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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그렌펠 (George Grenfell)
콩고 강 유역을 탐험하며 지도를 제작하고 복음을 전한 침례교 선교사입니다.

콩고강의 개척자, 조지 그렌펠: '평화호'를 타고 어둠의 심장부로 들어가다
서론: '평화호'라는 이름의 역설
19세기 후반, 아프리카 대륙의 심장을 관통하는 거대한 콩고강 위로 작은 증기선 한 척이 흰 연기를 내뿜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배의 이름은 '평화호(The Peace)'. 그러나 그 배가 항해하던 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탐욕과 폭력이 자행되던 '어둠의 심장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 '콩고 독립국'이었다. 이 역설적인 이름의 배를 이끌었던 선장이 바로 영국의 침례교 선교사이자 탐험가, 조지 그렌펠이었다.
그는 데이비드 리빙스턴, 헨리 스탠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아프리카 탐험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단순히 지리적 발견이나 명성에 있지 않았다. 그는 강을 '하나님의 길'로 삼아,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아프리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자 했던 선교사였다. 그의 손에는 성경뿐만 아니라, 미지의 강줄기를 기록할 측량 기구와 지도가 들려 있었다.
그의 삶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과, 자신이 목격한 제국주의의 잔혹한 범죄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예언자적 사명 사이의 고뇌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평화호'를 타고 수천 킬로미터의 물길을 열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지옥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본 글은 이처럼 콩고강의 개척자였던 조지 그렌펠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젊은 기술자였던 그가 어떻게 아프리카의 강을 향한 비전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증기선 '평화호'를 통해 그가 펼쳤던 혁신적인 선교 사역과, 레오폴드 2세의 폭정에 맞서 진실을 외쳤던 그의 용기를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도와 양심이라는 두 개의 유산을 남긴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젊은 기술자, 아프리카의 강을 꿈꾸다
조지 그렌펠은 1849년 영국 콘월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학 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아니라, 기계 공장에서 기술을 배운 실용적인 엔지니어였다. 바로 이 실용적인 배경이 그의 선교 사역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아프리카로의 부르심과 첫 사역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침례교 선교회(BMS)를 통해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했다. 1875년, 그는 카메룬에 도착하여 첫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곧 아프리카의 광활한 내륙에 접근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가 바로 '강'임을 간파했다. 그는 작은 보트를 타고 강줄기를 탐사하며, "강은 도시들을 연결하는 위대한 거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을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용 증기선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의 꿈이 구체적인 방향을 찾게 된 것은, 탐험가 헨리 스탠리가 1877년 콩고강의 전 구간을 탐험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물줄기가 아프리카 대륙의 심장부로 통하는 '하나님의 고속도로'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한 그렌펠은, 자신의 사명지를 콩고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본론 2: '평화호(The Peace)' - 콩고강을 누빈 복음의 증기선
콩고강은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거대한 폭포와 급류 지대가 있어, 바다에서 배가 직접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난관 앞에서 그렌펠과 침례교 선교회는 대담하고 창의적인 계획을 세웠다.
강 위로 옮겨진 배
그들은 영국에서 길이 70피트의 강철 증기선을 제작한 뒤, 수백 개의 조각으로 분해했다. 이 조각들은 배편으로 콩고 해안까지 운송된 후, 수백 명의 현지인 짐꾼들의 어깨에 실려 300km가 넘는 험준한 육로를 통해 급류 지대 상류까지 운반되었다. 그리고 1884년, 그렌펠은 자신의 공학 기술을 총동원하여 강가에서 이 조각들을 다시 조립하여, 마침내 '평화호'를 콩고강 상류에 띄우는 데 성공했다. 이는 엄청난 인간 의지와 기술의 승리였다.
떠다니는 선교 기지
'평화호'는 그렌펠의 사역의 중심이었다. 그것은 그의 집이자 연구실이었고, 이동 수단이자 선교 기지였다. 그는 '평화호'를 타고 이후 20년 동안 콩고강과 그 지류들을 구석구석 탐사했다.
탐험과 지도 제작: 그는 단순한 선교사를 넘어, 뛰어난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였다. 그는 항해 중에 정밀한 측량을 통해 콩고강 수계의 방대한 지역을 지도로 만들었다. 그가 제작한 지도는 매우 정확하여, 영국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고 수십 년간 이 지역의 표준 지도로 사용되었다.
선교 거점 개척: 그는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가, 이전에 외부인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부족들을 만났다. 그는 강가의 전략적 요충지마다 교사와 전도사들을 상주시키는 선교 거점을 세워, 콩고 내륙 선교를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본론 3: 어둠의 심장부에서 진실을 외치다
그렌펠이 '평화호'를 타고 콩고강을 탐사하던 시기는,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국왕이 '콩고 독립국'이라는 이름 아래 이 지역을 자신의 사유지로 삼아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착취를 자행하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인도주의의 가면을 쓴 야만
레오폴드 2세는 노예 무역을 근절하고 아프리카를 문명화한다는 인도주의적 명분을 내세워 콩고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상아와 고무 수탈을 통한 부의 축적이었다. 그의 대리인들은 원주민들에게 비현실적인 고무 할당량을 부과하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그들의 손목을 자르거나, 마을 전체를 학살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장부』는 바로 이 시기의 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진실을 기록한 증인
강을 따라 항해하며 수많은 마을을 방문했던 그렌펠은 이 끔찍한 현실의 첫 번째 목격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고무 채취를 위해 끌려가는 노예 행렬, 손목이 잘린 아이들, 폐허가 된 마을들을 직접 목격하고 자신의 일지와 편지에 상세히 기록했다.
처음에 그는 선교사로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주저했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콩고 독립국 관리들의 만행을 비판하고, 런던의 선교 본부에 이 사실을 알리는 보고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의 보고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셰퍼드 등 다른 선교사들의 증언과 함께, 훗날 E. D. 모렐과 로저 케이스먼트가 주도한 국제적인 콩고 개혁 운동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되었다.
그의 이러한 비판 활동은 콩고 독립국 정부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당국은 그의 활동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새로운 선교 거점 설립을 불허했으며, 그를 비방하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는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선교사의 사명과, 불의에 맞서 진실을 외쳐야 하는 예언자적 사명 사이에서 깊이 고뇌해야 했다.
결론: 지도와 양심을 남긴 개척자
1906년, 조지 그렌펠은 콩고강 유역에서 30년 넘게 헌신한 끝에, 흑수열(blackwater fever)이라는 치명적인 말라리아에 걸려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개척하고 사랑했던 땅, 그러나 그를 지치게 했던 바로 그 땅에 묻혔다.
그의 삶은 여러 겹의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첫째, 그는 콩고강의 지도를 그린 위대한 탐험가였다. 그의 과학적이고 정밀한 작업은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지리학적 지식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둘째, 그는 콩고 침례교회의 초석을 놓은 선구적인 선교사였다. 그가 세운 선교 거점들은, 훗날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될 콩고 침례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셋째, 그는 어둠의 심장부에서 양심의 등불을 든 용감한 증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제국주의의 잔혹한 범죄를 고발했다. 그의 증언은 20세기 최초의 국제 인권 운동 중 하나인 콩고 개혁 운동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지 그렌펠은 '평화호'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폭력과 탐욕으로 가득 찬 땅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성적인 정신으로 강의 지도를 그렸고, 기독교적인 마음으로 그 땅의 슬픔을 기록했다. 비록 그가 맞서 싸웠던 어둠의 세력 앞에서 지치고 낙담한 채 눈을 감았지만, 그의 항해는 인류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두 가지 유산, 즉 미지의 세계를 밝히는 '지도'와 시대의 불의를 고발하는 '양심'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