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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페니 (Alopen)

635년 중국 당나라에 도착하여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전파한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알로페니(Alopen): 실크로드를 건너온 빛, 침묵의 제국에 복음을 전한 첫 사도
서론: 장안의 길, 낯선 복음의 첫걸음
7세기 중반, 세계사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중국 당나라(唐)의 수도 장안(長安)은 문명의 용광로였다. 실크로드를 따라 흘러들어온 온갖 인종과 문화, 사상이 어우러지던 이 국제적인 대도시의 길 위에, 서쪽에서 온 낯선 이방인 한 무리가 첫발을 내디뎠다. 그들의 지도자는 알로페니(Alopen)라는 이름을 가진 페르시아의 선교사였다. 그는 군대나 무역상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비단이나 향신료가 아닌,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성스러운 경전'이었다.

알로페니의 이야기는 기독교 2000년 역사상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오랫동안 잊혔던 한 장을 차지한다. 그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서방 교회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동방 교회(Church of the East)', 즉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사도였다. 그가 중국에 전한 신앙은 훗날 '경교(景教)', 즉 '빛의 종교'라 불리게 된다. 그의 존재와 사역은 거의 1000년 가까이 역사의 먼지 속에 묻혀 있다가, 1625년 시안(西安, 옛 장안)에서 거대한 비석 하나가 우연히 발견되면서 기적적으로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라 불리는 이 비석은 알로페니의 여정과 경교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중국 기독교 역사의 '로제타 석'과도 같은 존재다. 그것은 마테오 리치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의 문을 두드리기 거의 1000년 전에 이미 기독교가 중국 황제의 공식적인 인정 아래 뿌리내렸던 놀라운 역사를 증언한다.

본 글은 이 신비로운 선교사 알로페니와 그가 전한 '빛의 종교'의 발자취를 추적하고자 한다. 먼저 당나라 태종 시대의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알로페니가 어떻게 장안에 도착하여 황제의 환대를 받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경교가 어떻게 중국의 문화와 사상에 적응하며 뿌리내렸는지 그 '토착화' 전략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한때 번성했던 이 고대 교회가 왜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는지, 그리고 알로페니의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황제의 도시, 문을 열다
알로페니의 선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 이전에, 그가 도착했던 당나라의 시대정신, 즉 전례 없는 개방성과 문화적 자신감에 있었다.

황금시대의 수도, 장안
알로페니가 장안에 도착한 635년은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太宗) 이세민의 치세였다.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불리는 이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번영했던 시기 중 하나로 꼽힌다. 태종은 군사적, 정치적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외래문화와 종교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관용과 호기심을 보였다. 수도 장안은 인구 10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으며,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인도, 심지어 일본과 한반도에서 온 상인, 외교관, 유학생, 종교인들로 북적였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알로페니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만약 그가 폐쇄적이고 외국인을 배척하는 시대에 도착했다면,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한 채 사라졌을 것이다.

황제의 환대와 경전 연구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알로페니의 도착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635년, 알로페니는 페르시아(비석에서는 '大秦', 즉 대진으로 표기)에서 경전과 성상(聖像)을 가지고 장안에 도착했다. 태종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재상이었던 방현령(房玄齡)을 직접 교외로 보내 그를 황궁으로 정중히 맞아들이게 했다. 이는 일개 외국 종교인에게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황제는 알로페니가 가져온 경전을 황궁 안의 도서관에서 번역하게 하고, 그 교리를 친히 연구했다.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경교의 가르침을 깊이 살펴본 후 "그 가르침이 신비롭고, 고요하며, 인간에게 이롭다"고 판단했다. 황제는 그 교리가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며, 만백성에게 유익하니 마땅히 천하에 행해져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황제의 평가는 경교가 중국 사회에 발을 내딛는 데 결정적인 공인이 되었다. 마침내 638년, 태종은 공식적인 칙령을 내려 알로페니가 장안의 의녕방(義寧坊)에 수도원(당시에는 '寺'라 불림)을 세우고, 21명의 수도사와 함께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로써 중국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황제의 비호 아래 공식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본론 2: '빛의 종교(景教)' - 중국 옷을 입은 기독교
알로페니와 그의 후계자들이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의 유연한 '토착화(Inculturation)' 전략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낯선 서양의 것으로 소개하지 않고, 중국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으로 재해석했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란 무엇인가?
알로페니가 전한 경교는 동방 교회의 한 흐름으로,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하여 서방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로 불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완전한 연합보다는 두 본성의 뚜렷한 구별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네스토리우스파라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동방 교회' 또는 '페르시아 교회'로서, 시리아어를 예배 언어로 사용하며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 광대한 선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학은 서방 교회와는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도교와 불교의 옷을 입은 교리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새겨진 경교의 교리는 그들의 토착화 노력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비문은 십자가나 예수의 고난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도교의 '도(道)'를 연상시키는 매우 철학적인 언어로 유일신 하나님을 묘사한다.

"판단컨대, 영원하고 참되며 고요하고 변함이 없으시며, 시작도 없고 근원도 없는 분이 계시니...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으되 스스로 존재하시니, 그 이름은 '아라하(阿羅訶, Eloha의 음차)'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해 불교에서 붓다를 높여 부르는 '세존(世尊)'이라는 용어를 차용하기도 했고, '성령'을 '정풍(淨風, 깨끗한 바람)'으로, '수도원'을 '사(寺)'로, '사제'를 '승(僧)'으로 부르는 등 불교와 도교의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이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중국인들에게 친숙한 개념의 틀 안에서 설명하려는 의도적인 시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경교(景教)', 즉 '빛의 종교'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빛을 숭상하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영향과 함께, 깨달음과 지혜의 빛을 강조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에 호소했다.

본론 3: 잊혀진 교회의 흥망성쇠
알로페니가 심은 씨앗은 이후 약 200년간 당나라 황실의 비호 아래 무성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그 뿌리는 황실의 정치적 변덕이라는 약한 토양 위에 놓여 있었다.

번영과 확산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高宗) 황제 역시 경교를 후원하여, 알로페니를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 나라를 지키는 위대한 법의 스승)'로 봉하고 전국 각 주에 경교 사원을 세우도록 허락했다. 경교는 장안을 넘어 중국의 여러 주요 도시로 퍼져나갔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세워진 781년은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150년이 지난 시점으로, 당시 황제였던 덕종(德宗)의 후원 아래 경교가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다. 비문에는 이사(伊斯)와 같은 페르시아 출신 경교도들이 당나라 조정에서 고위 관직에 오르고, 심지어 곽자의(郭子儀)와 같은 위대한 장군을 도와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쇠락과 소멸
그러나 8세기 중반 안사의 난(安史之亂)을 겪으며 당나라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개방적이고 국제적이던 분위기는 점차 외국인을 배척하는 국수주의적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결정타는 9세기 중반에 찾아왔다. 845년, 도교를 숭상했던 무종(武宗) 황제는 막대한 부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불교 사원을 탄압하기 위해 '회창훼불(會昌毁佛)'이라는 대대적인 종교 박해를 단행했다. 이 박해의 주된 표적은 불교였지만, "불교가 아닌 다른 외래 종교(祅祠)도 모두 철폐하라"는 칙령에 따라 경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도 함께 철퇴를 맞았다. 전국의 경교 사원은 파괴되거나 몰수되었고, 3천여 명의 사제들은 강제로 환속(還俗)당했다.

황실의 비호라는 우산을 잃어버린 경교는 이 박해 이후 급격히 쇠락하여 중국 역사 속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때 번성했던 빛의 종교는 그렇게 20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기나긴 망각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결론: 비석에 새겨진 불멸의 발자취
알로페니의 이야기는 서구 중심의 기독교 역사관에 경종을 울린다. 그의 여정은 복음이 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어, 고대의 실크로드를 따라 얼마나 멀리, 그리고 얼마나 일찍 동쪽으로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는 군사적 정복이나 문화적 오만함이 아닌, 깊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다른 문명권에 복음을 전한 위대한 선교의 선구자였다.

그가 전한 경교는 비록 중국 역사 속에서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유산은 돌에 새겨져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1625년에 발견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알로페니와 그의 후계자들이 뿌렸던 씨앗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불멸의 기념비이다. 이 비석은 잊혀졌던 역사를 복원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특정 문화나 언어에 갇히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이며, 어떤 문화 속에서도 뿌리내리고 꽃피울 수 있는 생명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알로페니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낯선 문화와 사상을 마주했을 때, 그들의 언어로 '빛'을 설명하려는 지혜와 겸손을 가지고 있는가? 당나라 황제의 관용과 알로페니의 유연한 지혜가 만나 피워냈던 '빛의 종교' 이야기는, 오늘날 종교와 문명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추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등불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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