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Номлогчийн үндсэн сургалтын онлайн лекцүүдийн жагсаалт

요하네스 레프만 (Johannes Rebmann)

크라프와 함께 동아프리카에서 사역한 독일 선교사입니다.

킬리만자로의 첫 발견자, 요하네스 레프만: 크라프의 그늘에 가려진 조용한 거인
서론: 산을 본 남자, 세상을 바꾸다
1848년 5월, 동아프리카의 내륙을 여행하던 한 독일인 선교사가 먼 지평선 위로 펼쳐진 경이로운 광경에 숨을 멈췄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거대한 산봉우리가 눈과 얼음으로 하얗게 빛나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킬리만자로산의 만년설을 목격하고 기록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레프만.

그의 이름은 종종 그의 선배이자 동역자였던 요한 루트비히 크라프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크라프가 동아프리카 선교의 비전을 제시한 전략가이자 언어학자였다면, 레프만은 2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선교지를 지키며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복음의 씨앗을 심은 실천가였다. 그는 위대한 탐험가였지만 명성을 좇지 않았고, 뛰어난 언어학자였지만 학문적 성취를 자랑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화려한 영광보다는 고독한 헌신으로, 극적인 사건보다는 꾸준한 인내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아내와 동료를 잃고, 말년에는 시력까지 잃었지만, 결코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본 글은 이처럼 조용하지만 강인했던 선교사, 요하네스 레프만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떻게 동아프리카 선교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그의 기념비적인 킬리만자로 발견과 선교 사역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크라프와의 파트너십 속에서 그가 남긴 독자적인 유산과 그의 삶이 보여주는 '성실함'의 가치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크라프의 부름에 응답한 동역자
요하네스 레프만은 1820년, 크라프와 마찬가지로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 전통 속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위스 바젤의 선교 훈련원을 거쳐, 영국 성공회 선교회(CMS) 소속의 선교사로 헌신했다.

1846년, 그는 동아프리카 몸바사 근처에서 사역하던 중 아내와 딸을 잃고 홀로 고군분투하던 크라프의 동역자 요청에 응답하여 아프리카로 향했다. 두 독일인 경건주의자의 만남은 동아프리카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성격적으로 크라프가 비전가이자 때로 충동적이었다면, 레프만은 신중하고, 겸손하며, 꾸준한 실천가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성품은 완벽한 상호 보완을 이루었다.

그들은 몸바사 근교의 라바이(Rabai)에 선교 본부를 함께 세우고, 동아프리카 내륙의 미전도 부족을 향한 담대한 탐험과 연구를 시작했다.

본론 2: 킬리만자로의 발견과 꾸준한 쟁기질
레프만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된 것은 그의 기념비적인 지리적 발견 때문이었다.

적도의 만년설을 향한 조롱과 진실
1848년, 레프만은 내륙의 차가(Chagga)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탐험 여행을 떠났다. 그 여정 중에 그는 현지인들이 '위대함의 산' 또는 '빛나는 산'이라 부르는 거대한 산, 킬리만자로를 목격했다. 그는 일기에 "산 정상은 놀랍도록 하얀 구름으로 덮여 있는 듯했다. 나의 안내인은 그것이 구름이 아니라 '차가움'이라고 말하며, '바리디(baridi, 냉기)'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

그와 크라프가 영국으로 보낸 이 '적도의 만년설' 보고는 유럽 지리학계로부터 엄청난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두 선교사를 허풍쟁이 혹은 말라리아 환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오히려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탐험의 열기를 촉발시켰고, 십여 년 후 전문 탐험가들이 그의 발견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했다.

29년간의 묵묵한 헌신
지리적 발견이라는 극적인 사건 외에, 레프만의 진짜 사역은 라바이 선교 기지에서 보낸 수십 년간의 묵묵하고 꾸준한 헌신에 있었다. 그는 크라프가 건강 문제와 선교 전략 구상을 위해 유럽으로 자주 떠났던 것과 달리,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선교지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언어 연구: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로서, 자신이 사역하던 지역의 완이카(Wanika) 부족 언어를 깊이 연구하여 사전과 문법책을 편찬했다. 그는 또한 크라프의 스와힐리어 사전 작업을 돕는 등, 동아프리카 언어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교육과 복음 전도: 그는 라바이 기지에서 학교를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쳤고, 주변 마을들을 꾸준히 방문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은 폭발적인 부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꾸준한 쟁기질처럼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갈아엎었다.

고난 속의 인내: 그는 아프리카에서 아내와 자녀를 잃는 깊은 슬픔을 겪었다. 또한 오랜 세월 풍토병과 싸우면서 점차 시력을 잃어갔고, 말년에는 거의 맹인이 된 상태에서도 선교지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본론 3: 조용한 거인의 유산
1875년, 완전히 시력을 잃고 건강이 악화된 레프만은 29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마침내 고향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1년 후인 1876년, 자신의 오랜 동역자였던 크라프의 집 근처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유산은 그의 성품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단단하다.
첫째, 그는 '성실함'이라는 선교사의 가장 위대한 덕목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수십 년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눈에 띄는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그리고 모든 것을 잃는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의 삶은 '오래 참음으로 열매를 맺는' 신앙의 본질을 증거한다.

둘째, 그는 위대한 동역의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비전가였던 크라프의 곁에서, 그의 비전이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묵묵히 실무를 감당했던 최고의 파트너였다. 동아프리카 선교의 위대한 역사는 크라프라는 엔진과 레프만이라는 굳건한 닻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셋째, 그는 킬리만자로를 통해 아프리카의 문을 열었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지리적 발견은 서구 세계의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였지만, 동시에 아프리카 탐험의 황금 시대를 연 중요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결론: 묵묵히 자리를 지킨 파수꾼
요하네스 레프만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웅은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비전을 제시한 크라프의 그늘에 가려진, 조용한 2인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선교는 언제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탐험가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개척된 땅에 남아, 수십 년간 묵묵히 밭을 갈고 씨앗을 심으며, 그 땅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레프만은 바로 그 위대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가 처음 발견했던 킬리만자로의 눈은, 수십 년이 지나도 녹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아프리카 대륙을 묵묵히 내려다본다. 요하네스 레프만의 삶은 바로 그 킬리만자로의 만년설과도 같았다. 화려하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순결한 모습으로,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동아프리카 선교의 영원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강의 읽음 등록
mainlogo.png

Дэлхийн Интернэт Номлолын Нийгэмлэг (SWIM) нь 1996 онд байгуулагдсан номлогчийн байгууллага бөгөөд 20 гаруй жилийн турш интернет болон мэдээллийн технологийн тусламжтайгаар дэлхийн номлолд хувь нэмрээ оруулсаар ирсэн.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