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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니페로 세라 (Junípero Serra)
18세기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9개의 선교 본부를 설립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개척자, 후니페로 세라: 십자가와 종소리로 세운 문명의 기틀
서론: 골든 스테이트의 십자가
오늘날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를 상징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화려함, 실리콘밸리의 첨단 기술, 그리고 광활한 포도밭이다. 그러나 이 '황금주(Golden State)'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들이 탄생한 길을 따라 늘어선 오래된 스페인식 성당(mission)들의 종소리를 듣게 된다. 샌디에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이 도시들의 이름 자체가 모두 가톨릭 성인들의 이름이며, 그 시작에는 바로 '캘리포니아의 사도'라 불리는 한 작은 체구의 스페인 선교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후니페로 세라이다.
후니페로 세라는 18세기, 스페인 제국의 팽창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와,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에 최초의 유럽 문명을 이식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이다. 그는 50세가 넘은 나이에 멕시코로 건너와, 이후 15년간 불굴의 의지로 캘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9개의 선교 본부를 건설했다. 이 선교 본부들은 원주민들을 향한 복음 전파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농업과 목축, 기술을 전수하는 문명의 전초기지였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오늘날 극단적인 찬사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2015년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며 위대한 복음 전파자로 칭송했지만,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후손들과 역사학자들은 그를 원주민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질병과 강제 노동을 가져온 식민주의의 앞잡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삶은 선교와 제국주의, 복음과 문명화 사이의 복잡하고 불편한 관계를 되묻게 한다. 본 글은 이처럼 논쟁적인 인물, 후니페로 세라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스페인의 존경받는 학자였던 그가 어떻게 신대륙의 선교사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캘리포니아에서 그가 펼쳤던 선교 사업의 빛과 그림자를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유산이 오늘날까지도 어떻게 첨예한 역사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마요르카의 학자, 신대륙의 부름에 답하다
후니페로 세라의 본명은 미켈 호세프 세라 이 페레르(Miquel Josep Serra i Ferrer)로, 1713년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함과 깊은 신앙심을 보였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뛰어난 학자로 성장했다. 그는 신학과 철학 교수로 임명되어, 안정되고 존경받는 학자로서의 미래를 보장받았다.
"언제나 앞으로, 결코 뒤돌아보지 말라"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안락한 수도원의 서재가 아닌, 복음이 닿지 않은 미지의 땅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은 위대한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신대륙 멕시코(당시 누에바에스파냐)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의 좌우명은 "언제나 앞으로, 결코 뒤돌아보지 말라(Always go forward, never turn back)"였다.
1750년 멕시코에 도착한 그는, 시에라 고르다(Sierra Gorda) 산맥의 파메(Pame) 인디언들 사이에서 9년간 사역하며 선교사로서의 첫걸음을 떼었다. 그는 이곳에서 원주민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에게 농업 기술과 목공을 가르치며, 복음 전파와 함께 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총체적인 선교의 기틀을 닦았다.
본론 2: 알타 캘리포니아를 향한 '거룩한 원정'
세라의 삶의 가장 중요한 장은, 그가 55세 되던 1769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는 러시아와 영국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이전까지 방치되었던 북쪽의 '알타 캘리포니아'에 대한 식민지화와 복음화를 동시에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세라는 이 '거룩한 원정(Sacred Expedition)'의 종교적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엘 카미노 레알'을 따라서
고질적인 다리 부상으로 걷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지만, 세라는 원정대와 함께 멕시코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험난한 육로 원정에 나섰다. 1769년, 그는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첫 도시인 샌디에이고에 도착하여, **'미시온 산디에고 데 알칼라(Mission San Diego de Alcalá)'**를 설립했다. 이것이 그가 세운 21개의 캘리포니아 미션 중 첫 번째였다.
이후 178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샌디에이고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약 1,000km의 해안선을 따라, 하룻길 거리마다 하나씩 총 9개의 미션을 직접 설립했다. 그가 개척한 이 길은 '왕의 길'이라는 뜻의 **'엘 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이라 불리며, 오늘날 캘리포니아 101번 고속도로의 근간이 되었다. 카르멜, 샌안토니오, 샌가브리엘, 샌루이스오비스포, 샌프란시스코, 샌후안카피스트라노, 샌타클래라. 그가 세운 미션들의 이름은 곧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들의 이름이 되었다.
미션 시스템: 문명화의 요람인가, 강제 수용소인가?
세라가 세운 미션들은 단순한 교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복합 공동체였다.
종교 교육: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기술 전수: 원주민들은 미션 안에서 유럽식 농업, 목축, 방직, 목공, 석공 기술을 배웠다. 캘리포니아의 풍요로운 농업과 목축업은 바로 이 미션에서 시작되었다.
공동 생활: 세례받은 원주민들은 '네오피토스(neophytes, 신입 교우)'라 불리며, 미션 안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했다.
세라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이 미션 시스템이 원주민들을 이교의 야만성에서 구출하여, 기독교 문명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 시스템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세례받은 원주민들은 미션을 떠날 자유가 없었으며, 도망치다 잡히면 태형과 같은 처벌을 받았다. 유럽에서 건너온 홍역과 같은 전염병은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미션 안에서 죽어갔다. 원주민들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은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억압당했다. 비판가들은 미션을 '문명화의 요람'이 아닌, 사실상의 '강제 노동 수용소'였다고 주장한다.
본론 3: 성인과 식민주의자 사이의 논쟁적인 유산
후니페로 세라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인 시성과 거센 반발
가톨릭 교회는 그의 불굴의 신앙과 선교적 열정, 그리고 수천 명의 원주민에게 세례를 주고 '문명의 빛'을 전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땅에서는 처음으로 후니페로 세라를 성인으로 공식 시성했다. 교황은 그를 "미국의 복음화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라 칭하며, 그의 선구자적인 정신을 칭송했다.
그러나 이 시성 결정은 캘리포니아의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후손들과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세라가 스페인 제국주의의 첨병으로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의 문화를 파괴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 식민지 체제의 상징이라고 비판했다. 시성 이후, 캘리포니아 곳곳에 있던 그의 동상들이 파괴되거나 철거되는 사건이 잇따랐다.
18세기의 인물, 21세기의 잣대
세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는 분명 자신의 시대의 아들이었다. 18세기 유럽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과 유럽 문명을 이식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명이었다. 그는 원주민들을 악의적으로 학대하거나 착취하려 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편지와 일기를 보면, 그는 원주민들의 영혼 구원을 진심으로 갈망했고, 때로는 그들을 학대하는 스페인 군인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던, 강직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의가, 그의 행동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의 미션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수많은 원주민들의 죽음과 문화적 파괴를 초래했다는 역사적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결론: 캘리포니아의 빛과 그림자
1784년, 70세의 나이로 자신이 세운 카르멜 미션에서 눈을 감아 그곳에 묻힌 후니페로 세라는, 캘리포니아의 역사 그 자체와 같다. 그의 유산에는 캘리포니아의 풍요로운 농업과 아름다운 도시들의 시작이라는 '빛'과, 원주민 문화의 파괴와 고통이라는 '그림자'가 공존한다.
그를 단순히 '위대한 성인'이나 '잔인한 식민주의자'라는 이분법적인 틀에 가두는 것은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자신이 믿는 최선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려 했던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후니페로 세라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선교와 문화, 복음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선한 의도가 의도치 않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때, 우리는 그 역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의 삶과 논쟁은, 과거를 오늘의 잣대로 쉽게 재단하려는 유혹을 경계하고, 역사적 인물을 그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깊이 이해하려는 겸손한 노력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