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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오 지겐발크 (Bartholomäus Ziegenbalg)
인도에 파송된 최초의 독일 루터교 선교사로, 타밀어 성경 번역과 인쇄소를 설립했습니다.

인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바르톨로메오 지겐발크: 시대를 앞서간 선교의 거인
서론: 캐리 이전의 캐리, 잊혀진 개척자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보통 18세기 후반 인도로 떠난 영국의 구두 수선공 윌리엄 캐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캐리가 인도의 흙을 밟기 거의 90년 전, 이미 인도의 타밀 땅에서 현대 선교의 거의 모든 원칙을 실천하며 고독하게 분투했던 한 젊은 독일인 선교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르톨로메오 지겐발크. 그는 역사상 최초의 개신교 해외 선교사 중 한 명이자, 인도 땅에 처음으로 개신교 복음의 씨앗을 심은 위대한 개척자였다.
그의 삶은 윌리엄 캐리의 삶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그는 현지 언어(타밀어)를 완벽하게 습득했으며, 최초로 신약성경을 인도 언어로 번역했고, 인쇄기를 들여와 복음을 대량으로 보급했으며, 카스트 제도를 타파하는 학교를 세웠고, 인도 문화와 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서를 저술했다. 그는 18세기 초 식민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에, 시대를 훨씬 앞서가는 '토착화'와 '총체적 선교'의 모델을 제시한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끊임없는 오해와 반대 속에서 펼쳐졌다. 그는 현지 힌두교도들의 저항뿐만 아니라, 선교를 귀찮은 방해물로 여기던 덴마크 동인도 회사의 식민 관리들과, 심지어 유럽에 있는 자신의 후원자들로부터도 비판과 의심에 시달려야 했다. 본 글은 이처럼 잊혀졌지만 위대한 선교의 거인, 지겐발크의 생애와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독일 경건주의의 뜨거운 심장부에서 그가 어떻게 인도를 향한 소명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인도 트랑케바르에서 그가 펼쳤던 혁신적인 선교 전략과 기념비적인 성경 번역 사업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짧고 고통스러웠던 삶이 어떻게 인도와 세계 선교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초석을 놓았는지 그 의미를 조명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본론 1: 할레의 경건주의와 덴마크 왕의 부르심
지겐발크의 선교 열정은 17세기 후반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Pietism)' 운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경건주의의 심장, 할레
지겐발크는 1682년 독일 작센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심을 가졌으며,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가 이끌던 할레(Halle)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 할레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심장부였다. 경건주의는 정통주의 신학의 차가운 교리주의를 비판하고, 개인적인 회심 체험과 경건한 삶, 그리고 이웃을 향한 실천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특히 프랑케는 고아원을 설립하고 성경을 보급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으며, 세계 복음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학생들에게 불어넣었다. 지겐발크는 바로 이 할레의 뜨거운 영적 용광로 속에서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키워나갔다.
덴마크 왕의 요청과 역사적인 파송
기회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덴마크의 국왕 프레데리크 4세는 경건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인도 남동부 해안에 소유하고 있던 작은 식민지 트랑케바르(Tranquebar)에 거주하는 인도인 신민들의 영적 구원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왕실 사제를 통해 선교사를 물색했지만, 덴마크에서는 아무도 이 낯설고 험난한 임무를 자원하지 않았다.
결국 왕의 요청은 독일 할레의 프랑케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프랑케는 자신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열정적이었던 두 젊은이, 바르톨로메오 지겐발크와 그의 친구 하인리히 플뤼차우(Heinrich Plütschau)를 추천했다. 1705년, 두 사람은 덴마크-할레 선교회(Danish-Halle Mission)의 이름으로 덴마크 국왕에게 안수받고,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해외 파송 선교사가 되어 인도를 향한 긴 항해에 올랐다.
본론 2: 트랑케바르의 혁명 - 새로운 선교의 시작
1706년 7월, 8개월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지겐발크와 플뤼차우는 트랑케바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환대가 아닌, 냉대와 적의였다.
언어와 문화 속으로
덴마크 동인도 회사의 관리들은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해치고 현지인들을 자극할 것이라 여겨 그들의 상륙을 막으려 했다. 현지 유럽인 공동체는 그들을 광신자로 취급하며 경멸했다.
이러한 고립 속에서 지겐발크는 선교의 첫걸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현지인들의 언어, 즉 타밀어(Tamil)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통역사에 의존하는 대신, 직접 타밀어를 배우는 데 매달렸다. 그는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글자를 배우고, 돈을 주고 현지 학자들과 대화하며, 하루 12시간 이상 언어 공부에 몰두했다. 몇 년 만에 그는 타밀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밀 문학과 힌두교 경전을 원어로 읽고 이해하는 깊은 수준에 도달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접근이었다. 그는 선교 대상자를 존중하고 그들의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려는 '성육신적 선교'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그는 타밀-힌두교의 신들과 관습, 철학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인 『남인도 신들의 계보(Genealogy of the South-Indian Gods)』를 저술했지만, 정작 유럽의 후원자들은 "이교에 대한 연구 대신 복음 전파에나 힘쓰라"며 그의 학문적 노력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씀과 교육, 인쇄술의 힘
언어의 장벽을 넘은 지겐발크의 사역은 세 가지 핵심 축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첫째는 학교 설립이었다. 그는 1707년, 카스트와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이는 인도 최초의 서구식 학교 중 하나였으며, 특히 여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둘째는 성경 번역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1708년부터 타밀어 신약성경 번역이라는 기념비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단순히 라틴어나 독일어 성경을 중역하는 대신, 헬라어 원문을 직접 타밀어로 번역하는 학문적 엄밀함을 추구했다. 마침내 1715년, 인도 최초의 토착어 신약성경인 타밀어 신약성경이 완성되고 인쇄되었다.
셋째는 인쇄술의 도입이었다. 그는 자신의 번역과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유럽에서 인쇄기를 들여왔다. 1712년 트랑케바르에 설치된 인쇄기는 인도 최초의 인쇄기 중 하나로, 타밀어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교리문답, 찬송가 등 수많은 기독교 문서를 인쇄하여 복음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본론 3: 반대와 고난, 그리고 짧은 생애
지겐발크의 혁신적인 사역은 끊임없는 반대와 고난에 부딪혔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위해 안팎으로 싸워야 했다.
네 달간의 투옥
그의 가장 큰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족인 덴마크 식민 관리들이었다. 트랑케바르의 덴마크 총독이었던 하시오스(Hassius)는 지겐발크의 모든 활동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갈등이 극에 달했던 1708년, 총독은 사소한 분쟁을 빌미로 지겐발크를 체포하여 4개월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덥고 비좁은 감옥 속에서도 지겐발크는 좌절하지 않고, 동료 개종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오히려 타밀어 신약성경 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짧지만 위대한 삶
13년간의 헌신적인 사역은 그의 건강을 완전히 소진시켰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선교 보고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인도에 있었다. 그는 독일에서 아내를 만나 함께 인도로 돌아왔지만, 인도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못했다.
1719년 2월 23일, 바르톨로메오 지겐발크는 36년이라는 너무나 짧은 생을 마감하고 트랑케바르의 흙에 묻혔다. 그가 죽었을 때, 그가 번역하던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룻기까지의 원고가 그의 곁에 놓여 있었다.
결론: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잊혀진 거인
바르톨로메오 지겐발크의 삶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인도 기독교 역사의 거대한 주춧돌이 되었다. 그는 윌리엄 캐리보다 한 세기 가까이 앞서, 현대 선교의 거의 모든 중요한 원칙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보였다.
토착어 성경 번역의 중요성: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말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실천했다.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 그는 선교 대상자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연구하는 것이 효과적인 선교의 전제임을 보여주었다.
총체적 선교: 그는 복음 전도와 더불어 교육과 사회 계몽이 함께 가야 함을 알았다.
인쇄술의 활용: 그는 미디어를 통한 복음 전파의 선구자였다.
비록 그의 이름은 윌리엄 캐리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선구적인 사역이 없었다면 캐리의 업적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걸어간 고독한 개척자였다. 18세기 초, 식민주의와 인종적 편견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인도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심고자 했던 그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모든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감과 도전을 주고 있다.