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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필라스 (Ulfilas)

4세기 고트족에게 복음을 전하며 고트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고트족의 사도, 문자를 창조하고 성경을 번역한 개척자
서론: '야만'의 땅에 말씀의 씨앗을 심다
4세기 로마 제국의 국경 너머, 다뉴브 강 북쪽의 광활한 땅에는 로마인들이 두려움과 경멸을 섞어 '야만인(Barbarian)'이라 부르던 게르만족의 일파, 고트족(Goths)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 문명의 관점에서 볼 때 글자도, 체계적인 법도 없는 호전적인 이교도 집단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전환기 속에서, 이 '야만'의 땅에 기독교 문명의 빛을 전하고, 한 민족의 영혼을 바꾼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울필라스, '작은 늑대'라는 의미의 고트어 이름을 가진 인물이다.

울필라스는 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단순히 복음을 설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자가 없던 민족에게 그들의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알파벳을 창조했으며, 그 문자로 성경 전체를 번역하는 경이로운 과업을 완수했다. 그의 사역은 훗날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슬라브족에게 행한 위업의 위대한 선구적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찬사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그의 신학적 정체성은 4세기 기독교 세계를 양분했던 격렬한 논쟁의 중심, 즉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정통 니케아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성공적으로 '이단'을 전파한 인물이라는 복잡하고 논쟁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그는 과연 위대한 사도인가, 아니면 유능한 이단 전파자인가?

본 글은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인 울필라스의 삶과 유산을 심도 있게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로마와 고트라는 두 세계의 경계에서 성장한 그의 독특한 배경과 그가 어떻게 아리우스주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고트족의 주교가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고트 문자 창제와 성경 번역이라는 그의 불멸의 업적이 지닌 문화적, 언어학적, 그리고 신학적 의미를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이 고트족과 초기 중세 유럽의 역사에 어떤 깊고 모순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그 복잡한 유산을 평가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두 세계의 경계에서 태어난 사도
울필라스의 사역은 그의 출생 배경 자체에 예비되어 있었다. 그는 두 개의 다른 문화, 즉 로마와 고트의 경계에 서 있었기에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두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었다.

고트족 땅의 카파도키아인
울필라스는 311년경, 다뉴브 강 북쪽의 고트족 영토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혈통은 순수한 고트족이 아니었다. 그의 조부모는 3세기 중반 고트족의 침입 당시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포로로 잡혀온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고트족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완벽하게 동화되었지만, 동시에 로마-그리스 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유산을 가정에서 물려받았다.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은 그에게 엄청난 자산이 되었다. 그는 고트어는 물론, 당시 제국의 공용어였던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고트인의 시각과 로마인의 시각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이는 훗날 복음이라는 로마 세계의 메시지를 고트인의 심성에 맞게 번역하고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리우스주의 신앙과 주교 서품
울필라스가 활동하던 4세기는 기독교 신학이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였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 예수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homoousios)을 가지신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 신앙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창조된 첫 피조물이며, 성부와는 유사한 본질(homoiousios)일 뿐 동일하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후, 동방의 비잔티움 황제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상당수는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했다.

울필라스는 바로 이 아리우스주의 신앙의 흐름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그는 젊은 시절, 고트족 사절단의 일원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되어 수년간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서 아리우스주의 신학의 세례를 받았고, 그의 신앙과 재능을 높이 평가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 유세비우스에 의해 341년, 30세의 나이로 '고트족 그리스도인들의 주교'로 서품받았다.

중요한 것은, 당시 울필라스에게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이 아니라, 제국의 수도에서 공인된 가장 합리적이고 유력한 신학적 흐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가장 참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동족에게 전해야 한다는 순수한 선교적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본론 2: 문자의 창조, 성경의 탄생
고트족의 주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울필라스는 곧바로 선교의 가장 근본적인 장벽에 부딪혔다. 고트족에게는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할 문자가 없었던 것이다. 복음은 '기록된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어떻게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고트 알파벳: 하나의 문명을 창조하다
이 문제 앞에서 울필라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적 창조 작업 중 하나를 수행했다. 그는 고트어의 독특한 음성 체계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알파벳을 발명한 것이다. 그는 주로 그리스어 알파벳을 기반으로 하되, 라틴어 알파벳과 게르만족이 사용하던 고대의 룬(Rune) 문자 일부를 차용하여 27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고트 문자를 창조해냈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성취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민족에게 처음으로 자신들의 역사와 사상, 신앙을 기록할 수 있는 도구를 선물한 문명사적 사건이었다. 울필라스는 이 문자를 통해 고트족을 로마인들이 멸시하던 '역사 없는 민족'에서 '기록을 가진 민족'으로 격상시켰다.

고트어 성경: '야만어'로 번역된 하나님의 말씀
새로운 문자를 창조한 울필라스는 곧바로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그리스어 70인역 성경(Septuagint)을 원본으로 삼아, 신구약 성경 대부분을 고트어로 번역하는 기념비적인 과업을 완수했다.

이 번역 작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을 동반했다. '영', '거룩', '구원', '회개'와 같은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개념들은 고트어에 존재하지 않았다. 울필라스는 기존의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단어를 차용하거나, 혹은 완전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의 번역 과정은 곧 고트어라는 언어 자체를 신학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창조의 과정이었다.

고대 역사가 필로스토르기우스(Philostorgius)에 따르면, 울필라스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의도적으로 한 부분을 제외했다고 한다. 바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였다. 그 이유는 이 책들에 담긴 수많은 전쟁 이야기가 이미 호전적인 고트족을 더욱 부추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화는 그가 단순히 기계적인 번역가를 넘어, 자신의 양 떼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영적 유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던 지혜로운 목자였음을 보여준다.

울필라스가 번역한 고트어 성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게르만어 문헌이다. 특히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코덱스 아르겐테우스(Codex Argenteus)', 즉 '은(銀) 성경'은 보라색으로 염색된 양피지 위에 은과 금으로 쓰인 화려하고 아름다운 필사본으로, 울필라스의 번역이 후대 고트족에게 얼마나 소중한 보물로 여겨졌는지를 증명한다.

본론 3: 아리우스주의의 사도, 복잡한 유산
울필라스의 선교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고트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동시에 깊은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성공, 박해, 그리고 새로운 모세
울필라스의 사역은 고트족 사회의 전통적인 이교 신앙을 지키려던 지도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348년경, 아타나리크(Athanaric)가 이끄는 고트족 지도자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이 박해 앞에서 울필라스는 자신의 양 떼를 지키기 위해 역사적인 결단을 내린다. 그는 구약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듯이,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고트족 그리스도인들을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 제국 영토 안으로 망명한 것이다. 당시 아리우스주의에 우호적이었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는 이들을 받아들여, 오늘날 불가리아 북부 지역인 모에시아(Moesia)에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이로써 울필라스는 단순한 주교를 넘어, 한 민족의 일부를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아리우스주의의 확산과 중세 유럽의 갈등
울필라스가 심은 아리우스주의 신앙은 이후 고트족의 민족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계속해서 다뉴브 강 너머의 고트족에게 선교 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 훗날 서고트족(Visigoths)과 동고트족(Ostrogoths)으로 나뉘게 되는 고트족 전체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울필라스의 유산이 지닌 복잡성의 핵심이다.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이들 아리우스파 고트족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이탈리아 등지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이 정복한 땅의 원주민이었던 로마인들은 대부분 정통 니케아 신앙, 즉 가톨릭 신앙을 따르고 있었다. 지배층인 게르만족은 아리우스파, 피지배층인 로마인은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분열은 초기 중세 왕국들의 심각한 내부 갈등 요인이 되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완전한 융합은 수 세기 후 이들 게르만 왕국들이 최종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야 가능했다. 결국 울필라스의 위대한 선교적 성공은, 역설적으로 중세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통합을 지연시키는 장기적인 결과를 낳은 것이다.

결론: 역사적 맥락 속의 위대한 개척자
성 울필라스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하면서도 모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언어학자들에게 그는 게르만어의 원형을 보존한 영웅이며, 그의 고트어 성경은 인도-유럽어족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다. 문화사학자들에게 그는 문자가 없던 민족에게 문명을 선물하고 구술 문화를 기록 문화로 전환시킨 위대한 개척자이다.

그러나 신학의 관점에서 그는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바쳐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였지만, 그가 전한 복음은 훗날 보편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주의였다. 우리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4세기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아리우스주의와 니케아 신앙 사이의 구분은 오늘날처럼 명확하지 않았으며, 제국의 심장부에서조차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배운 가장 참되고 진실한 형태의 기독교를 자신의 민족에게 전하고자 했던 순수한 열정의 소유자였다.

울필라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의 신학적 소속을 넘어, '말씀의 성육신'이라는 선교의 원리를 온몸으로 실천했다는 데 있다. 그는 복음이 진정으로 한 민족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문화 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함을 알았다. 문자를 창조하고 성경을 번역한 그의 기념비적인 업적은, 모든 민족이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보편적 진리를 시대를 앞서 증언한 것이다. 비록 그가 심은 신학의 씨앗은 훗날 역사 속에서 많은 갈등을 낳았지만, 그가 뿌린 문화와 언어의 씨앗은 '야만족'이라 불렸던 한 민족을 영원히 바꾸었고, 유럽 문명의 새벽을 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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