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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코필드 (Frank W. Schofield)
'석호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캐나다 선교사로, 3.1 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도운 의인입니다.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스코필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석호필'
서론: 호랑이처럼, 그러나 날카롭게
"돌(石)처럼 단단한 의지로, 호랑이(虎)처럼 용맹하게, 그러나 날카롭게(弼) 시대의 아픔을 돕는다." 1919년 3.1 운동의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리고, 이후 평생을 한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한 캐나다인 선교사에게, 한국인들은 '석호필(石虎弼)'이라는 존경과 사랑이 담긴 이름을 선물했다. 그의 본명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그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유일한 외국인이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사와는 달랐다. 그는 수의학 박사로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는 학자였지만, 그의 진짜 사명은 불의에 신음하는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일제의 비인간적인 폭압을 세계의 양심에 고발하는 예언자적 증인의 삶이었다. 그는 선교가 단지 영혼 구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압제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함께 싸우는 정의의 실천임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본 글은 '호랑이 선교사' 석호필 박사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일제의 만행을 목격하고 한국 독립운동의 증인이 되었는지 살펴보고, 3.1 운동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그의 용기 있는 활동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방 이후에도 한국의 고아와 가난한 학생들을 돌보며 '할아버지'로 살았던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세브란스의 학자, 역사의 현장에 서다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한 프랭크 스코필드는, 토론토 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유능한 학자였다. 그는 1916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세균학 교수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일제의 만행을 목격하다
그가 마주한 1910년대의 한국은 일제의 무단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과 교류하며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동시에 한국인들이 겪는 억압과 차별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특히, 총칼을 앞세워 한국인을 억압하고 토지를 수탈하는 일제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
3.1 운동의 목격자이자 증인
1919년 3월 1일, 마침내 한국인들의 독립을 향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스코필드는 이 역사적인 순간의 가장 중요한 목격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전거를 타고 파고다 공원과 시위 현장을 누비며, 비폭력 평화 시위를 벌이는 군중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의 역할은 단순한 목격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벌어진 학생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제자, 이갑성(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을 면회하고, 그로부터 독립선언서의 영문 번역본을 비밀리에 입수했다.
그의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은 4월 15일, '제암리 학살 사건'의 현장을 직접 찾아간 것이었다. 일본군은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스코필드는 아직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참혹한 현장을 자신의 사진기에 담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본론 2: 펜과 카메라를 든 독립운동가
스코필드는 자신이 기록한 이 모든 증거들을 그냥 묻어두지 않았다. 그는 펜과 카메라를 무기 삼아,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고독한 싸움을 시작했다.
진실을 세계에 알리다
그는 자신이 촬영한 사진들과 목격담, 그리고 한국인 지도자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이 보고서와 사진들을 상해와 일본, 캐나다, 미국의 언론과 외교관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다. 그의 용기 있는 고발을 통해, 3.1 운동에 대한 일제의 잔혹한 탄압의 진실이 처음으로 국제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여러 해외 언론에 익명으로 기고문을 보내, 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 통치의 부당함을 끊임없이 외쳤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았고, 그는 결국 1920년 '친한(親韓) 행위'를 이유로 한국에서 강제 추방당했다.
본론 3: 다시 돌아온 '할아버지',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다
추방된 후 캐나다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스코필드는 단 한 순간도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다
1945년 한국이 해방되자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1958년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38년 만에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땅,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그의 더 큰 관심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통받는 고아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금과 사례비 대부분을 장학금으로 내놓았고, 고아원을 후원하며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어주었다.
그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해방된 조국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의 부정부패와 인권 탄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에 맞서 싸웠던 그 용기 그대로, 이제는 내부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한국 사회의 양심이 되어주었다.
결론: 국립묘지에 잠든 푸른 눈의 애국자
1970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스코필드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위대한 헌신을 기려,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스코필드의 삶은, 선교가 특정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을 넘어, 한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함께 싸우는 것임을 보여준 위대한 증거이다.
그는 진실의 증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억압받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 시대의 어둠을 밝혔다.
그는 정의의 실천가였다. 그는 일제의 불의와 해방 후 독재 정권의 불의에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영원한 친구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며, 전쟁고아와 가난한 학생들의 '할아버지'가 되어주었다.
석호필 박사는 선교사였지만, 그 누구보다 뜨겁게 한국을 사랑했던 한국인이었다. 그의 삶은 인종과 국경을 넘어선 사랑과 정의가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역사 속의 영원한 등불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