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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하비에르 (Francis Xavier)

예수회 소속으로 인도, 일본 등 아시아 지역에서 광범위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aint Francis Xavier): 아시아의 사도, 동방을 향한 불멸의 열정
서론: 복음을 위한 위대한 항해자
16세기, 인류가 미지의 바다를 향해 돛을 올렸던 대항해시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 세계 일주에 나섰던 바로 그 시기에, 또 한 명의 위대한 항해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황금이나 새로운 영토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 영혼의 구원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당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먼 동쪽 땅끝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영적인 탐험가였다.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다.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칭송받는 하비에르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불꽃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파리 대학에서 만난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질문에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이후 예수회 창립 멤버가 된 그는, 포르투갈 국왕의 요청에 응답하여 인도를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그리고 일본에까지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그가 10여 년간의 선교 기간 동안 이동한 거리는 지구 한 바퀴를 훌쩍 넘는 경이로운 거리였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 거리나 그가 세례를 준 수많은 사람의 숫자에만 있지 않다.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전혀 다른 문화와 종교를 마주하며 자신의 선교 방식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발전시켜 나간 그의 유연성과 개척 정신에 있다. 그는 유럽 중심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출발했지만, 인도의 가난한 어부들부터 일본의 지적인 승려들과 다이묘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영혼의 눈높이에 맞추려 애썼다. 그의 여정은 '어떻게 하면 복음이 이 낯선 땅에 가장 효과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연속이었다.

본 글은 파리의 야심 찬 귀족 학자가 어떻게 '아시아의 사도'로 거듭났는지 그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회심과 예수회 창립 과정, 그리고 아시아를 향한 그의 소명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인도와 일본에서의 대조적인 선교 활동을 통해 그가 어떻게 자신의 선교 전략을 발전시켜 나갔는지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중국 대륙의 문턱에서 맞이한 그의 죽음과 그가 남긴 불멸의 유산이 세계 선교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파리의 귀족 학자, 이냐시오의 동료가 되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불같은 선교 열정은 처음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세속적인 명예와 학문적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바라의 귀족, 파리의 야심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당시 독립 왕국이었던 나바라(현재 스페인 북부)의 하비에르 성에서 유서 깊은 바스크 귀족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총명했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성직자나 학자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19세에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들이 모이던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뛰어난 운동선수이자 매력적인 젊은이였고, 학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철학 교수가 되어 안정되고 명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세상적인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운명적인 만남과 영적인 질문
그의 삶을 바꾼 운명적인 만남은 파리 대학의 기숙사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룸메이트는 바로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았던 상이군인 출신의 순례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of Loyola)였다. 처음 하비에르는 이냐시오의 금욕적이고 경건한 삶의 방식을 경멸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끈질기게 하비에르의 영혼에 다가갔다.

이냐시오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젊은 하비에르에게 계속해서 복음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비에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질문은 하비에르의 마음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명예와 성공이 영원한 생명 앞에서는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깊이 깨닫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이냐시오가 지도하는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봉헌하기로 결심한다. 세속적 야망에 불타던 그의 마음이 이제는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1534년, 하비에르는 이냐시오와 다른 다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한 작은 성당에 모여 청빈, 정결, 그리고 예루살렘 순례와 선교에 대한 첫 서원을 발했다. 이것이 바로 훗날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장 강력한 수도회 중 하나가 될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시작이었다.

본론 2: 인도의 사도 - 빛과 그림자
하비에르의 아시아 선교는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가 새로 개척한 동인도 지역에 보낼 선교사를 교황청에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가기로 했던 동료가 병에 걸리자, 하비에르가 대신 그 임무를 자원했다. 1541년, 그는 리스본을 떠나 13개월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1542년, 포르투갈 동방 식민지의 수도인 고아(Goa)에 도착했다.

고아의 타락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역
하비에르가 처음 마주한 고아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곳의 포르투갈인들은 탐욕과 부도덕에 깊이 빠져 있었고,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하비에르의 첫 선교 대상은 이교도가 아니라, 타락한 유럽인들이었다. 그는 병자와 나병 환자들을 돌보고, 감옥의 죄수들을 위로하며,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헌신적인 삶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지만, 기득권층의 뿌리 깊은 부패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곧 그는 인도의 가장 소외된 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는 인도 남동부의 해안가에 살던 가난한 진주잡이 어부, 파라바(Paravas) 공동체로 갔다. 이들은 이미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기 위해 명목상 집단으로 세례를 받은 상태였지만,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비에르는 그들 가운데 살면서, 핵심적인 기도문과 교리를 간단한 노래로 만들어 가르쳤다. 그는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현지인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수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의 방법은 단순했지만, 가난하고 멸시받던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대의 한계: 식민주의와의 관계
그러나 하비에르의 인도 사역에는 분명한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의 선교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라는 군사적, 정치적 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때로는 포르투갈 총독에게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개종자들을 보호하려 했고, 그의 대규모 세례는 개인의 깊은 회심보다는 집단적인 개종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그가 고아에 종교 재판소(Inquisition) 설치를 요청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가장 비판받는 부분이다. 비록 그의 의도는 이단으로부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것이었고, 실제 종교재판소는 그가 죽은 후에야 설치되었지만, 이는 그의 사역이 16세기 유럽 중심주의와 종교적 배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점차 포르투갈인들의 잔인함과 탐욕에 깊이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유럽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새로운 땅을 갈망하게 된다.

본론 3: 일본 선교 - 존중과 좌절의 땅
하비에르의 선교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일본 선교였다. 1547년 말라카에서 그는 안지로(Anjirō)라는 이름의 일본인 살인범 출신 도망자를 만나게 된다. 안지로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이라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 국가에 대해 알게 된 하비에르는 그곳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품게 되었다.

새로운 땅, 새로운 전략
1549년, 하비에르는 안지로와 두 명의 예수회 동료와 함께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했다. 그가 마주한 일본은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일본은 가난하고 문맹률이 높은 인도가 아니라, 정교한 봉건 사회 구조와 깊이 있는 불교 및 신토라는 종교 철학을 가진 나라였다.

하비에르는 즉시 인도에서 사용했던 단순한 방식이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초라한 행색이 오히려 일본인들에게 멸시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다이묘(지방 영주)를 만날 때는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자신을 '천축(인도)에서 온 사절'로 소개하며 예의를 갖추었다. 그는 더 이상 대중을 상대로 한 대규모 세례에 집중하지 않고, 불교 승려들과의 지적인 토론과 변증에 힘썼다. 이는 그의 선교 전략에 있어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문화와 지적 수준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적응주의(Accommodation)' 선교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언어의 장벽과 중국을 향한 꿈
그러나 일본 선교는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가장 큰 장벽은 언어였다. 하비에르는 일본어를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통역에 의존한 그의 설교는 종종 심각한 오해를 낳았다. '하나님(Deus)'이라는 개념을 불교의 '다이니치(大日)'라는 용어로 번역했다가 나중에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깨닫고 수정하기도 했다.

약 2년간의 활동으로 수백 명의 개종자를 얻고 작은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하비에르는 더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일본인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만약 당신의 종교가 유일한 진리라면, 왜 위대한 문명을 가진 중국인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가?" 하비에르는 일본인들이 중국 문화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존경심을 간파했다. 그는 일본을 개종시키기 위한 열쇠가 중국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만약 중국의 황제를 개종시킬 수만 있다면, 일본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결론: 샹촨섬의 불꽃, 꺼지지 않는 유산
일본을 떠난 하비에르의 마지막 목표는 오직 중국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쇄국 정책으로 외국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552년, 중국 본토가 바로 건너다보이는 작은 섬, 샹촨(上川) 섬에 도착했다. 그는 밀수꾼의 배를 타고 본토로 잠입할 기회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배는 오지 않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부는 섬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그는 극심한 열병에 시달렸다. 1552년 12월 3일, 그의 곁에는 오직 그의 중국인 통역사 안토니오만이 있었다. 그는 중국 땅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짖다 4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은 고독하고 비참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문턱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의 삶 자체가 아시아 기독교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불꽃을 남겼다.
첫째, 그는 아시아 선교의 문을 연 위대한 개척자였다. 그의 헌신과 희생은 수많은 후배 선교사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들이 따라갈 길을 열어주었다. 훗날 중국 선교에 성공한 마테오 리치 같은 인물들은 하비에르의 경험과 실패 위에서 더 정교한 적응주의 선교 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둘째, 그는 '성스러운 열정'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삶은 안주하려는 모든 신앙인에게 던지는 강력한 도전이다. 그는 안정된 교수직,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오직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시대의 한계를 지닌 인간이었지만, 그 한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거인이었다. 샹촨섬에서 꺼진 그의 육신의 불꽃은, 오히려 아시아 전역에 복음의 빛을 밝히는 영원한 영성의 불꽃으로 다시 타올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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