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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중국 내지 선교회(CIM)를 창설하고, 현지 문화에 동화되는 '성육신적 선교'를 통해 중국 복음화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중국 내지의 사도, 허드슨 테일러: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다
서론: 변발(辮髮)을 한 선교사, 새로운 시대를 열다
19세기 중반 중국의 해안가 도시, 서양인들 사이에서 한 영국인 남자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편안한 양복 대신 거추장스러운 중국 전통 의상을 입었고, 자신의 금발을 염색하고 깎아내어 만주족의 상징인 변발(辮髮)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동료 선교사들조차 그의 모습을 '수치스러운 타락'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이 기이한 모습의 영국인, 허드슨 테일러는 바로 그 순간 기독교 선교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서구 열강의 보호 아래 해안가의 조계지(租界地)에 머물던 당시의 선교 관행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복음이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광활한 중국 내륙의 수억 명의 영혼을 향한 비전을 품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해안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모든 성(省)에 복음의 증인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두 가지 혁명적인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선교사가 먼저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성육신적 선교(Incarnational Mission)'였고, 둘째는 인간적인 모금이 아닌 오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는 '믿음 선교(Faith Mission)'였다. 그의 삶은 이 두 원칙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증명하는 장대한 신앙의 실험이었다.

본 글은 중국 선교의 지도를 다시 그린 허드슨 테일러의 삶과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영국의 한 젊은 의학도가 어떻게 중국 내지를 향한 거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는지 그의 소명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가 설립한 중국내지선교회(CIM)의 혁신적인 원칙들과 그의 사역을 평생토록 지탱했던 '치환된 생명'이라는 깊은 영성의 비밀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개인적 비극과 박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헌신이 중국과 세계 선교에 어떤 불멸의 유산을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젊은 의학도의 비전 - '중국 내지로'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을 향한 비전은 청년 시절의 뜨거운 열정에서 시작되어, 철저한 준비와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부르심과 철저한 준비
1832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난 허드슨 테일러는 17세 때 깊은 회심을 체험했다. 그리고 거의 즉시, 그는 중국 선교사로 부름받았다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그는 막연한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날부터 자신의 삶 전체를 중국 선교를 위한 훈련 과정으로 만들었다.

그는 복음 전파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또한 선교지에서의 고된 삶에 적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다. 그는 런던의 가난한 빈민가에 거처를 정하고,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아가며 자신의 모든 필요를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는 훈련을 시작했다. 이는 훗날 '믿음 선교' 원칙의 초석이 된 실질적인 신앙 훈련이었다.

'중국인이 되다' - 성육신적 선교의 시작
1854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허드슨 테일러는 마침내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자신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서양 선교사들은 서구인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해안가의 안전한 조계지에 머물렀고, 중국인들과는 깊은 문화적 장벽을 쌓고 있었다. 그들의 서양식 복장과 행동은 중국인들에게 오만하고 기이한 '외국 귀신(洋鬼子)'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이는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테일러는 이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이라고 한 말씀을 따라,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설 것을 각오하고, 중국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머리를 삭발한 후 변발을 하기 시작했다. 동료 선교사들은 그를 비난했고,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중국인들은 그가 자신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여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성육신적 선교'의 첫걸음이었으며, 훗날 중국내지선교회(CIM)의 핵심 원칙이 되었다.

본론 2: 중국내지선교회(CIM) - 믿음의 원칙 위에 세운 조직
몇 년간의 개인적인 선교 활동 후 건강이 악화되어 영국으로 돌아온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륙의 복음화되지 않은 수억 명의 영혼들에 대한 부담감으로 깊은 영적 고뇌에 빠졌다.

브라이튼 해변에서의 결단
1865년 6월 25일, 영국 브라이튼의 해변에서 그는 더 이상 이 영혼의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모래사장을 거닐며 기도하던 중, "만약 내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왜 그 믿음으로 행동하지 않는가?"라는 내면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중국 내륙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선교회를 조직하기로 결단했다. 이 기도가 바로 세계 선교의 역사를 바꾼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의 탄생이었다.

믿음 위에 세운 혁명적 원칙들
허드슨 테일러가 세운 CIM은 여러 면에서 기존의 선교 단체들과는 완전히 다른, 혁명적인 원칙들 위에 세워졌다.

초교파 선교회: CIM은 특정 교파에 소속되지 않고,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교파 출신이든 선교사로 받았다. 이는 교파주의가 팽배했던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원칙이었다.

믿음 선교: CIM의 가장 독특한 원칙이었다. 선교사들에게는 정해진 월급이 보장되지 않았고, 선교회는 빚을 지지 않았다.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쳐도 외부에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거나 모금 활동을 하지 않았다. 모든 필요는 오직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만 아뢰고, 그분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채우실 것을 신뢰했다.

현장 중심의 리더십: 선교회의 본부와 책임자인 테일러 자신은 런던이 아닌 중국 현장에 상주했다. 모든 중요한 결정은 선교 현장의 필요에 따라 현장에서 내려졌다.

문화 적응: 모든 선교사들은 허드슨 테일러의 선례를 따라 중국식 복장과 관습을 따르도록 권장되었다.

이러한 원칙들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무모해 보였지만, 수많은 헌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1885년,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유망한 젊은이 7명(케임브리지 7인)이 자신들의 모든 명예와 부를 버리고 CIM 선교사로 헌신한 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선교의 길로 이끌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사망할 무렵, CIM은 800명이 넘는 선교사를 거느린 중국 최대의 선교 단체로 성장했다.

본론 3: '치환된 생명' - 고난을 이긴 영성의 비밀
허드슨 테일러의 삶은 눈부신 성취의 이면에 깊은 고난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를 비롯해 여러 자녀를 질병으로 잃었고, 의화단 운동 때는 자신이 아끼던 선교사들이 순교하는 끔찍한 비극을 겪어야 했다.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엄청난 중압감과 끊임없는 비판 속에서 그는 종종 깊은 영적 침체와 탈진에 시달렸다.

영적 침체와 돌파구
특히 1869년, 그는 극심한 영적 무력감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 얼마나 주님과 가까워져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는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성경을 읽으며 애썼지만, 내면의 평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동료 선교사로부터 온 한 편지가 그의 영혼을 깨웠다. 그 편지에는 "믿음을 강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신실하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자신의 영적 문제의 핵심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해지려 했던 것이다.

'바뀐 생명(The Exchanged Life)'의 발견
그 순간,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신앙생활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그분의 삶을 살아내시는 것이었다. 포도나무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나무로부터 오는 수액으로 저절로 열매를 맺듯이, 신자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성령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힌다는 진리였다.

이 '치환된 생명(The Exchanged Life)'의 발견은 허드슨 테일러의 남은 생애를 지탱하는 영성의 기둥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연약함과 씨름하며 발버둥 치는 대신,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안에서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 깊은 영적 체험은 그가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끝까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되었다.

결론: 중국 땅에 묻힌 밀알, 세계를 깨우다
허드슨 테일러는 1905년, 그가 평생을 사랑했던 땅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마리아와 자녀들 곁, 중국 땅에 묻혔다. 그는 죽어서도 중국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던 진정한 '중국의 사도'였다. 그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처럼, 중국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그가 남긴 유산은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하다.
첫째, 그는 중국 복음화의 지도를 바꾸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복음은 해안 도시를 넘어 중국 대륙 깊숙한 곳까지 퍼져나갔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가정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은, 허드슨 테일러와 이름 없는 수많은 CIM 선교사들이 뿌린 눈물의 씨앗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그는 근대 복음주의 선교의 모델을 제시했다. '믿음 선교'와 '성육신적 선교'라는 그의 원칙은 수많은 후대 선교 단체(OMF, WEC, SIM 등)에 의해 계승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타문화권 선교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원리로 여겨지고 있다.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뛰어난 재능이나 학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단순한 믿음임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그의 삶은 연약한 한 개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릴 때, 어떻게 불가능해 보이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작은 구두 수선공 윌리엄 캐리가 근대 선교의 문을 열었다면, 허드슨 테일러는 그 문을 활짝 열고 전 세계 교회가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가도록 길을 닦은 위대한 개척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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