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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 (Eugene Bell)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 개척과 교육, 의료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호남의 사도, 유진 벨: 4대에 걸친 헌신의 씨앗을 심다
서론: 유진벨 재단, 그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에게 '유진벨'이라는 이름은 북한의 결핵 환자들에게 의료 지원을 하는 '유진벨 재단'을 통해 익숙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숭고한 인도주의 활동의 뿌리가 되는 한 세기 전, 이 땅의 가장 소외되었던 남쪽 땅끝 호남(湖南)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한 선교사의 이름이 바로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裵裕祉)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유진 벨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보다 10년 늦은 1895년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당시까지 복음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호남 지역을 개척한 '호남의 사도'였다. 그는 낯선 땅 나주와 목포, 광주에 교회의 초석을 놓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워 근대의 빛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그 자신의 30년간의 사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유산은 그의 자녀들을 통해 또 다른 위대한 선교 가문인 '린튼(Linton)' 가문과 하나가 되었고, 마치 거대한 강물처럼 4대, 5대에 걸쳐 한국 역사의 가장 아픈 순간들을 함께하며 오늘날 분단된 한반도의 상처까지 보듬는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본 글은 이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거대한 숲을 이룬 유진 벨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왜 가장 척박했던 땅 호남으로 향했는지 그의 소명의 과정을 살펴보고, 광주를 중심으로 펼쳤던 그의 선구적인 사역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헌신이 어떻게 세대를 넘어 '유진벨 재단'으로 이어지며 한반도 전체를 향한 사랑으로 확장되었는지 그 놀라운 유산의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남쪽 땅끝, 호남을 향한 부르심
유진 벨의 사역은 처음부터 가장 어렵고 소외된 곳을 향한 의지적인 선택이었다.
척박한 땅, 호남으로
1868년 미국 켄터키에서 태어난 유진 벨은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5년 미국 남장로회 파송을 받아 27세의 나이로 아내 로티(Lottie)와 함께 조선 땅을 밟았다. 당시 서울과 평양 등 북부 지역에는 이미 여러 선교사들이 활동하며 교회의 기틀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넓은 호남 지역은 지리적으로 멀고, 중앙 정부로부터 소외되었으며,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일 만큼 변화에 대한 저항과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곳이었다.
유진 벨은 바로 이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땅'을 자신의 사명지로 선택했다. 그는 1896년부터 나주를 거점으로, 배나 조랑말, 혹은 자신의 두 발로 험준한 남도의 산과 들을 넘나들며 순회 전도를 시작했다. 그는 마을 장터를 찾아다니고, 사랑방에 모여 앉아 복음을 전하며,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었다.
목포와 광주, 선교의 거점을 세우다
그는 곧 개항장이었던 목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898년 목포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목포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진료소를 열었고,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의 더 큰 비전은 호남의 중심부, 즉 광주를 향하고 있었다.
1904년, 그는 마침내 광주 양림동에 터를 잡고, 훗날 호남 지역 전체를 위한 선교의 중심 기지가 될 '광주 선교부(Gwangju Station)'를 설립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광주'하면 담양의 방죽을 쌓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다시는 광주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할 만큼 척박했던 땅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본론 2: 광주에서의 씨 뿌림 - 교육과 의료의 터를 닦다
광주에 정착한 유진 벨은 복음 전도와 더불어,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총체적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교회가 지역 사회 전체를 섬기고 변화시키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
유진 벨은 호남 지역의 미래가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데 달려 있음을 깊이 인식했다. 그는 1908년 남자아이들을 위한 **숭일학교(崇一學校)**와, 여선교사 클레멘타인 프레스턴(Clementine Preston)과 함께 여자아이들을 위한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설립을 주도했다.
이 학교들은 단순히 성경과 신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요람이 되었다.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는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광주 지역 학생 운동을 이끌었으며, 수많은 졸업생들이 독립운동가와 사회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가 심은 교육의 씨앗은 신앙의 인재뿐만 아니라, 민족의 동량을 길러낸 것이다. 이 학교들의 신앙과 교육의 전통은 오늘날 호남신학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교육 기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치유의 손길, 제중원 설립
유진 벨 자신은 의사가 아니었지만, 의료 선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동료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과 협력하여, 1905년 광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주 제중원'을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작은 진료소는 훗날 광주기독병원으로 발전하여,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광주와 호남 지역민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본론 3: 대를 잇는 사랑 - 벨과 린튼 가문의 유산
유진 벨의 사역은 1925년, 30년간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57세의 나이로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그의 자녀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두 선교 가문의 결합
유진 벨의 딸 샬럿 벨(Charlotte Bell)은, 호남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또 다른 위대한 선교사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인돈)과 결혼했다. 이로써 호남 선교의 양대 개척자였던 벨 가문과 린튼 가문은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이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교 명가'의 탄생을 의미했다.
'유진벨 재단'으로 피어난 헌신
유진 벨의 헌신의 정신은 세대를 건너뛰어, 그의 외증손자인 **스티븐 린튼(Stephen Linton, 인세반)**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꽃을 피웠다. 스티븐 린튼은 1995년, 자신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위대한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유진벨 재단(The Eugene Bell Foundation)'**을 설립했다.
그는 증조할아버지 유진 벨이 100년 전 가장 소외되었던 땅 호남으로 향했던 것처럼, 오늘날 한반도에서 가장 고립되고 고통받는 땅, 바로 북한으로 향했다. 유진벨 재단은 지난 30년 가까이, 정치적 이념과 상황에 관계없이 묵묵히 북한의 결핵 환자, 특히 치료가 어려운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을 위한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지원하는 사역을 펼쳐왔다.
한 세기 전, 호남 땅의 한 영혼을 긍휼히 여겼던 한 선교사의 사랑이, 이제 그의 후손들을 통해 분단된 한반도의 가장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사랑의 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론: 호남 땅에 묻힌 씨앗, 한반도 전역에 열매 맺다
유진 벨은 1925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그가 평생을 개척하고 사랑했던 땅,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그는 죽어서도 온전히 '호남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삶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가장 척박한 땅을 선택하여, 30년간 묵묵히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짓고, 병원의 터를 닦았던 신실한 개척자였다.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세운 건물들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시작된 '대를 잇는 사랑'이다. 그가 호남 땅에 심은 하나의 씨앗은, 그의 자녀와 손자, 증손자들을 통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성한 나무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 나무는 이제 호남을 넘어, 분단된 한반도 전체에 치유와 화해, 그리고 희망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유진 벨의 삶은, 한 사람의 진실한 헌신이 어떻게 세대를 넘어 기적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