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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드 푸코 (Charles de Foucauld)

알제리 사하라 사막의 투아레그족 가운데서 은수자처럼 살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준 가톨릭 사제입니다.

사하라의 형제, 샤를 드 푸코: 가장 낮은 곳에서 그리스도를 살다
서론: 문명 세계를 등지고 사막으로 향한 귀족
20세기 초,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의 깊숙한 곳. 투아레그(Tuareg)족 유목민들 사이에서 '카데르(Kader)'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음식을 나누며 살았던 한 프랑스인 은수자(hermit)가 있었다. 그는 프랑스 최고 명문가의 후손이자 부유한 상속자였고, 유능한 군 장교이자 저명한 탐험가였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모든 영광과 안락을 버리고, 가장 가난하고 잊혀진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보편적 형제(universal brother)'가 되어 침묵과 섬김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택했다. 그의 이름은 샤를 드 푸코, 2022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된 현대 영성의 거인이다.

그의 선교는 전통적인 방식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평생 단 한 명의 사람도 개종시키지 못했으며, 교회를 세우거나 제도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선교 방식은 '존재' 그 자체였다. 그는 이슬람교도인 투아레그족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교하는 대신, 그저 그들 가운데 살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며, 성체 앞에 홀로 엎드려 기도하는 삶을 통해 '나자렛 예수의 숨겨진 삶'을 증거하고자 했다.

그의 삶은 방탕했던 청년기, 극적인 회심, 급진적인 가난의 추구, 그리고 사막에서의 고독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한 편의 영적 서사시이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거의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실패한 선교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그의 삶과 글은 20세기 기독교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예수의 작은 형제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을 비롯한 수많은 영성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씨앗이 되었다. 본 글은 이처럼 '광야의 예언자'와 같았던 샤를 드 푸코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방탕했던 귀족 청년이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는지 그의 회심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사하라 사막에서 그가 추구했던 독특한 '존재의 선교' 방식과 그 영성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고독한 죽음이 어떻게 시대를 넘어 더 큰 열매를 맺게 되었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탕자 귀족, 하나님을 다시 만나다
샤를 드 푸코의 거룩한 삶은, 역설적이게도 극도로 방탕하고 불신으로 가득 찼던 청년기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다"
1858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풍족한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청소년기에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열렬한 불가지론자(agnostic)가 되었다. 그는 "나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고 훗날 고백했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장교가 된 그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자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는 "뚱보 푸코"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탐식했으며,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군에서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삶은 목적 없이 쾌락만을 추구하는 공허한 삶이었다.

모로코 탐험과 이슬람 신앙의 충격
그의 삶에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군을 떠나 1883년부터 1년여간 감행한 북아프리카 모로코 탐험이었다. 그는 유대인 랍비로 위장하고,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금단의 땅이었던 모로코를 탐험하며 지도를 제작했다. 이 공로로 그는 프랑스 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으며 탐험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 탐험에서 그를 더 깊이 사로잡은 것은 지리적 발견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교도들의 깊고 절대적인 신앙심이었다. 그는 하루 다섯 번, 어디에 있든지 무릎을 꿇고 알라에게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잃어버렸던 '절대자'에 대한 감각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이슬람은 내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강력하게 살아있는 신앙을 목격하자, 나는 다시 신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파리의 한 성당을 찾아가, 당시 존경받던 영적 지도자였던 앙리 위블랭(Henri Huvelin) 신부에게 자신의 영적 고뇌를 털어놓았다. 위블랭 신부는 그의 지적인 질문에 답하는 대신, "먼저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보시오. 그러면 믿게 될 것이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에 순종하여 무릎을 꿇는 순간, 12년간의 불신앙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1886년 10월, 탕자 귀족은 마침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본론 2: 나자렛 예수의 숨겨진 삶을 따라서
회심 이후, 샤를 드 푸코의 유일한 열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그리고 급진적으로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영광과 기적을 행하시는 공생애의 예수가 아닌, 30년간 나자렛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목수로서 침묵 속에 사셨던 '숨겨진 삶의 예수'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가난과 비천함을 향한 갈망
그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셨으니, 나도 그분처럼 가장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귀족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가장 엄격한 수도회 중 하나인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러나 그는 수도원의 삶조차 충분히 가난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는 수도원을 떠나, 예수님이 실제로 사셨던 땅, 나자렛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의 가난한 클라라 수녀원에서 정원사이자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으로 3년간 살았다. 그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침묵과 노동, 그리고 기도 속에서 나자렛의 예수와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했다.

사하라의 은수자, 투아레그족의 친구
1901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마침내 자신의 최종적인 소명지를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기독교 문명 세계의 가장 변방, 사하라 사막의 잊혀진 영혼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는 알제리 남부의 베니 아베스(Beni Abbès)에 작은 암자를 짓고, '모든 사람의 보편적 형제'가 되기를 서원했다. 그는 자신의 암자 문 위에 "이 문을 지나는 모든 이에게는, 내가 그리스도인 것처럼 그들도 그리스도처럼 대접받을 것이다"라고 써 붙였다.

1905년, 그는 더 깊은 사막 속으로 들어가, 당시 프랑스인들에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유목 민족 투아레그족(Tuareg)이 사는 타만라세트(Tamanrasset)에 정착했다. 그는 여기서 단 한 명의 개종자도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그들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어, 그저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었다.

언어와 문화 연구: 그는 10년 넘게 투아레그족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연구하여, 최초의 투아레그어-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하고 그들의 시와 문화를 기록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투아레그 문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침묵의 증거: 그는 매일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 기도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막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살아있는 성체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믿었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나자렛의 예수처럼 사랑과 우정, 그리고 섬김의 삶으로 조용히 살아낼 때 가장 강력하게 증거된다는 것을.

본론 3: 광야에서 죽은 밀알, 위대한 열매를 맺다
샤를 드 푸코의 마지막은 그의 삶처럼 고독했다.

고독한 죽음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이 사하라 사막에까지 미치면서, 부족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1916년 12월 1일, 그의 암자를 습격한 한 무리의 도적들이 쏜 총에 맞아 그는 58세의 나이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의 죽음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외로운 죽음이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투아레그족 가운데서, 그는 단 한 명의 세례 신자도 얻지 못하고 실패한 선교사처럼 보였다.

죽음 이후에 피어난 영성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의 삶은 이 말씀의 완벽한 성취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영적인 글과 일기들이 출판되면서 그의 깊은 영성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삶, 즉 세상의 가장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어 '나자렛 예수의 숨겨진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그의 비전은, 20세기 교회의 수많은 영혼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1933년, 르네 브와욤(René Voillaume) 신부를 중심으로, 샤를 드 푸코의 영성을 따르는 '예수의 작은 형제들(Little Brothers of Jesus)'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이들은 푸코처럼,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웃들, 즉 공장 노동자, 유목민, 빈민가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침묵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 이후 **'예수의 작은 자매들(Little Sisters of Jesus)'**을 비롯하여, 그의 영성을 따르는 수많은 남녀 수도회와 평신도 공동체들이 전 세계에 세워졌다.

샤를 드 푸코는 살아생전 단 한 명의 제자도 없었지만, 죽어서 수만 명의 영적 자녀들을 얻게 된 것이다. 2022년 5월 15일, 가톨릭 교회는 마침내 그를 성인으로 공식 시성하여, 그의 삶이 현대 교회가 따라야 할 거룩함의 모델임을 선포했다.

결론: 존재가 곧 선교였다
샤를 드 푸코의 삶은 전통적인 선교의 모든 기준을 뒤엎는다. 그는 성공적인 사역의 척도가 개종자의 숫자나 세워진 교회의 크기에 있지 않음을, 오히려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를 닮아갔느냐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doing)'보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being)'에 집중했다. 그의 선교는 프로그램이나 전략이 아니었다. 그의 선교는 그의 존재 자체, 즉 가장 낮은 곳에서 침묵과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그의 삶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가장 강력한 복음 증거는 화려한 언변이나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나자렛 예수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거룩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방탕한 귀족에서 사하라의 은수자로, 그리고 마침내 교회의 성인으로. 샤를 드 푸코의 여정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의 고독했던 삶과 죽음은, 시대를 넘어 우리 각자에게 '가장 낮은 자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려주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외침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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