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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슈바르츠 (Christian Friedrich Schwarz)
인도 남부에서 40년 이상 사역하며 현지인들의 깊은 존경을 받은 선교사입니다.

왕들의 스승,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남인도의 사도, 크리스티안 슈바르츠
서론: 힌두 왕이 바친 비문(碑文)
인도 남부 탄자부르(Thanjavur)의 한 오래된 교회 안, 한 유럽인 선교사의 무덤에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비문 중 하나가 새겨져 있다. 그 비문은 기독교인이 아닌,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힌두교도 왕 마라타 세르포지 2세(Serfoji II)가 바친 것이다.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며, 오직 선을 행하는 기쁨만을 추구했다... 이 땅의 아버지를 잃은 나의 슬픔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무덤의 주인은 바로 18세기 남인도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사역하며 '남인도의 사도'로 불렸던 독일인 선교사,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슈바르츠이다. 그의 삶은 폭발적인 부흥이나 극적인 순교로 특징지어지지 않는다. 그의 위대함은 한결같은 성실함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청렴결백한 인격, 그리고 그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영적 권위에 있었다. 그는 힌두 왕, 이슬람 군주, 영국 식민 관리, 그리고 가난한 인도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시대를 초월한 거인이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 지겐발크가 개척한 인도 개신교 선교의 길을 넓고 단단하게 닦은 인물이다. 그는 선교사이자 목회자였고, 교육가였으며, 심지어 왕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는 외교관이자 평화의 사도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선교가 단순히 교리를 전파하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의 인격을 삶으로 살아낼 때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증거이다.
본 글은 이처럼 '걸어 다니는 성자'와 같았던 슈바르츠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를 인도로 이끈 할레 경건주의의 배경을 살펴보고, 남인도에서 펼쳐진 그의 길고 성실한 사역의 모습을 추적할 것이다. 이어서, 그가 어떻게 종교와 정치의 벽을 넘어 모두의 신뢰를 얻는 외교관이자 왕의 스승이 될 수 있었는지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인격 중심의 사역이 인도 교회와 선교 역사에 어떤 깊은 뿌리를 남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할레의 경건, 인도를 향한 부르심
크리스티안 슈바르츠의 영성은 18세기 독일 경건주의의 심장부였던 할레(Halle)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지겐발크의 영적 직계 후배였다.
1726년 프로이센에서 태어난 슈바르츠는 할레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그곳에서 지겐발크의 후계자였던 프란케(Francke)의 지도 아래 경건주의의 핵심 가치, 즉 개인적 회심, 성경 연구, 경건한 삶, 그리고 세계 선교를 향한 열정을 깊이 내면화했다.
원래 그의 계획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할레에서 지겐발크가 번역했던 타밀어 성경의 재판 인쇄를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밀어를 공부하며 인도의 영혼들을 위한 기도에 동참하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직접 인도로 가야 한다는 강렬한 부르심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1749년, 그는 덴마크-할레 선교회(Danish-Halle Mission)의 파송을 받아 인도를 향한 배에 올랐다. 1750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그가 인도 남동부의 트랑케바르(Tranquebar)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그가 이후 48년간 단 한 번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인도 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묻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선배인 지겐발크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곧바로 타밀어와 포르투갈어를 습득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설교하는 일에 헌신했다.
본론 2: 청렴의 힘 - 왕과 백성의 신뢰를 얻다
슈바르츠의 사역이 트랑케바르를 넘어 남인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그의 이름은 곧 '청렴'과 '진실'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의 삶 자체가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설교였다.
단순한 삶, 깊은 존경
슈바르츠는 극도로 단순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는 선교회와, 훗날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군목으로 일하면서 받은 적지 않은 급료의 대부분을 교회 건축과 학교 설립,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그는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았으며, 땅에 매트를 깔고 자고, 소박한 음식을 먹었다. 이러한 그의 금욕적인 삶은 물질을 초월한 가치를 추구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사두(Sadhu, 성자)'의 모습과 겹쳐 보였고, 이는 힌두교도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보다 그의 삶을 통해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진실성을 신뢰하게 되었다.
왕들의 중재자, 평화의 사도
슈바르츠의 흠 없는 인격에 대한 명성은 곧 왕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당시 남인도는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마이소르(Mysore) 왕국의 이슬람 군주 하이더 알리(Hyder Ali), 그리고 탄자부르(Thanjavur)의 힌두 왕국 등이 얽혀 끊임없는 전쟁과 정치적 암투가 벌어지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슈바르츠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신뢰받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1779년, 영국 정부는 영국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품고 있던 하이더 알리와의 평화 협상을 위해 사절을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하이더 알리는 영국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전갈을 보냈다. "사절을 보내려거든, 그 '기독교인(슈바르츠를 지칭)'을 보내시오. 그는 결코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오." 슈바르츠는 기꺼이 이 위험한 임무를 받아들여, 적대적인 영토를 가로질러 하이더 알리의 궁정까지 가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비록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인격이 얼마나 큰 신뢰를 얻고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인격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탄자부르 왕국에서였다. 1787년, 탄자부르의 왕이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어린 아들 세르포지(Serfoji)의 앞날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궁정의 암투 속에서 아들을 지켜주고 올바른 통치자로 교육해 줄 유일한 사람으로, 이방인이자 다른 종교를 가진 선교사 슈바르츠를 지목했다. 그는 슈바르츠를 임종의 자리로 불러, 어린 세르포지의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간청했다. 힌두 왕이 자신의 왕국의 미래를 기독교 선교사의 손에 맡긴 것이다. 슈바르츠는 왕의 유언을 받아들여, 세르포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스승이자 아버지가 되어주었다. 그는 세르포지에게 학문과 통치술뿐만 아니라 정직과 성실의 가치를 가르쳤다. 세르포지는 훗날 왕위에 올라 남인도 역사상 가장 현명하고 자비로운 군주 중 한 명으로 칭송받게 된다.
본론 3: 인도 교회의 아버지 - 교육과 목양
슈바르츠의 궁극적인 목표는 외교관이나 왕의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도 땅에 자생력 있는 인도 교회를 세우는 '인도 교회의 아버지'였다.
현지인 지도자 양성과 교육
슈바르츠는 교회의 미래가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잘 훈련된 현지인 지도자들에게 달려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역 초기부터 유능한 인도인들을 발굴하여 '카테키스트(catechist, 교리교사)'로 훈련시키고, 그들을 각 마을의 영적 지도자로 세웠다. 그는 동역하는 인도인 사역자들을 단순한 조수가 아닌, 동등한 동역자로 존중하고 사랑했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교회 담장을 넘어섰다. 그는 '지방 학교(Provincial schools)'라는 이름의 학교들을 여러 도시에 설립했다. 이 학교들은 특정 종교나 카스트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아이들에게 영어와 타밀어, 그리고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그의 교육 철학에 감명받은 탄자부르의 힌두 왕은 기꺼이 이 학교들을 위한 토지와 재정을 지원했다. 슈바르츠는 교육을 통해 사회 전체를 계몽하고, 기독교 신앙이 미신이 아닌 합리적이고 유익한 가르침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4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꾸준한 헌신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그가 개척하고 돌보았던 남인도의 기독교 공동체는 수천 명의 신실한 신자들을 가진, 남인도에서 가장 크고 존경받는 공동체 중 하나로 성장해 있었다.
결론: 인격이 곧 선교였다
1798년, 71세의 나이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슈바르츠는 자신이 평생을 섬겼던 땅 탄자부르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돌보았던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함께 모여 진심으로 애도했다.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세르포지 2세 왕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유럽의 유명한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스승을 위한 아름다운 대리석 기념비를 제작하게 했다.
슈바르츠의 삶은 선교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유창한 설교나 치밀한 전략이 아니라, 흠 없는 인격과 거룩한 삶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 정직과 성실을 말없이 증거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 전에, 먼저 그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의 청렴결백함은 종교와 인종,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지겐발크가 남인도 선교의 문을 열고 기초를 놓은 개척자였다면, 슈바르츠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우고 기둥을 다진 위대한 건축가였다. 그는 거의 반세기에 걸친 묵묵하고 성실한 섬김을 통해, 갓 심어진 연약한 복음의 씨앗이 남인도의 토양에 깊이 뿌리내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게 했다. 그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위대한 설교는 바로 당신의 삶이다"라는 진리를 웅변하는 영원한 증거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