 풀이의 동학: 한국 민간신앙의 심층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한국적 맥락에서 가장 심도 있게 나타나는 개념이 바로 **'한(恨)과 풀이'**의 동학(dynamics)이다. '한'은 억울하게 죽거나, 살아서 이루지 못한 소망 때문에 깊은 원한과 슬픔이 응어리진 상태를 말한다. 민간신앙의 세계관에서 '한'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는 강력한 영적 에너지로서, 이승과 저승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병이나 불운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한'을 품고 죽은 영혼, 즉 원혼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로 인식된다.
따라서 원혼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한'을 '풀어주는(Puri)' 것이다. '풀이'는 엉킨 실타래를 풀 듯, 응어리진 원한의 마디마디를 풀어주는 의례적 과정을 의미한다. 한국 무속의 굿(shamanic ritual)은 바로 이 '한풀이'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굿판에서 무당은 원혼을 불러내어 그의 억울한 사연을 대신 통곡하며 이야기하고, 살아있는 가족들의 사과를 받아내며, 그가 원했던 것들을 상징적으로 이루어줌으로써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준다. 이 과정을 통해 원혼은 비로소 한을 풀고 편안히 저승으로 가거나, 때로는 가족을 지켜주는 조상신으로 좌정하게 된다. 이 '한풀이'의 과정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리던 살아있는 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깨어졌던 공동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강력한 심리적, 사회적 치유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III. 문제 해결의 실천: 행위자와 의례
민간신앙의 원리들은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영적 전문가와 공동체적 의례를 통해 실제 삶의 문제 해결 과정으로 나타난다.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무당의 굿에서부터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 그리고 가정의 평안을 비는 가정신앙에 이르기까지, 민간신앙은 삶의 모든 차원에서 실천된다.
1. 영적 중재자, 무당
삶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평범한 사람들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영적 존재가 관련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때 필요한 전문가가 바로 **무당(샤먼)**이다. 무당은 신내림이라는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영적 세계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영매(medium)이자 중재자이다. 그들은 의사처럼 문제의 영적 원인을 진단하고(점복, 占卜), 그에 맞는 의례적 처방을 내린다.
무당이 주관하는 가장 대표적인 의례인 굿은 단순한 미신 행위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한 편의 종합적인 드라마이다. 굿판에서 무당은 화려한 춤과 노래를 통해 신들을 불러 모시고, 신의 목소리를 빌어 문제의 원인을 알려주며, 때로는 작두 위를 걷는 등 초인적인 행위를 통해 신의 능력을 과시한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원혼의 한을 풀어주거나, 잡귀를 위협하여 쫓아내는 등, 인간과 영적 세계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사제이자 변호사의 역할을 수행한다. 무당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문제의 원인을 설명해주고 해결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혼돈스러운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고 통제감을 회복시켜주는 중요한 심리적 치유자의 역할을 한다.
2.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마을제
개인의 문제를 넘어,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공동체적 의례가 바로 **마을제(洞祭)**이다. 농경 사회에서 가뭄, 홍수, 전염병과 같은 재난은 마을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정기적으로(주로 정월과 시월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서낭신, 장승, 산신 등)에게 제사를 올림으로써, 한 해 동안의 재앙을 막고 풍요를 기원했다.
마을제는 단순한 제사를 넘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제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은 함께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 비용을 모으며 협동 정신을 기른다. 제사 기간 동안에는 부정한 행동을 삼가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며 공동체적 규범을 재확인한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제사에 올렸던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음복, 飮福), 풍물놀이와 춤을 즐기며 마을의 축제를 벌인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단순한 거주민의 집합이 아니라, 같은 신을 섬기고 운명을 공유하는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화한다.
3. 삶의 주기와 가정신앙
민간신앙은 거시적인 공동체뿐만 아니라, 가장 미시적인 단위인 가정의 일상과 삶의 주기에도 깊숙이 관여한다. 전통적인 가옥 구조 속에는 집안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다양한 **가신(家神)**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집의 최고신인 성주신, 부엌을 관장하며 가족의 행실을 옥황상제에게 보고하는 조왕신, 아기의 출산과 성장을 돕는 삼신할머니, 재물을 관장하는 업신 등이 대표적이다.
주부들은 매일 아침 정화수를 떠놓고 조왕신에게 가족의 평안을 빌고, 고사를 지내거나 새로 장을 담글 때는 성주신에게 먼저 고하며, 아기가 태어나면 삼신할머니에게 삼칠일 동안 미역국과 밥을 올렸다. 이러한 소박한 가정신앙은 삶의 중요한 통과 의례(출생, 결혼, 죽음)와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이 신성한 의미와 질서 속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것은 여성들이 가정이라는 공간 안에서 가족의 안녕을 책임지는 중요한 종교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IV. 현대 사회 속 민간신앙의 지속과 변용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민간신앙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미신으로 여겨져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민간신앙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저변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다.
1. 과학 시대의 역설적 생명력
민간신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과학이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적 불안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질병의 원인이 세균임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왜 하필 나에게, 왜 지금 이 순간에 이 병이 찾아왔는가?"라는 '의미'의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과학은 경제 현상의 확률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개인의 불안을 잠재워주지는 못한다.
민간신앙은 바로 이처럼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우연과 불운, 그리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에 의미를 부여하고 대처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중요한 시험이나 사업 계약을 앞둔 사람들이 점집을 찾고, 자녀의 대학 입시를 위해 100일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현대인들 역시 삶의 중요한 순간에 여전히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통해 위안과 통제감을 얻고자 하는 깊은 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도시화와 개인화에 따른 변화
물론 현대 사회의 민간신앙은 전통 사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농업 중심의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마을제와 같은 집단적 의례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관광 상품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공동체적 신앙이 약화된 자리를 개인화된 형태의 신앙이 채우고 있다.
과거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주던 무당은 이제 도시의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신당' 또는 '철학관'을 차리고, 찾아오는 고객들의 개인적인 고민, 즉 입시, 취업, 사업, 연애, 부부 갈등과 같은 현대적인 문제에 대한 카운슬러 역할을 수행한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온라인 점집'이나 '전화 운세 상담'이 성행하는 것 역시 민간신앙이 현대 기술과 만나 변용된 모습이다. 문제의 종류는 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힘의 도움을 받아 미래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본적인 원리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3. 세계 종교와의 공존과 긴장
현대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많은 사람들이 공식적인 종교(기독교, 불교 등)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민간신앙적 관습을 병행하는 '이중적 신앙 행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가 자녀의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보거나, 불심이 깊은 불자가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따지는 것은 흔한 모습이다. 이는 공식 종교가 제공하는 거시적인 구원관과 윤리 체계와는 별개로, 일상의 구체적인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여전히 토착적인 민간신앙의 세계관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공식 종교와 민간신앙 사이에 지속적인 긴장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공식 종교의 지도자들은 종종 민간신앙을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배격하려 하지만, 평신도들의 삶 속에서는 두 신앙 체계가 갈등 없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거나 융합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민간신앙이 수천 년간 이 땅의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문화적 DNA와 같음을 시사한다.
결론: 인간의 불안에 답하는 가장 오래된 지혜
민간신앙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인 믿음의 형태이다. 그것은 정교한 신학이나 심오한 철학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예측 불가능한 세상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불안과 염원에 가장 정직하고 직접적으로 응답해왔다. 현세의 복을 빌고 재앙을 피하려는 기복적인 성격, 만물과 소통하려는 애니미즘적 세계관, 그리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여 조화를 이루려는 지향점은 모두 인간이 어떻게든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의미와 질서를 찾고, 통제감을 확보하며, 공동체 속에서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처절한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단순히 비합리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으로 폄하하는 것은, 인류가 수만 년 동안 발전시켜 온 복합적이고 탄력적인 문화적 생존 전략의 한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민간신앙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존재가 본질적으로 연약하며, 자신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초월적인 도움을 구하는 영적인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물론, 민간신앙이 운명론에 빠지게 하거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등 부정적인 측면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생태적 지혜,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정의에 대한 갈망, 그리고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연대의 정신이 담겨 있다. 과학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그 형태를 바꾸며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는 민간신앙의 모습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이란 이성만으로는 결코 다 채울 수 없는 깊고 신비로운 차원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거대 종교의 장엄한 교향곡 속에서 낮고 조용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맥박 소리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