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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전문인 선교학 49 과정

마태복음의 제자도,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성령과 세계 선교

성경신학 및 배경

보내심 받은 공동체: 마태복음의 제자도와 누가-사도행전의 성령을 통한 세계 선교

서론: 신약 선교 신학의 두 기둥
신약성경은 구약 전체를 통해 점진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결정적으로 성취되고, 이제 교회를 통해 온 세상으로 확장되는지를 증언하는 역동적인 문서이다. 이 위대한 선교적 서사 속에서 각 복음서는 저마다의 독특한 신학적 관점과 강조점을 통해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의 본질과 방법, 그리고 동력이 무엇인지를 다각적으로 조명한다. 그중에서도 마태복음과 누가-사도행전은 신약의 선교 신학을 떠받치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마태복음은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내용으로서의 '제자도'(Discipleship)를 심도 있게 제시한다. 마태에게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한번 전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온전한 제자로 삼아,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살아내는 대안적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포괄적인 과정이다. 이는 선교의 '무엇'과 '왜'에 대한 근본적인 답변을 제공하며, 선교적 사명의 깊이와 내용을 규정한다.

반면, 누가는 그의 두 권의 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선교의 동력이자 주체로서의 '성령'(Holy Spirit)의 사역을 장대하게 펼쳐 보인다. 누가에게 선교는 인간의 계획이나 전략, 혹은 열심으로 성취되는 과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약속대로 부어주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과 인도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이다. 이는 선교의 '어떻게'에 대한 답변이며, 교회가 땅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밝힌다.

본 강의안은 이 두 가지 핵심적인 신학적 주제, 즉 마태복음의 제자도와 누가-사도행전의 성령론이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며 온전한 선교의 그림을 완성하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마태복음의 지상대위임명령을 중심으로 '제자 삼는 사역'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며, 산상수훈이 제시하는 제자의 삶이 어떻게 그 자체로 선교적 증거가 되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어서, 누가-사도행전으로 넘어가, 선교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고,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선교의 전략가이자 감독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할을 추적할 것이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깊이 있는 제자도 없는 성령의 능력은 방향을 잃기 쉽고, 성령의 능력 없는 제자도는 무기력한 율법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국, 21세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온전한 선교는 마태가 강조하는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도의 깊이와, 누가가 증언하는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성령의 능력이 역동적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제1부 마태복음의 선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마태복음은 유대적 배경을 강하게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명확한 선교 명령을 담고 있는 복음서이다. 마태에게 예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넘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그의 구원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 왕의 통치 아래로 모든 민족을 초청하여 그의 백성, 즉 제자로 삼는 것이다.

1.1. 지상대위임명령: 제자 삼는 사역으로서의 선교 (마태복음 28:18-20)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면인 지상대위임명령은 복음서 전체의 결론이자, 교회가 시작해야 할 새로운 사명의 장엄한 서곡이다. 이 명령은 선교의 권위, 과업, 범위, 내용, 그리고 약속을 명확히 제시하며, 마태가 이해하는 선교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명령의 핵심 동사는 '가서'나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가 아니라, 유일한 명령형 동사인 "제자를 삼으라"(μαθητ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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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σατε)이다. '가서',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이 중심 명령을 수행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분사들이다. 이는 마태에게 선교의 본질이 단순히 지리적으로 이동하여 복음을 한번 선포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총체적이고 과정적인 사역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제자 삼는 사역의 권위는 부활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에 근거한다. 교회는 자신의 힘이나 지혜가 아닌,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이 사명을 감당한다. 선교는 불확실한 모험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확신에 찬 행위이다.   

선교의 범위는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모든 민족"(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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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ἔθνη)으로 확장된다. 이는 마태복음 초반 동방박사들의 경배(2장)에서 암시되고,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8:11)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고되었던 보편적 구원의 비전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순간이다. 이는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모든 족속"을 향한 축복의 성취이기도 하다.   

제자 삼는 사역의 과정은 '세례를 베푸는 것'과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한 개인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와, 가시적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입문 의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자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더 중요한 과정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성경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삶 속에서 순종으로 나타나도록 양육하는 전인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약속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선포되었던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약속은, 이제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영원한 약속으로 되돌아온다. 교회는 결코 홀로 선교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의 임재로 늘 함께하시며 이 사명을 친히 이루어 가신다.   

1.2. 제자도의 내용: 산상수훈과 하나님 나라의 윤리 (마태복음 5-7장)
그렇다면 지상명령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신 "분부한 모든 것"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에서 가장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 산상수훈은 흔히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 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강령'으로 불리며, 제자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제자의 정체성: 팔복 (5:3-12)
산상수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팔복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부, 힘, 명예, 자기만족)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제시한다. 제자는 자신의 영적 파산을 인정하고(심령이 가난함), 세상의 죄와 고통에 대해 애통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온유하고, 세상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며, 깨어진 관계 속에서 화평을 만들고, 그 의를 위해 기꺼이 박해를 감수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내면적 성품 자체가 세상과 구별되는 제자의 정체성이며,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제자의 역할: 소금과 빛 (5:13-16)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신다.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듯이, 제자들은 죄로 부패해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력을 보존하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맛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제자들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와 선하심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소금과 빛의 역할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세상"을 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제자들의 구별된 삶, 즉 '착한 행실'은 그 자체로 선교적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 자신을 칭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통로가 된다.

제자의 순종: 더 높은 의 (5:17-48)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시며, 율법의 근본정신을 회복시키신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마음의 분노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심화시키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마음의 음욕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내면화하신다. 또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등 보복의 법을 넘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비폭력 저항을 가르치시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왜곡된 가르침을 넘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는 혁명적인 사랑을 명령하신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이다. 이러한 급진적인 윤리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 자신을 내어드릴 때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처럼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사랑과 용서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가장 강력하게 증거하는 선교적 실천이다.

1.3. 제자도의 대가와 공동체
마태복음은 제자도가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 요구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어려움을 감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대한 주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이나 재물,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10:37-39).

그러나 이 혹독한 요구는 고립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도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제자 공동체는 어린아이와 같이 스스로를 낮추는 자들이 모인 곳이며(18:1-4), 죄를 지은 형제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권면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치리하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18:15-22)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이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이 그리는 선교는 '제자 삼는 것'이며, 제자 삼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이 제자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살아냄으로써,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강력한 대안 사회가 되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드는 선교의 전초기지가 된다.

제2부 누가-사도행전의 선교: 성령의 능력으로 땅끝까지
누가는 그의 두 권의 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과 인도하심을 통해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동체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가는지를 장대하게 그려낸다. 마태가 선교의 내용으로서의 '제자도'에 집중했다면, 누가는 선교의 동력이자 주체로서의 '성령'의 사역에 집중한다. 누가에게 선교는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이야기'이다.

2.1. 선교의 약속과 위임: 성령을 기다리라 (누가복음 24:46-49; 사도행전 1:8)
누가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시작은 마태복음의 지상명령과는 다른 독특한 강조점을 가진 위임 명령을 제시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부활이 성경의 성취임을 설명하시고,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다(눅 24:47). 그리고 제자들은 바로 "이 모든 일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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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ρτυρες)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이 증인의 사명은 즉시 시작될 수 없었다. 예수님은 결정적인 조건을 제시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사도행전 1장 8절은 이 약속을 더욱 구체화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두 본문은 누가의 선교 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첫째, 선교는 인간의 결단이나 조직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약속'이신 성령을 기다리고 그 능력을 덧입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성령 없이는 선교도 없다.
둘째, 선교의 핵심 역할은 '증인'이 되는 것이다. 증인은 자신의 철학이나 주장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속 사건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셋째, 사도행전 1장 8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를 요약하는 '목차' 역할을 한다. 복음은 예루살렘(동일 문화권)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유사 및 적대 문화권)를 거쳐, 궁극적으로 "땅 끝"(타문화권)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 모든 확장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시다.

2.2. 오순절 성령 강림: 선교하는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2장)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교회가 선교적 공동체로 탄생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 그리고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현상은 성령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이 사건은 신학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바벨탑의 역전: 창세기 11장에서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언어가 혼잡해지고 인류가 흩어졌던 바벨탑 사건이 오순절에 역전된다. 성령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자신의 방언으로' 듣게 하심으로써, 복음 안에서 인류가 새롭게 하나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 즉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증인을 향한 능력 부여: 성령 강림의 즉각적인 결과는 제자들의 변화였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가 담대하게 일어나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권능'이다. 성령은 두려워하는 자들을 담대한 증인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선교의 첫 열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행 2:41). 이는 교회가 그 탄생의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선교적 공동체이며, 성령의 능력에 의한 복음 선포가 교회를 낳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2.3. 성령, 선교의 주도자이자 전략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누가는 성령이 단순히 선교를 위한 추상적인 힘이 아니라, 선교의 모든 과정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인도하며 감독하시는 인격적인 주체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기보다 '성령의 행전'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하다.   

개인을 인도하시는 성령: 성령은 빌립을 광야 길로 인도하여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하시고, 그에게 복음을 설명하게 하여 세례를 베풀게 하신다(행 8:26-39). 이는 복음이 유대를 넘어 아프리카로 향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장벽을 허무시는 성령: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가장 큰 장벽을 허무신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은 환상을 통해 베드로의 편견을 깨시고, 그를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신다(행 10장).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 위에도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것과 똑같이 임하신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이방인 선교가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뜻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를 파송하시는 성령: 최초의 공식적인 이방 선교사를 파송하신 주체도 안디옥 교회의 인간 지도자들이 아니라 성령이셨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교회는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을 안수하고 파송했을 뿐이다.   

선교 여정을 감독하시는 성령: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에 성령은 그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막으시기도 하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그리고 밤에 환상을 통해 바울을 유럽의 첫 관문인 마게도냐로 부르신다(행 16:9-10). 이는 선교의 전략과 방향이 인간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2.4. 성령 충만한 선교의 특징
누가가 묘사하는 성령 충만한 선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첫째, 담대한 복음 선포이다. 제자들은 박해와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4:31). 이 담대함(파르레시아, παρρησία)은 성령 충만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둘째, 표적과 기사의 동반이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행 3장), 수많은 병자를 고치는 등(행 5장),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적과 기사가 늘 함께했다. 이는 메시지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역할을 했다.   


셋째, 매력적인 공동체의 형성이다. 초대교회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행 2:42-47). 이러한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강력한 증거가 되어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넷째, 고난 속에서의 기쁨이다.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면서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행 5:41).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패배가 아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참여하는 영광으로 여기게 하셨다.

결론: 제자도와 성령, 온전한 선교를 위한 두 날개
마태복음과 누가-사도행전은 각각 제자도와 성령이라는 독특한 렌즈를 통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조명하지만, 결코 서로 모순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은 온전한 선교를 위해 반드시 함께 가야 할 새의 두 날개와 같다.

마태가 강조하는 제자도는 선교의 목표와 내용을 분명히 한다. 선교는 단순히 사람들의 머리에 지식을 채우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이끄는 전인적인 과정이다. 산상수훈의 급진적인 윤리를 살아내려는 치열한 몸부림 없는 선교는 값싼 복음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제자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수준의 제자도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누가의 성령론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누가는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유일한 동력이 성령의 능력임을 증언한다. 성령은 두려운 자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편견에 사로잡힌 자의 마음을 여시며, 선교의 모든 걸음을 친히 인도하시는 주권적인 주체이시다. 성령의 역동적인 임재와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는 제자도는 결국 생명력 없는 율법주의나 인간적인 프로그램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선교의 모습은 이 두 가지 신학적 통찰의 창조적 결합에 있다. 우리는 마태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삼기 위해 그의 모든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누가의 증언을 따라, 우리의 모든 계획과 전략을 내려놓고 오직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셔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며 땅끝까지 나아가는 담대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깊이 있는 제자도와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이 함께할 때, 교회는 비로소 21세기의 복잡한 도전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적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의 선교 연구

보내심 받은 공동체: 마태복음의 제자도와 누가-사도행전의 성령을 통한 세계 선교

서론: 신약 선교 신학의 두 기둥
신약성경은 구약 전체를 통해 점진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결정적으로 성취되고, 이제 교회를 통해 온 세상으로 확장되는지를 증언하는 역동적인 문서이다. 이 위대한 선교적 서사 속에서 각 복음서는 저마다의 독특한 신학적 관점과 강조점을 통해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의 본질과 방법, 그리고 동력이 무엇인지를 다각적으로 조명한다. 그중에서도 마태복음과 누가-사도행전은 신약의 선교 신학을 떠받치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마태복음은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내용으로서의 '제자도'(Discipleship)를 심도 있게 제시한다. 마태에게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한번 전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온전한 제자로 삼아,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살아내는 대안적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포괄적인 과정이다. 이는 선교의 '무엇'과 '왜'에 대한 근본적인 답변을 제공하며, 선교적 사명의 깊이와 내용을 규정한다.

반면, 누가는 그의 두 권의 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선교의 동력이자 주체로서의 '성령'(Holy Spirit)의 사역을 장대하게 펼쳐 보인다. 누가에게 선교는 인간의 계획이나 전략, 혹은 열심으로 성취되는 과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약속대로 부어주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과 인도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이다. 이는 선교의 '어떻게'에 대한 답변이며, 교회가 땅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밝힌다.

본 강의안은 이 두 가지 핵심적인 신학적 주제, 즉 마태복음의 제자도와 누가-사도행전의 성령론이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며 온전한 선교의 그림을 완성하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마태복음의 지상대위임명령을 중심으로 '제자 삼는 사역'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며, 산상수훈이 제시하는 제자의 삶이 어떻게 그 자체로 선교적 증거가 되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어서, 누가-사도행전으로 넘어가, 선교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고,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선교의 전략가이자 감독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할을 추적할 것이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깊이 있는 제자도 없는 성령의 능력은 방향을 잃기 쉽고, 성령의 능력 없는 제자도는 무기력한 율법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국, 21세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온전한 선교는 마태가 강조하는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도의 깊이와, 누가가 증언하는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성령의 능력이 역동적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제1부 마태복음의 선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마태복음은 유대적 배경을 강하게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명확한 선교 명령을 담고 있는 복음서이다. 마태에게 예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넘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그의 구원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 왕의 통치 아래로 모든 민족을 초청하여 그의 백성, 즉 제자로 삼는 것이다.

1.1. 지상대위임명령: 제자 삼는 사역으로서의 선교 (마태복음 28:18-20)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면인 지상대위임명령은 복음서 전체의 결론이자, 교회가 시작해야 할 새로운 사명의 장엄한 서곡이다. 이 명령은 선교의 권위, 과업, 범위, 내용, 그리고 약속을 명확히 제시하며, 마태가 이해하는 선교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명령의 핵심 동사는 '가서'나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가 아니라, 유일한 명령형 동사인 "제자를 삼으라"(μαθητ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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σατε)이다. '가서',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이 중심 명령을 수행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분사들이다. 이는 마태에게 선교의 본질이 단순히 지리적으로 이동하여 복음을 한번 선포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총체적이고 과정적인 사역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제자 삼는 사역의 권위는 부활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에 근거한다. 교회는 자신의 힘이나 지혜가 아닌,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이 사명을 감당한다. 선교는 불확실한 모험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확신에 찬 행위이다.  

선교의 범위는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모든 민족"(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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ἔθνη)으로 확장된다. 이는 마태복음 초반 동방박사들의 경배(2장)에서 암시되고,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8:11)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고되었던 보편적 구원의 비전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순간이다. 이는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모든 족속"을 향한 축복의 성취이기도 하다.  

제자 삼는 사역의 과정은 '세례를 베푸는 것'과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한 개인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와, 가시적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입문 의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자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더 중요한 과정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성경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삶 속에서 순종으로 나타나도록 양육하는 전인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약속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선포되었던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약속은, 이제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영원한 약속으로 되돌아온다. 교회는 결코 홀로 선교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의 임재로 늘 함께하시며 이 사명을 친히 이루어 가신다.  

1.2. 제자도의 내용: 산상수훈과 하나님 나라의 윤리 (마태복음 5-7장)
그렇다면 지상명령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신 "분부한 모든 것"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에서 가장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 산상수훈은 흔히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 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강령'으로 불리며, 제자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제자의 정체성: 팔복 (5:3-12)
산상수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팔복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부, 힘, 명예, 자기만족)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제시한다. 제자는 자신의 영적 파산을 인정하고(심령이 가난함), 세상의 죄와 고통에 대해 애통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온유하고, 세상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며, 깨어진 관계 속에서 화평을 만들고, 그 의를 위해 기꺼이 박해를 감수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내면적 성품 자체가 세상과 구별되는 제자의 정체성이며,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제자의 역할: 소금과 빛 (5:13-16)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신다.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듯이, 제자들은 죄로 부패해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력을 보존하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맛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제자들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와 선하심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소금과 빛의 역할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세상"을 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제자들의 구별된 삶, 즉 '착한 행실'은 그 자체로 선교적 목적을 가진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 자신을 칭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통로가 된다.

제자의 순종: 더 높은 의 (5:17-48)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시며, 율법의 근본정신을 회복시키신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마음의 분노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심화시키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마음의 음욕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내면화하신다. 또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등 보복의 법을 넘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비폭력 저항을 가르치시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왜곡된 가르침을 넘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는 혁명적인 사랑을 명령하신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이다. 이러한 급진적인 윤리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 자신을 내어드릴 때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처럼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사랑과 용서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가장 강력하게 증거하는 선교적 실천이다.

1.3. 제자도의 대가와 공동체
마태복음은 제자도가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 요구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어려움을 감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대한 주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이나 재물,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10:37-39).

그러나 이 혹독한 요구는 고립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도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제자 공동체는 어린아이와 같이 스스로를 낮추는 자들이 모인 곳이며(18:1-4), 죄를 지은 형제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권면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치리하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18:15-22)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이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이 그리는 선교는 '제자 삼는 것'이며, 제자 삼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이 제자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살아냄으로써,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강력한 대안 사회가 되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드는 선교의 전초기지가 된다.

제2부 누가-사도행전의 선교: 성령의 능력으로 땅끝까지
누가는 그의 두 권의 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과 인도하심을 통해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동체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가는지를 장대하게 그려낸다. 마태가 선교의 내용으로서의 '제자도'에 집중했다면, 누가는 선교의 동력이자 주체로서의 '성령'의 사역에 집중한다. 누가에게 선교는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이야기'이다.

2.1. 선교의 약속과 위임: 성령을 기다리라 (누가복음 24:46-49; 사도행전 1:8)
누가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시작은 마태복음의 지상명령과는 다른 독특한 강조점을 가진 위임 명령을 제시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부활이 성경의 성취임을 설명하시고,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다(눅 24:47). 그리고 제자들은 바로 "이 모든 일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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ρτυρες)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이 증인의 사명은 즉시 시작될 수 없었다. 예수님은 결정적인 조건을 제시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사도행전 1장 8절은 이 약속을 더욱 구체화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두 본문은 누가의 선교 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첫째, 선교는 인간의 결단이나 조직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약속'이신 성령을 기다리고 그 능력을 덧입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성령 없이는 선교도 없다.
둘째, 선교의 핵심 역할은 '증인'이 되는 것이다. 증인은 자신의 철학이나 주장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속 사건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셋째, 사도행전 1장 8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를 요약하는 '목차' 역할을 한다. 복음은 예루살렘(동일 문화권)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유사 및 적대 문화권)를 거쳐, 궁극적으로 "땅 끝"(타문화권)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 모든 확장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시다.

2.2. 오순절 성령 강림: 선교하는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2장)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교회가 선교적 공동체로 탄생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 그리고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현상은 성령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이 사건은 신학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바벨탑의 역전: 창세기 11장에서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언어가 혼잡해지고 인류가 흩어졌던 바벨탑 사건이 오순절에 역전된다. 성령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자신의 방언으로' 듣게 하심으로써, 복음 안에서 인류가 새롭게 하나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 즉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증인을 향한 능력 부여: 성령 강림의 즉각적인 결과는 제자들의 변화였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가 담대하게 일어나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권능'이다. 성령은 두려워하는 자들을 담대한 증인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선교의 첫 열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행 2:41). 이는 교회가 그 탄생의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선교적 공동체이며, 성령의 능력에 의한 복음 선포가 교회를 낳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2.3. 성령, 선교의 주도자이자 전략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누가는 성령이 단순히 선교를 위한 추상적인 힘이 아니라, 선교의 모든 과정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인도하며 감독하시는 인격적인 주체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기보다 '성령의 행전'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하다.  

개인을 인도하시는 성령: 성령은 빌립을 광야 길로 인도하여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하시고, 그에게 복음을 설명하게 하여 세례를 베풀게 하신다(행 8:26-39). 이는 복음이 유대를 넘어 아프리카로 향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장벽을 허무시는 성령: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가장 큰 장벽을 허무신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은 환상을 통해 베드로의 편견을 깨시고, 그를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신다(행 10장).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 위에도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것과 똑같이 임하신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이방인 선교가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뜻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를 파송하시는 성령: 최초의 공식적인 이방 선교사를 파송하신 주체도 안디옥 교회의 인간 지도자들이 아니라 성령이셨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교회는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을 안수하고 파송했을 뿐이다.  

선교 여정을 감독하시는 성령: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에 성령은 그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막으시기도 하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그리고 밤에 환상을 통해 바울을 유럽의 첫 관문인 마게도냐로 부르신다(행 16:9-10). 이는 선교의 전략과 방향이 인간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2.4. 성령 충만한 선교의 특징
누가가 묘사하는 성령 충만한 선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첫째, 담대한 복음 선포이다. 제자들은 박해와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4:31). 이 담대함(파르레시아, παρρησία)은 성령 충만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둘째, 표적과 기사의 동반이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행 3장), 수많은 병자를 고치는 등(행 5장),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적과 기사가 늘 함께했다. 이는 메시지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역할을 했다.  


셋째, 매력적인 공동체의 형성이다. 초대교회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행 2:42-47). 이러한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강력한 증거가 되어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넷째, 고난 속에서의 기쁨이다.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면서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행 5:41).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패배가 아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참여하는 영광으로 여기게 하셨다.

결론: 제자도와 성령, 온전한 선교를 위한 두 날개
마태복음과 누가-사도행전은 각각 제자도와 성령이라는 독특한 렌즈를 통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조명하지만, 결코 서로 모순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은 온전한 선교를 위해 반드시 함께 가야 할 새의 두 날개와 같다.

마태가 강조하는 제자도는 선교의 목표와 내용을 분명히 한다. 선교는 단순히 사람들의 머리에 지식을 채우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이끄는 전인적인 과정이다. 산상수훈의 급진적인 윤리를 살아내려는 치열한 몸부림 없는 선교는 값싼 복음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제자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수준의 제자도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누가의 성령론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누가는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유일한 동력이 성령의 능력임을 증언한다. 성령은 두려운 자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편견에 사로잡힌 자의 마음을 여시며, 선교의 모든 걸음을 친히 인도하시는 주권적인 주체이시다. 성령의 역동적인 임재와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는 제자도는 결국 생명력 없는 율법주의나 인간적인 프로그램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선교의 모습은 이 두 가지 신학적 통찰의 창조적 결합에 있다. 우리는 마태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삼기 위해 그의 모든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누가의 증언을 따라, 우리의 모든 계획과 전략을 내려놓고 오직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셔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며 땅끝까지 나아가는 담대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깊이 있는 제자도와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이 함께할 때, 교회는 비로소 21세기의 복잡한 도전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적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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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M 세계인터넷선교협의회는 (KWMA소속단체) 1996년 창립한 선교단체로, 인터넷과 IT를 활용하여 30여 년간 세계선교에 기여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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