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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파커 (Peter Parker)
중국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광저우에 병원을 세우고 서양 의술을 소개했습니다.

중국의 눈을 뜨게 한 의사, 제국의 길을 연 외교관: 피터 파커의 두 얼굴
서론: 또 다른 피터 파커 이야기
피터 파커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미줄을 쏘며 뉴욕의 마천루를 활강하는 슈퍼히어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한 세기 앞서, 실제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또 다른 피터 파커가 있었다. 그는 슈퍼 파워를 가진 영웅은 아니었지만,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서양 의술과 외과 수술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과 의학을 모두 전공한 피터 파커 박사는, 1834년 중국 최초의 개신교 의료 선교사로 광저우(廣州) 땅을 밟았다. 그는 수만 명의 중국인 환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종양을 제거해준 위대한 의사이자, 기독교의 사랑을 의술로 실천한 인도주의자였다. 그의 병원은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증명하며, '서양 오랑캐'에 대한 중국인들의 뿌리 깊은 불신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또 다른, 훨씬 더 복잡하고 논쟁적인 얼굴이 있다. 그는 선교사 의사에서 시작하여, 훗날 중국 주재 미국 대사 대리까지 역임한 외교관이 되었다. 그리고 외교관으로서의 그는, 한때 자신이 사랑으로 섬겼던 바로 그 나라를 향해, '함포 외교'와 같은 무력 사용을 주장하는 제국주의의 강경한 대변자로 변모했다. 치유의 메스를 들었던 그의 손이, 이제는 제국의 칼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본 글은 이처럼 '치유자'와 '제국주의자'라는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피터 파커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광저우에서 펼쳤던 선구적인 의료 사역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 그가 어떻게 외교관으로 변신하여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교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그의 복합적인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메스를 든 사도 - 광저우 안과 병원의 기적
피터 파커는 신학과 의학을 모두 공부하며 처음부터 의료 선교사로서 철저히 준비된 인물이었다. 그는 "복음의 문을 여는 쐐기(the entering wedge)"로서 의료 사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굳게 믿었다.
'눈을 뜨게 하는' 사역
1834년, 그가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을 때, 서양인들은 극히 제한된 구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고, 기독교 선교는 사실상 불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835년, 광저우에 작은 '안과 병원(Ophthalmic Hospital)'을 열었다. 안과를 선택한 것은 매우 전략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백내장과 같은 안과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고, 서양의 외과 수술은 이들의 시력을 극적으로 회복시켜 줄 수 있었다.
그의 수술 실력은 기적과도 같았다. 수십 년간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들이 그의 수술을 받고 눈을 뜨게 되자, '신 의사(神醫)'의 소문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병원은 곧 안과뿐만 아니라, 각종 종양 제거 수술로도 명성을 떨쳤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거대한 종양을 달고 살던 환자들이 그의 수술을 받고 새로운 삶을 얻었다. 흠차대신(欽差大臣)이었던 임칙서(林則徐)와 같은 최고위 관료들까지 그의 병원을 찾아와 치료를 받았다.
그는 병원을 찾는 모든 환자들에게 복음 소책자를 나누어주고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그의 가장 강력한 설교는 바로 그의 메스 끝에서 이루어지는 치유 그 자체였다. 그는 병든 몸을 고쳐주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추상적인 교리가 아닌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참고: 피터 파커는 자신의 환자 기록을 위해 화가 람콰에게 수술 전후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귀중한 의학 자료를 남겼다.)
본론 2: 외교관으로의 변신 - 제국주의의 그림자
피터 파커의 명성과 중국어 실력은, 곧 그를 선교의 영역을 넘어 정치와 외교의 무대로 이끌었다. 특히 1839년 발발한 아편전쟁은 그의 인생 항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치유자에서 매파로
전쟁과 그 이후의 불평등 조약 협상 과정에서, 중국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피터 파커는 자연스럽게 미국 외교 사절단의 통역관이자 자문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1844년 미국과 청나라 사이의 왕샤 조약(Treaty of Wanghia)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그는 점점 더 외교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마침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855년에는 중국 주재 미국 위원(대사 대리)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외교관으로서의 그는, 의사 시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강경한 '매파(hawk)'가 되어 있었다.
그는 중국의 문을 더 활짝 열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설득만으로는 부족하며, 서구의 군사력을 이용한 '함포 외교(gunboat diplomacy)'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나라 정부의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영국, 프랑스와의 연합 군사 행동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미국이 무역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만(포모사)을 점령해야 한다는 비밀 제안까지 했다. 그는 이제 '중국인의 친구'가 아니라,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본론 3: 선교와 제국 사이의 복잡한 유산
피터 파커의 삶은 한 사람 안에 공존했던 두 개의 다른 정체성, 즉 '치유자'와 '제국주의자'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 개의 얼굴, 엇갈린 평가
의료 선교사로서의 피터 파커는 의심할 여지 없는 위대한 선구자이다.
그는 중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세웠다. 그의 광저우 병원은 훗날 중국 의료계의 중요한 요람이 되었다.
그는 '의료 선교'의 모델을 창시했다. 그의 성공은 이후 수많은 의료 선교사들이 중국과 전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그는 수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덜어주었다. 그의 헌신은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그러나 외교관으로서의 피터 파커는 매우 문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 논리를 내면화했고, 자신이 한때 섬겼던 중국인들의 주권을 존중하기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강압하는 편에 섰다.
그의 삶은 19세기 기독교 선교가 서구 제국주의와 얼마나 복잡하고 불편하게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선교사들은 종종 순수한 복음적 열정과 제국주의적 문화 우월감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했고, 피터 파커는 그 줄타기에서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인물이었다.
결론: 치유의 손, 제국의 손
1888년 워싱턴 D.C.에서 눈을 감은 피터 파커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불편하고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한 사람의 위대한 인도주의적 업적은, 그의 제국주의적 과오를 상쇄할 수 있는가? 복음 전파라는 선한 목적은, 강압적이고 비윤리적인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피터 파커는 분명 중국인들의 육신의 눈을 뜨게 한 위대한 의사였다. 그는 백내장 수술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되찾아 주었다. 그러나 외교관이 된 그는, 정작 제국주의라는 더 큰 어둠이 중국에 드리우는 것을 보지 못했거나, 혹은 그것을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강력한 교훈을 남긴다. 치유와 섬김의 손이, 지배와 강요의 손으로 변질되는 것은 한순간일 수 있다는 것을. 피터 파커의 이야기는,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복잡한 역사 속에서 한 신앙인이 겪었던 고뇌와 모순을 담고 있는, 그래서 더욱더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