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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베어드 (William M. Baird)

숭실대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해 한국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교육 선교사입니다.

숭실의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 학문과 신앙으로 민족의 등불을 밝히다
서론: 평양 기적의 또 다른 주역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평양의 사도' 사무엘 마펫의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그 위대한 부흥의 역사 뒤에는, 마펫과 평생의 동역자이자 친구로서, 교육이라는 또 다른 굳건한 기둥을 세운 조용한 거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베어드, 한국명 배위량(裵緯良). 그는 숭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평양신학교의 기틀을 닦은 위대한 교육 선교사였다.

만약 마펫이 역동적인 순회 전도를 통해 부흥의 '영토'를 넓힌 야전 사령관이었다면, 베어드는 그 영토를 지키고 다음 세대를 길러낼 인재들을 양성하는 '기지 사령관'이었다. 그는 불같은 부흥의 열기가 단지 감정적인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깊이 있는 신학 교육과 체계적인 학문 수련을 통해 지속 가능한 신앙 공동체로 뿌리내리게 하는 데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의 삶은 화려한 웅변이나 극적인 사건보다는, 서재와 강단에서 묵묵히 다음 세대를 위해 벽돌을 쌓아 올린 교육자의 성실함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 대학인 숭실학당을 설립하여,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신앙과 민족의 미래를 향한 꿈을 심어주었다. 본 글은 이처럼 '교육을 통한 선교'의 위대한 모델을 제시한 윌리엄 베어드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한국 교육 선교의 선구자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숭실학당과 평양신학교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교육 철학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헌신이 한국 근대 고등 교육과 신학 교육에 어떤 불멸의 초석을 놓았는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학자의 길, 조선을 향한 헌신
윌리엄 베어드는 1862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태어나 하노버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 재학 시절부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며, 동기였던 사무엘 마펫과 함께 학생자원운동(SVM)에 참여하며 해외 선교에 헌신하기로 서원했다.

1891년, 그는 아내 애니(Annie)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파송을 받아 부산에 도착하며 한국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부산과 대구에서 잠시 활동하며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고, 곧 교육 선교에 대한 특별한 재능과 소명을 발견하게 되었다.

1895년, 그는 마펫의 부름을 받아 한국 북부 선교의 중심지로 떠오르던 평양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이는 그의 평생의 사역지가 될 운명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평양에 도착하여, 마펫이 시작한 순회 전도와 사랑방 사역을 도우며,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에 교육이라는 밭을 가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선교의 미래가, 단순히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신앙과 실력을 겸비한 한국인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데 달려있음을 확신했다.

본론 2: 숭실학당 - 민족의 인재를 기르는 요람
윌리엄 베어드의 가장 위대하고 가시적인 유산은 바로 그가 설립하고 평생을 바쳐 키워낸 숭실학당이다.

작은 시작, 위대한 비전
1897년 10월, 베어드는 사무엘 마펫이 자신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던 작은 성경 공부 모임을 이어받아, 자신의 집에서 '숭실학당(崇實學堂)'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숭실'은 "진리를 숭상하고 실천한다(崇尙眞理 實踐躬行)"는 의미로, 그의 교육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중등 교육 기관을 넘어, 한국인을 위한 최초의 기독교 근대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성경과 신학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 역사, 법률 등 서구의 근대 학문을 배워, 교회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를 이끌어갈 실력 있는 인재가 되기를 꿈꿨다.

한국 최초의 대학, 그리고 민족 운동의 중심
베어드의 헌신적인 노력과 교육적 명성에 힘입어 숭실학당은 빠르게 성장했다. 1906년, 숭실학당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아, 한국 최초의 4년제 근대 대학인 '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으로 승격되었다. 이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언더우드 설립)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숭실대학은 미국 북장로회와 감리교 등 여러 교파가 연합하여 운영하는 초교파적인 기관으로 발전했다.

숭실대학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는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다. 베어드는 학생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숭실의 졸업생들은 3.1 운동과 신간회 활동, 그리고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숭실은 안창호, 조만식, 김동인 등 수많은 애국지사와 문인들을 배출한 민족 교육의 요람이었다.

평양신학교의 학문적 기틀
윌리엄 베어드는 숭실대학의 총장으로서뿐만 아니라, 1901년 마펫과 함께 설립한 평양 장로회 신학교의 핵심적인 교수이자 이론가로서도 활동했다. 마펫이 신학교의 행정과 영성을 책임지는 '교장'이었다면, 베어드는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만들고 신학의 학문적 기틀을 닦은 '학장'과도 같았다. 그는 자신의 깊이 있는 신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첫 목회자들이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앙 위에 굳건히 서도록 가르쳤다. 숭실대학과 평양신학교는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만드는 두 개의 강력한 엔진이었다.

본론 3: 신사참배 반대와 신앙의 절개
1915년, 25년간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건강이 악화된 베어드는 숭실대학 총장직을 아들인 윌리엄 베어드 주니어(W. M. Baird, Jr., 배의량)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신앙적 영향력은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

1930년대, 일제가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숭실대학은 윌리엄 린튼이 이끌던 전주의 신흥학교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이는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교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가르쳤던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의 신앙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

수년간의 끈질긴 저항 끝에, 숭실대학은 결국 우상숭배를 하느니 차라리 학교 문을 닫겠다며, 1938년 자진 폐교하는 길을 택했다. 비록 학교의 건물은 문을 닫았지만, "진리와 봉사"라는 숭실의 정신은 살아남아, 해방 이후 1954년 서울에서 재건되어 오늘날의 숭실대학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윌리엄 베어드가 심었던 신앙 교육의 씨앗이 얼마나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윌리엄 베어드는 1931년, 평양에서 눈을 감아 그곳의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결론: 교육으로 교회의 백년대계를 세우다
윌리엄 베어드는 사무엘 마펫이라는 역동적인 개척자의 가장 완벽한 동역자였다. 마펫이 성령의 불을 지폈다면, 베어드는 그 불이 꺼지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도록 기름을 붓고 심지를 돋우는 역할을 했다.

그의 유산은 명확하다.

그는 한국 근대 고등 교육의 아버지이다. 그가 세운 숭실대학은 단순한 지식 전달 기관을 넘어, 암울한 시대 속에서 민족의 등불 역할을 한 신앙과 애국의 요람이었다.

그는 한국 장로교 신학 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그가 평양신학교에서 닦은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기틀은 오늘날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의 중요한 뿌리가 되고 있다.

윌리엄 베어드의 삶은 선교에 있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는 당장의 부흥에 만족하지 않고, 교육을 통해 교회의 백년대계를 준비했다. 그는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뿐만 아니라, 교실에서 묵묵히 분필을 잡는 손길 역시 위대한 선교임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평양의 부흥이 단지 감정적인 운동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지속적인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윌리엄 베어드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다음 세대를 길러낸 위대한 교육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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