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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예페 (Karen Jeppe)

덴마크 출신 선교사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시리아로 피신한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을 구출하고 재활을 도왔습니다.

아르메니아의 덴마크 어머니, 카렌 예페: 사막에서 희망을 일군 위대한 인도주의자
서론: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든 여인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함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이 터져 나왔을 때,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하며 시리아 사막으로 내몰렸다.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잔혹한 폭력 속에서 스러져가던 바로 그 절망의 땅 한가운데, 피난처를 만들고 수천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구출해낸 한 덴마크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렌 예페. 그녀는 '아르메니아의 덴마크 어머니', '사막의 천사'로 불렸던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다.

그녀는 보딜 비요른과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목격자이자 생존자들의 수호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사역은 단순히 구호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랍 유목민들의 하렘에 팔려가 노예가 된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막을 횡단하는 위험한 '구출 작전'을 감행했다. 그녀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아랍 족장들과 직접 담판을 벌이는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삶은 총칼이 아닌, 사랑과 신뢰, 그리고 끈질긴 협상을 통해 어떻게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이다. 본 글은 이처럼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카렌 예페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녀가 어떻게 머나먼 아르메니아의 선교사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대학살의 참상 속에서 그녀가 펼쳤던 영웅적인 난민 구호 및 구출 활동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시리아 알레포에 세운 '희망의 마을'이 남긴 유산의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교육자를 꿈꾼 소녀, 아르메니아로 향하다
카렌 예페는 1876년 덴마크에서 태어나 교사가 되기를 꿈꾸던 평범한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삶이 바뀐 것은, 당시 오스만 제국 내에서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박해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1902년 덴마크의 한 강연회에서 아르메니아인 고아들의 참상에 대한 강연을 듣고, 그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903년, 그녀는 덴마크의 선교 단체 '여성 선교 연합(Women's Missionary Organization, 보딜 비요른과 같은 단체)'의 파송을 받아, 오스만 제국 동부의 우르파(Urfa)로 향했다. 그녀는 그곳의 독일 선교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교사로 일하며, 300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 고아들을 가르치고 돌보았다. 그녀는 아이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보듬는 따뜻한 어머니이자, 뛰어난 교육자였다.

본론 2: 대학살의 폭풍 속, 구원의 방주가 되다
1915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시작되면서 우르파의 평화는 산산조각 났다. 터키 군인들과 비정규군들은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지붕 밑의 피난처
대학살의 광기 속에서, 카렌 예페의 집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비밀 피난처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집 지하실과 다락방에 수십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숨겨주었다. 터키 군인들이 집을 수색할 때마다,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당당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하여 위기를 넘겼다. 그녀의 용기와 지혜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결국 학살을 피하지 못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시리아 사막을 향한 '죽음의 행진'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이 끔찍한 경험은 그녀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이들을 찾아 돕는 것을 자신의 남은 평생의 사명으로 삼게 된다.

사막을 횡단하는 구출 작전
전쟁이 끝난 후, 카렌 예페는 국제 연맹의 '여성과 아동 보호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시리아의 알레포(Aleppo)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녀는 대학살 과정에서 베두인(Bedouin)족과 쿠르드족 등 아랍 유목민들에게 팔려가거나 납치되어, 그들의 하렘에서 노예나 강제 신부로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이 수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을 시작했다. 그녀는 아랍인 조력자들과 함께, 직접 사막을 횡단하며 유목민 부족들을 찾아다녔다. 그녀는 아랍의 관습을 존중하고, 아랍어로 그들과 대화하며, 부족 족장들과 직접 담판을 벌였다. 그녀는 돈으로 여성을 '사는' 대신, 족장들의 명예와 자비심에 호소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그녀의 진심과 용기에 감동한 많은 아랍 족장들이 그녀를 돕기 시작했고, 그녀는 약 10년 동안 2,000명이 넘는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을 기적적으로 구출해냈다.

본론 3: 알레포의 농업 공동체 - 새로운 희망을 심다
구출된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단순히 자유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터전이 필요했다. 그들 대부분은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고, 돌아갈 가족이나 고향도 없었다.

이에 카렌 예페는 알레포 외곽에 농업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곳은 단순한 난민 수용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 함께 일하고 서로를 돌보며, 자립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였다. 그녀는 이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기술을 가르쳤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했다.

그녀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더 이상 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리아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뿌리내리기를 바랐다. 그녀의 노력으로 세워진 이 '희망의 마을'들은, 오늘날 시리아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결론: 행동하는 양심, 아르메니아의 어머니
1935년, 30년이 넘는 헌신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카렌 예페는 59세의 나이로 시리아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해 바쳤고, 그들의 땅에 묻혔다.

카렌 예페는 위대한 신학자나 웅변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대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인간이 어디까지 선하고 용감해질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그녀의 유산은 그녀가 남긴 건물이나 기관을 넘어선다.

그녀는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한 구원자였다. 그녀의 용기가 없었다면,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사막의 노예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녀는 문화 간 화해의 다리를 놓았다. 그녀는 아랍인들을 적으로 대하는 대신, 그들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 신뢰를 쌓고 협력함으로써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원한 친구이자 어머니다. 그녀의 이름은 보딜 비요른과 함께,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관에 '의인'으로서 영원히 기록되어 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의 가슴속에 '덴마크 어머니'로 기억되고 있다.

카렌 예페의 삶은,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끈질긴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길을 내고 오아시스를 판 위대한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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