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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맥케이 (Alexander Mackay)

'우간다의 맥케이'로 불리며, 공학 기술을 활용하여 우간다 선교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우간다의 맥케이, 기독교인 엔지니어: 아프리카의 심장에 기술과 복음을 심다
서론: 탐험가의 부름, 엔지니어의 응답
1875년,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는 아프리카의 심장부, 빅토리아 호숫가에 위치한 강력한 부간다(Buganda) 왕국을 방문했다. 그는 무테사 1세(Mutesa I) 국왕의 지적인 호기심과 영적인 갈망에 깊은 인상을 받고, 영국으로 긴급한 편지를 보냈다. "이 지성적인 왕에게 기독교를 가르쳐 줄 실력 있는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이 편지는 영국의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실렸고, 유럽 기독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부름에 응답한 수많은 이들 가운데, 독일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한 젊은 스코틀랜드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더 맥케이. 그는 전통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성경뿐만 아니라, 망치와 톱, 그리고 인쇄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복음이 단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기술과 문명의 혜택을 통해 그 진실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었던 '기독교인 엔지니어'였다.

그의 사역지 우간다는 이슬람 상인,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그리고 영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각축장이 된 치열한 영적 전쟁터였다. 그는 이곳에서 정치적 음모와 거대한 박해의 불길을 통과하며, 우간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초석 중 하나를 놓았다. 본 글은 '우간다의 맥케이'라 불렸던 이 위대한 실천적 선교사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스코틀랜드의 엔지니어가 어떻게 아프리카의 부름에 응답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그가 부간다 왕국에서 펼쳤던 독특한 '엔지니어링 선교'와, 므왕가 왕의 끔찍한 박해 속에서도 교회를 지켜낸 그의 헌신을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땀과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우간다 교회의 유산을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스코틀랜드의 엔지니어, 아프리카의 부름에 답하다
알렉산더 맥케이는 1849년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신학보다는 기계와 공학에 더 깊은 열정을 보였고,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한 뒤 독일 베를린에서 유능한 기계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스탠리의 편지 한 통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공학 기술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여러 선교 단체에 지원했지만, 그의 '세속적인' 기술은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을 받곤 했다.

그러던 중, 그의 운명을 바꾼 스탠리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그는 무테사 왕이 단순한 설교자가 아닌,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자를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확신하고, 즉시 영국의 성공회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CMS)에 지원했다. CMS는 그의 재능과 열정을 인정하고, 그를 우간다로 파송되는 첫 선교팀의 일원으로 임명했다.

죽음의 행군, 빅토리아 호수를 향하여
1876년, 맥케이를 포함한 8명의 선교사들은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 항구를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지인 빅토리아 호숫가의 부간다 왕국까지의 여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는 1,300km의 길은 험준한 산과 늪지, 그리고 온갖 질병이 들끓는 곳이었다.

8개월이 넘게 이어진 이 '죽음의 행군' 속에서, 선교팀의 리더를 포함한 여러 명이 말라리아와 이질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1878년 11월, 마침내 부간다 왕국에 도착한 선교사는 맥케이를 포함하여 단 두 명뿐이었다. 이 끔찍한 여정은 그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무게를 예고하는 서곡과도 같았다.

본론 2: 망치와 인쇄기, 그리고 복음 - 무테사 왕궁에서의 사역
맥케이가 도착한 부간다 왕국은 강력한 중앙 집권적 체제를 갖춘 나라였지만, 동시에 복잡한 세력 다툼의 한복판에 있었다.

각축장이 된 왕궁
무테사 1세 국왕은 매우 영리한 통치자였다. 그는 북쪽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이집트-수단 이슬람 세력에 맞서기 위해 유럽 세력과의 동맹을 원했다. 그는 이미 궁정에 들어와 있던 아랍 상인들의 이슬람과, 새로 도착한 영국 개신교, 그리고 곧이어 도착한 프랑스 가톨릭(백의 신부회)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왕궁은 종교적, 정치적 음모가 들끓는 각축장이었다.

'기독교인 엔지니어'의 지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맥케이의 진가가 드러났다. 그는 섣불리 교리 논쟁에 뛰어드는 대신, 자신의 공학 기술로 왕의 신뢰를 얻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는 왕을 위해 집을 짓고, 우물을 팠으며, 고장 난 총과 기계들을 수리해주었다. 그는 심지어 여러 부품을 조립하여 마차와 보트를 만들어 왕을 놀라게 했다. 그의 실용적인 능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보다 당장의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던 왕에게 가장 강력한 설득의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우간다의 맥케이', '기독교인 엔지니어'라 부르며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바로 인쇄기였다. 그는 수많은 부품으로 분해된 채 아프리카까지 운반된 인쇄기를 직접 조립했다. 그리고 현지 언어인 루간다(Luganda)어를 배워, 마태복음의 일부를 번역하여 인쇄했다. 이는 우간다 역사상 최초의 인쇄물이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소수의 젊은 왕궁 시동(侍童)들이 이 복음서를 탐독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바로 훗날 우간다 교회의 첫 씨앗이 되었다.

본론 3: 순교의 불길 속에서 - 므왕가 왕의 박해와 헌신
1884년 무테사 왕이 죽고, 그의 변덕스럽고 잔인한 아들 므왕가 2세(Mwanga II)가 왕위에 오르면서 우간다 교회는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

우간다의 순교자들
므왕가 왕은 젊은 기독교 개종자들이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다. 그는 또한 기독교인 시동들이 동성애를 포함한 궁정의 부도덕한 관행을 거부하는 것에 격노했다.

1885년, 그는 마침내 기독교에 대한 끔찍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는 우간다의 초대 성공회 주교로 임명되어 부간다 왕국으로 오던 제임스 해닝턴(James Hannington)을 국경에서 살해했다. 그리고 1886년 6월, 그는 자신의 시동이었던 32명의 젊은 기독교인들(성공회와 가톨릭 신자 모두 포함)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어린 순교자들은 불길 속에서도 찬송을 부르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어둠 속을 지킨 등불
이 끔찍한 박해의 기간 동안, 맥케이는 수도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는 므왕가 왕 앞에 직접 나아가 박해의 부당함을 용감하게 항의했고, 핍박받는 개종자들을 숨겨주며 위로했다. 그는 순교자들의 마지막 순간의 용기와 신앙을 상세히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냈다. 그의 편지를 통해, '우간다의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전 세계 교회에 알려졌고, 아프리카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깊고 진실한지를 증거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다.

박해의 광풍 속에서도 그는 인쇄기를 계속 돌려 복음서를 찍어냈고, 비밀리에 성경 공부 모임을 인도하며 교회의 명맥을 지켰다. 그는 12년간의 고된 사역으로 심신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지만, 결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890년, 알렉산더 맥케이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말라리아에 걸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땅 우간다에서 눈을 감았다.

결론: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
알렉산더 맥케이의 삶은 성공적인 공학자의 길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심장부에서 복음의 씨앗을 심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 헌신의 기록이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거둔 열매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그가 죽은 뒤에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므왕가 왕의 박해는 교회를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순교자들의 피를 자양분으로 삼아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순교자들의 용기에 감동받은 수많은 우간다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맥케이와 그의 동료들이 놓은 기초 위에 우간다 교회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하고 역동적인 교회 중 하나로 굳건히 서게 되었다.

알렉산더 맥케이의 삶은 선교사의 도구가 설교단과 성경책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의 망치와 인쇄기는 그 어떤 웅변보다도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증거했다. 그는 '기독교인 엔지니어'로서, 우간다 교회가 세워질 실질적이고 영적인 토대를 설계하고 구축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그의 땀과 순교자들의 피 위에, 우간다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굳건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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